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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52>제21대 문자명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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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간 백제는 이때에 이르러 천도 이래의 대혼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백제 사람 2천 명이 굶주려서 고려에 도망쳐 항복해왔다는 이 기사에 대해 백제본기의 자문을 빌리면,

당시 백제의 문란하고 어지럽던 정세로 백성들이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八年, 百濟民饑, 二千人來投.]

8년(499)에 백제 백성들이 굶주려 2천 명이 투항해 왔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이 무렵 백제는 위례성에서 웅진성으로 내려온 해씨와 진모씨, 국씨, 목례씨, 협씨 같은 부여계 구귀척과,

이전부터 웅진성 일대에서 토착 세력으로 존재하던 사택씨, 연비씨, 백씨 등의 마한계 신흥귀척 사이에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귀척들의 농단에 휘돌리지 않으려 말다왕은 기존의 부여계 귀척 대신 신흥귀척들을 등용했고,

상대적으로 부여계 귀척들은 소외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출신지,

지금의 한강 일대에 대해서도 백제 조정의 관심이 멀어지게 된다.

 

여름께 한산 일대를 휩쓴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기도 하고

심지어 도적까지 되는 와중에도, 말다왕은 끝내 한산 일대에 대한 구휼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이듬해에는 웅진 왕성에 높이 다섯 장의 임류각(臨流閣)을 세우고 사치스러운 정원을 꾸미면서,

오히려 잔소리 듣기 싫다고 궐문 닫아버리고, 좌우 근신들과 밤새 놀기까지.

(나라 망할 짓을 앞장서서 다 하고 있었다.)뭐 백제가 망하면 고려나 신라야 좋은 일이겠지만서도....

 

[九年,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9년(500) 가을 8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후위서》에 기록된 바 이것은 북위 선무제(宣武帝) 경명(景明) 원년, 간지로는 태세 경진(500) 8월 기미이다.

이 해에, 법도의 뒤를 이어 승랑은 산사를 다스리는 직책을 맡게 된다.

 

[十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10년(501) 봄 정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문자명왕 10년, 결국 백제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동성왕은 살해되고,

대신 동성왕의 이복 형이었던 부여사마가 즉위한다. 이가 백제 25대 무령왕이다.

 

[梁高祖卽位, 夏四月, 進王爲車騎大將軍.]

양(梁)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여름 4월에 왕을 승진시켜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11년(502)

 

부식이 이 영감태기는 도대체 노망이 든건지 어떤 건지, 502년 기사인 것은 맞게 적어놓고

4월에 있었던 일을 10월과 11월의 가운데에 턱 적어놨다. 숫자 계산도 못 하는 멍청이였던가. 그 노인네는.

문자명왕을 거기대장군으로 봉함과 동시에, 양 고조는 백제의 무령왕에게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칭호를 내렸다.

 

[十一年, 秋八月, 蝗. 冬十月, 地震, 民屋倒墮, 有死者.]

11년(502)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있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메뚜기에 지진이 고려를 휩쓸고. 백제가 고려의 국경을 침공하는 등. 문자명왕 11년의 고려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반면 백제는 동성왕 사후 무령왕이 즉위하고 한성 출신의 부여계 귀척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혼란스럽던 국내문제를 수습하고 다시 정책을 전환해 고려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노선을 채택한다.

그러한 백제의 노선전환을 보여주는 것이 수곡성 싸움이다.

 

[冬十一月, 百濟犯境.]

겨울 11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11년(502)

 

광개토태왕 이야기를 쓸 때부터 이미 그러했지만,

《삼국사》 연대가 안 맞아떨어지는 것은 보면 볼수록 미칠 것만 같다.

대체 날더러 뭘 믿으라고 저렇게 써놓은 건가. 어째서, 성을 침공한 사실 하나를 두고도

고려와 백제가 서로 말이 다른 거냐고? 《삼국사》는 바로 다음해인 문자명왕 12년(503)조에

"겨울 11월, 백제는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어 5천 병사로 수곡성을 쳐들어왔다

[冬十一月, 百濟遣達率優永, 率兵五千, 來侵水谷城]"고 적었고, 같은 책 백제본기는

무령왕 원년(501)조에 "겨울 11월, 달솔 우영을 보내어 5천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의 수곡성을 습격했다[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라고 적었다.

틀림없이, 백제의 달솔 우영이 5천 군사로 고려 수곡성,

그러니까 지금의 황해도 신계를 친 것은 백제본기에도 나와있지만 백제본기에서는 

고구려본기보다 1년 더 끌어올려서 무령왕 원년(501)의 기사로 나오고 있다.

 

서로 보고 쓴 기록이 달라서 그런가. 아니면 1581년에 경주에서

《삼국사》 다시 목판인쇄 할적에 그걸 잘못 새겼나. 하여튼 오자탈자 이런 것 확실하게 잡아야 되는데

나같은 어리버리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기나 하고...

