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05551

성자산산성 따라 걸어보았습니다 (1)
연변 내 고향 여행 (9)
06.01.18 16:36 l 최종 업데이트 06.01.18 17:09 l 리광인(guangren33)


▲ 성밖에서 바라본 성자산성 북문터 ⓒ 상공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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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 동쪽 10키로미터 되는 곳에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성자산산성이 있고 한 때는 역사상 단명을 가진 동하국의 사실상 수도였다지만 이곳 성자산성이 고구려 시기의 산성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못한 것 같다. 병술년 새해 벽두에 연우산악회에서는 역사 속 성자산성을 따라 두루 걸어보면서 내 고향 먼먼 그제날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1월 7일 오전 8시, 약속대로 시안의 노잔 부근의 15선 시발점에 모이니 산악회회원들 외에도 연변대 석사연구생 등 여럿이 섞이었다. 성자산산성을 전문 답사한다는 말을 듣고 모여든 그네들이었다. 연길시에 살면서 살아움직이는, 유구한 역사가 깃든 성자산성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그들이 대견스러워보였다. 헌데 성자산 서남쪽가에 이르니 어느 길을 택하느냐가 생각처럼 되어 주질 않았다. 결국 서남쪽에서 성자산에 직접 오르는 흔히 걷는 길을 버리고 성자산을 북쪽으로 에돌아 북문자리부터 순서적으로 한바퀴 돌아보는 길을 택하였다. 

겨울날씨 치고는 등산하기 좋은 일기였다. 성자산 서남쪽의 언덕을 넘으니 서쪽의 청차관에서부터 뻗어내린 골짜기가 한눈에 안겨들었다. 골짜기 북쪽너머는 루루 천년의 옛 산정늪이 있다는 욕지산이었다. 필자가 동행한 산신님과 욕지산의 유래를 곁들이는데 일행 가운데는 잠간 걸음을 멈추고 성자산과 욕지산의 얘기를 듣자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고학자나 고대사전공이 아닌 필자는 일순 헤둥대다가 아는만큼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헤둥댄 것은 골짜기가 끝나는 동쪽의 철길가였다. 여느 때 같으면 철길 가로 뻗은 남행길이 보이겠으나 굴삭기로 흙을 무져놓은데서 길이 동강났다. 그 통에 일순 헤둥거려야 했으니 이 길안내자의 체면이 구겨질 뻔 했다.

흙무지를 넘으니 원길이 나타나고 한참 더 길을 조이니 성자산 북문이 오른쪽 눈앞이었다. 그러니 우린 성자산을 북으로 에돌아 3키로미터 쯤은 걸어온 셈이였다.


▲ 북문가에서 바라본 욕지산 ⓒ 상공 옥저

<2>

성자산성 북문자리는 말발굽형으로 생겨난 옛 성터의 북쪽 계곡어구에 자리잡고 있었다. 좌우 량측은 나무가 꽉 들어선 산이고 그 사이 계곡어구 옛 산성터에 시멘트로 만들어 세운 표시패가 두개 서 있었다. 써 놓은 글들이 비바람 속에서 퇴색하여 성자산성, 4월13일이라는 글자를 알아내기엔 너무도 힘겨웠다. 실망이 뒤따른 것은 옛산성이 오른 쪽으로 뻗어나간 성자산성 북쪽구간 산이었다. 참나무를 비롯한 키 낮은 나무들이 촘촘히 들어선데서 그 사이를 헤쳐간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었다.


▲ 성자산성 북문터. 양쪽으로 솟은 산릉선을 타고 성벽이 갈라지며 가운데 작은 계곡을 가로지른 성문터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이 추위에 얼어 있었다. ⓒ 상공 옥저
 
북쪽구간 옛 산성답사는 포기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별수 없이 계곡 따라 조금 오르다가 왼쪽으로 언덕길을 잡아야 했다. 언덕에 오르면 옛 궁정터 자리였다. 다시 말해서 산우 말발굽 형으로 생겨난 분지에 생겨난 궁정 옛터를 이른다. 사위는 온통 눈으로 덮혔지만 사이사이에 옛 기와쪼각들을 주을 수도 있었다. 이때 성자산에 처음 오른다는 옥저님이나 산신님의 얼굴에 희열이 넘쳐남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느끼는 만큼 감수가 다르다고 산신님은 연길시 가까이에 이런 옛 산성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며 개발가치가 크다고 연신 되뇌이었다.

역사 속의 성자산산성은 한 때 단명과 비명에 사그러져간 동하국의 남경이였다. 알고보면 금나라말기에 요동선무사로 지내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서기 1215년에 동경으로 불리운 요양에서 천황으로 자처하면서 대진(大眞)국을 세웠다. 후에 국호를 동하(東夏)라고 바꾸었는데 동하국시기에 연변지구는 동하국에 망라되었다. 동하국의 왕 포선만노가 한 때 연길시 동쪽 20리 가의 성자산성을 행도남경(行都南京)으로 삼았기에 성자산성은 사실상 동하국의 수도로도 통한다.

그러던 1233년 9월, 적절히 말하면 동하국이 세워져 19년 만에 신흥세력 몽골군이 동하국의 남경을 대거진공하였다. 원나라가 세워지기전의 일인데 성자산성을 지켜내는가 못하는 가는 동하국의 운명을 판가르는 대사었다. 몽골군은 먼저 성자산산성의 평지성인 동쪽 강대안의 하룡고성(古城)을 들이쳤다. 