일단 《고구려본기》문자명왕 11년과 12년의 겨울 11월 백제 침공기사는

같은 사실을 기재한 것이라고 생각해 합쳐 적고, 《동사강목》을 따라 502년의 일로 표기한다.

또한 《삼국사》문자명왕 11년조에 "1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어 조공하였다[十二月, 遣使入魏朝貢]"고 한 것은

10년조 12월 기사의 중복표기로 판단해 여기서는 삭제했는데

이것은 《해동역사》에 인용된 《후위서》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후위서》에는 서기 500년과 501년에 해당하는 경명 2년 8월 기미와 3년 정월 신유에

고려에서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은 있지만 502년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조공기사와는 달라서, 우리나라 국록(國錄)은 눈여겨 보지 않으면 기년조정이 힘들단 말야.....

  

[十三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悉弗進曰 “小國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扶餘, 珂則涉羅所産, 扶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世宗曰 “高句麗世荷上將, 專制海外, 九夷黠虜, 悉得征之, 甁罄罍恥, 誰之咎也? 昔方貢之愆, 責在連率, 卿宜宣朕志於卿主, 務盡威懷之略, 揃披害, 輯寧東裔, 使二邑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세종(世宗)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으로 불러들여 만나니, (예)실불은 나아가 말하였다.

“고려는 정성을 대국에 잇대고,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 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마노[珂]는 섭라(涉羅)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 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가지 물건이 왕의 창고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는 세세토록 상국(上國)의 도움을 입어, 해외에서 제멋대로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했는데, 작은 술그릇이 비는 것은 큰 술병의 수치이니 누구의 잘못이겠는가? 이전에 조공이 어그러진 것은 책임이 고려왕에게 있는 것. 경은 짐의 뜻을 경의 왕에게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힘써 다해서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부여 · 섭라)으로 하여금 옛 터를 되찾아 토산물을 빠짐없이 일정히 조공하게 하라.”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고려의 사신으로서 북위 세종을 만난 예실불(단재 선생님 말씀에 예실불은 남양 예씨의 시조라고 했는데

우리 나라에는 의흥 예씨밖에 알려져 있지가 않다)의 말로는 황금은 부여에서,

흰 마노는 섭라 즉 탐라에서 난다고 했다. 예실불이 사신으로서 북위에 도착한 것은

《후위서》에 나온바 정시 원년, 간지로는 태세 갑신(504) 4월 신묘에 해당한다. 여기서 짬을 좀 내서,

부여 지역의 진기한 특산물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소개를 좀 해볼까?(한국고전번역원 《해동역사》에서 발췌)

 

옥(玉): 《후한서》에 보면, 부여에서는 적옥(赤玉)이 산출된다고 기록했다. 당 무종 회창 원년(841)에 부여국(발해)에서 붉은색의 화옥(火玉) 서 말을 바쳤는데, 반 촌 길이에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둥글게 생겼으며, 옥에서 나오는 빛이 수십 보까지 비쳐서 쌓아 두면 마치 연등 같았고, 실내에 놔두면 난방을 안 해도 방이 따뜻해졌다고.

 

구슬: 부여에서는 대추[酸棗]같은 큰 구슬도 나왔다. 부여뿐 아니라 동이 전역에서 '막난주(莫難珠)', 일명 '목난(木難)'이라 불리는 황색의 보석도 산출되었다고 한다.

 

송풍석(松風石): 《두양잡편》에 보면, 무종 효창(孝昌) 원년(525)에 부여에서 송풍석을 바쳤는데, 크기가 사방 1장이고 옥처럼 투명한데 그 속에 고송(古松)이 누워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서늘하게 부는 찬바람이 그 안에서 나왔으므로,한더위가 되면 황제가 이 송풍석을 거처 안에 두다가 가을이 되어 바람이 불 때에 치웠다고 한다.

 

담비[貂]: 부여에서는 담비가죽을 많이 얻을수 있었다. 《이원(異苑)》이라는 책에 보면, 담비는 항상 어떤 괴물과 함께 같은 굴속에서 사는데, 괴물의 크기는 3척에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칼[刀]을 몹시 좋아하므로, 칼을 그 괴물과 담비가 사는 굴 입구에 던져 놓으면 이 괴물이 밤중에 굴에서 나와 칼 옆에 담비가죽을 놓아두는데, 사람이 담비 가죽을 가지고 간 다음에 나와서 그 칼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담비가죽을 쉽게 얻을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슴과 노루: 중국의 《수서》에는 담모라국 즉 탐라국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다고 했고, 《신당서》가 전하는 발해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여산 사슴이었다. 고려의 무역로는 이미 북쪽으로는 부여, 남쪽으로는 백제를 지나 섭라(탐라)에까지 닿아 있었다.고려는 남쪽으로 탐라와 신미 제국의 특산물까지 얻어다가 요하 너머의 육로와 서해의 바닷길을 따라 남조와 북조에 중개 무역을 했던 것이다.

 

<평안남도 자산 봉린산의 안국사. 고려 문자명왕 13년에 해당하는 양 천감 2년(503년)에 처음 지어졌다는 것이 사적비의 설명이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조선조인 1785년에 최종적으로 수리된 것이다.>

 

'조공-책봉'이라는 이름으로 나라간의 관영무역이 행해지던 시대, 그리고 상인들과의 자유로운 사무역과 조정의 눈을 피해 공공연히 행해지는 밀무역으로 이루어진 물류망이 동아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만들어지던 시대, 고려는 중국을 상대로 한 서해 교역에서 백제와 신라, 가야를 누르고 주도권을 쥐었다.

 

이 무렵 고려는 중국의 여러 나라와 다면외교를 펼치고 있었는데,

고려의 외교상대국 가운데 하나였던 중국 남조의 남제(南齊)가 양(梁)에 의해 찬탈당했다.

고려의 사신이었던 예실불이 위에 가서 예물을 바치면서 하는 말ㅡ

말갈과 백제 때문에 부여와 섭라의 특산품을 얻지 못하겠다는 말은 어찌 보면 고려의 핑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위의 세종은 오히려 너그럽게 대답하며 고려 사신을 달래고 있다.

병에 술이 없는 것은 술통의 부끄러움이라ㅡ고려가 그런 해를 겪는 것은 모두 자신들의 잘못이지 고려의 잘못이 아니라고.

고려가 핑계대고 있는 것을 위가 모를 까닭이 없는데도 이렇게 고려 앞에서는 살살 말을 돌려서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고려의 힘이란 그런 것이었다.

 

부여는 말갈에게 쫓기고 있고, 섭라는 백제에게 빼앗겼다ㅡ

나는 여기서 제주도의 토착 가문으로 알려진 고씨, 양씨, 부씨 세 성씨가 문득 고려에도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섭라가 백제에게 빼앗겼다고 했는데, 실제로 고려 사신이 가기 전에 탐라국 역시 백제 동성왕에게 정벌당하지 않았던가.

(실은 탐라 정벌을 빌미로 한 지금의 전남지역 '신미 제국'에 대한 무력행사였지만)

 

고려의 수군은 백제의 해안 전역에 걸쳐 있으면서 백제 사신이 중국으로 가는 길을 막고 왜의 순라병을 잡아 죽일 정도로,

그 무렵 우리나라의 바다 대부분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터다.

고려 수군이 탐라에 갔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탐라의 세 성씨는 모두 어느날 '땅속에서 튀어나왔다'고 했는데,

그들이 튀어나온 그 땅속에 대체 뭐가 있었던 걸까? 탐라 3성씨 전설이 전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흔히 탐라라고도 불리는 제주도에 고려의 옛 풍속이 남아있다 하면 다들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전해지는 탐라의 풍속 가운데는 고려의 그것과 닮은 것이 많다.

고려의 풍속의 하나로 전하는 데릴사위제[婿屋].

이 풍속은 조선조 후기까지 잔존해 전해졌던 우리 고유의 풍속 가운데 하나다. 삼국지 위지 동이 고구려전에,

 

“해가 저물 무렵 신랑은 신부의 집 문 바깥에 이르러서 자기 이름을 밝히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걸한다. 이같이 두세 번 거듭하면 여자의 부모는 그때서야 소옥(小屋)에 가서 자도록 허락한다. 돈과 폐백은 곁에 쌓아두고 자식을 낳아 장성하고서야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

 

라고 한 것. 조선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주 풍속에도,

 

“혼인을 구하는 자는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춘다. 납채(納采)를 하는 자도 그렇다. 혼인날 저녁에 사위가 술과 고기를 갖추어 신부의 부모에게 뵙고 취한 뒤에야 방에 들어간다.”

 

라고 적은 것도 닮아 있다. 고려의 혼인풍속은 신랑 집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보낼 뿐이지 값비싼 혼수며 폐백을 주고받는 일도 없고,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딸을 신랑 집에다 시집보낸 것이 아니라 계집종으로 팔아먹었다고 손가락질하고 욕했다고 하지 않던가? 제주의 명물로 알려진 제주마 역시도, 몽골 지배기에 도입되었다는 기존의 설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재고되어야 하리라. 제주마는 몽고말 같은 호마(胡馬)와는 체형이나 성격이 다르다. 이미 제주도목장사(2003)라는 책에서 몽고말 이전의 우리 토종말, 옥저와 동예에서 길렀다는 과하마(果下馬)와의 연관을 이야기하고 있다. 과하마와 제주마는 거의 동일한 품종이거나 아니면 과하마의 개량종이 제주마일지도 모른다고.