▲ 산성 정상의 성벽에서 바라본 하룡고성 옛터. 지금은 하룡촌 본마을이 들어서 있다. ⓒ 상공 옥저
 
때는 동하국사람들이 평지성을 몽땅 비우고 량곡과 무기까지 산성으로 옮긴 뒤라 두 나라 군대는 산성의 북문쪽을 에워싸고 치렬한 공방전을 벌리였다. 동하국의 군사주의력이 북문에 쏠린 사이 몽골군의 주장 사찰은 군사를 갈라 산성의 서남쪽을 불의기습하였다. 서남쪽이 돌파되자 몽골군이 산성안으로 대거 밀려 들었다. 동하국군대와 백성들은 죽기내기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비운의 운명을 면치 못했다. 성자산성은 삽시간에 피바다로, 쓸쓸한 폐허로 되고 말았다. 

그때 동하국의 왕 포선만노도 산성 안에 있다가 포로되여 죽었다고 전한다. 결국 동하국은 19년만에 역사무대에서 비명에 사라졌다. 필자가 옛 궁정터에서 동하국의 단명사를 피력하자 일행은 자연과 역사문화가 그대로 보존된 성자산성은 그저 스치고 지날 산성과 옛터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 성안에서 바라본 성자산성 북문터 ⓒ 상공 옥저


▲ 서남쪽 정상에 있는 남문터 
ⓒ 상공 옥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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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자는 사람들은 흔히 성자산성을 동하국의 산물로 알고 있지만 기실은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라고 설명했다. 고고학계의 이문신선배의 주장이라면 연변 고고학계의 주장도 고구려산성이다. 궁정 동남쪽 200미터쯤 되는 평지에 고구려시기의 무늬암키와쪼각들이 대량 널려있는 것이 그 유력한 근거였다. 이런 무늬암키와들은 고구려의 무늬암키와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연변 고고학계 원로의 한분인 엄장록선생은 “무늬암키와의 출현을 통해 본 연변지구 옛 유적의 시대성격”이란 한편의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돌로 성벽을 쌓은 살기성(필자 주: 훈춘시에 있음.)과 성자산성은 고구려의 환도산성의 특징이 있으며 또 살기성부근에 양목림자 유적이 있고 성자산성의 부근에 하룡고성이 있는데 이는 집안의 국내성과 환도산성의 위치배치와 같다. 즉 산성과 평원성을 배합하여 축조한 형식이다… 출토된 무늬암키와들의 모양과 색갈은 거개가 다 집안의 동대자유지, 환도산성에서 출토된 무늬암키와와 비슷하거나 같다.”


▲ 성자산성 남쪽 정상 등줄기를 타고 남아있는 성벽 ⓒ 상공 옥저

역사로 보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요녕성 환인 오녀산성에서 건국된 뒤 기원전 28년에 오늘의 연변서 살고 있던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만들었다. 그뒤 연변지구에서 고구려의 무늬암키와를 쓰게 된 것이 서기 420년 전후라고 하니 고구려산성도 그 시기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엄장록 선생 등 연변 고고학계의 정설인데 고구려시기에 축조된 성자산성은 그후 발해나 동하국 시기에 계속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필자가 성자산성이 고구려산성이라고 밝히자 일행은 짙은 흥미를 가지면서 옛 성터에서 성자산의 지형, 산천초목을 둘러 보았다. 이 때에야 그네들은 옹군 성자산내는 말그대로 말발굽형으로서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중간이 움푹 패워 들어갔음을 어렵사리 보아냈다. 서남에 위치한 산성의 주봉은 해발이 390미터이고 동쪽과 북쪽에 길지 않은 계곡이 있어 실개천이 각기 계곡 따라 흐른다는 것, 두 갈래 실개천은 또 중간이 패운 산성 심장지대를 3개의 지대로 갈라놓고 산성의 동남쪽가에서 해란강물을 받아들인 부르하통하가 연길도문행 철길 따라 산성의 남쪽, 동쪽, 북쪽 삼면 기슭을 에돌아 흐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자산성의 성벽은 산봉우리, 영마루, 산허리 우에 쌓아져 그야말로 웅위로운 모습이었다. 한때는 미모의 궁녀들이 줄지은 옛성터었겠지만 그젯날의 미녀들도 세월을 피해가지는 못했으니 모든 것이 세월 속에 사라져 버렸다.


▲ 동쪽정상성벽에서 바라본 성내 ⓒ 상공 옥저


▲ 동에서 흘러오는 해란강과 남에서 흘러오는 부르하통하(우측)가 바로 산성동남쪽 아래기슭에서 합수하는 것이 내려다 보인다. 
ⓒ 상공 옥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일별하는사이 성자산산성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이 자리매김했다. 그 인상에 이어 일행은 서북쪽산으로 오르는 몇리 비탈길에 들어섰다. 도중에 수림 속에서 따뜻한 우유, 콩물을 마시며 쉬어야 했지만 누구하나 행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늘찬 비탈길은 산기슭에 이르러 동강났다. 나무군들의 소수레길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경사도가 심한 산비탈인데 숫 눈길을 헤쳐야 했다. 그 나마 한국산 등산신으로 무장한 산악회 회원들은 괜찮았으나 목이 긴 구두를 신었거나 유람용신을 신은 이들은 신바닥이 미끄러워 무척 신고해야 했다.


ⓒ 상공 옥저


ⓒ 상공 옥저

덧붙이는 글 | 리광인(리함) 기자는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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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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