 

기록된바 과하마의 분포는 우리나라 중남부를 내려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중남부에 있던 백제에서 무왕 때인 서기 621년에 당에 과하마를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백제에서 탐라의 말을 사서 당에 바쳤거나 탐라가 백제에 복속된 뒤

탐라의 말을 백제가 장악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가 탐라를 차지하기 이전의 과하마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삼국지》위지 한전에서는 마한 사람들이 소와 말을 써먹을 줄 모른다고 했는데, 가까운 마한에서 말을 쓰는 것이 이랬다면 마한보다 더 위쪽, 적어도 마한보다는 말을 써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 이곳에 말을 들여왔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이와 관련해서 제주도 곽지리 패총에서 나온 3세기경의 작은 말뼈는 탐라와 한반도, 특히 낙랑과 대방, 구야국(금관가야)과 왜에까지 걸쳐 있었던 교역루트의 단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5세기 후반 이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과하마의 품종이 제주에 유입되었지 않을까. 그렇게 보는 증거는 삼국사에 기록된 고려 사신 예실불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섭라와 부여에서 나던 물품들을 현지 상황의 차질 때문에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골자인데, 옥의 산출지인 이 섭라가 어디인지를 두고 혹자는 신라라고도 하고, 혹자는 탐라라고도 했다. 기록에 나오는 탐라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지》위지 한전에서 기록한 주호(州胡)라는 것이고, 가(珂)는 곧 마노(瑪瑙)로 《대동운부군옥》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제주도에서 간혹 이게 나온다고 기록한 것이 있다. 섭라를 신라로 보는 관점을 두고 말하자면 신라가 예전에 사로국, 사라국이라고 불렸던 일이 있으니 발음이 비슷한 것을 들어 유추할 수 있지만, 공식적으로 국호를 ‘신라’로 통일하기 전에 신라에서 쓰던 여러 국호 가운데 섭라라는 국호는 보이지 않는다. 섭라가 백제에게 병합되었다는 말도 섭라를 신라로 볼 경우에는 당치 않은 소리지만,

어디까지나 고려 사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어느 정도 부풀림은 있을 수도 있겠고, 신라가 고려를 버리고 백제와 동맹을 맺은 섭섭함을 저런 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단순히 조공하기 귀찮아서 저런 말을 지어낸 걸까.

 

정시(正始) 연간에 세조가 동당에서 고구려 사신 예실불을 불러 만났다. 실불이 아뢰었다.
“고구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 여러 대에 걸쳐 충성을 다했고 땅에서 산출되는 물품을 빠짐없이 조공하였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가(珂)는 섭라에서 나옵니다. 지금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는데, 국왕인 신 운(雲)은 끊어진 나라를 이어주는 의리를 생각해 모두 경내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두 물품을 왕부(王府)에 바치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위서》 권제100, 동이 고구려전

 

부여와 섭라의 사람들을 고려 땅으로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실제로 494년에 부여왕이 식구를 데리고 항복해온 것처럼 섭라도 그렇게 했을까. 하지만 신라의 왕족은 도망가지도 고려 땅으로 이주하지도 않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섭라는 탐라국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탐라는 《삼국사》에 기록된 바 498년에 백제에게 정벌당한 적이 있는데, 동성왕이 탐라를 정벌한 이유는 그들이 공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이미 476년에 백제에 한번 찾아와서 조공했던 탐라가 불과 22년 만에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백제에게 정벌 당‘할 뻔’ 했었다는 건, 그 22년 사이에 탐라 내부에서 뭔가 반(反)백제노선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었을지. 그 반백제노선의 중심에 고려가 있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부회일까?

 

탐라가 22년 동안 백제를 버리고 친고려정책을 펼쳤다고 가정하면, 고려에서는 탐라에게 또 어떻게 대했을까? 아마 옥저나 예에 했던 것처럼 그들의 독자적 공동체질서를 인정해주는 대신에 공납을 받는 식으로 탐라를 지배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탐라에서 나던 마노도 고려로 유입되었겠지. 여기서 잠시, 역사왜곡이라는 돌팔매질을 무릅쓰고 헛소리를 작렬해보자. 탐라가 친고려정책을 펼치고 고려는 탐라에 공납을 받는 형식으로 탐라를 지배하고, 그 과정에서 탐라와 고려 사이에 사람이 오고 갔을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예실불의 말처럼 부여의 왕족과 함께 탐라의 왕족들도 고려 땅으로 옮겨졌다면, 그 사이를 고려계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갔을 가능성은 생각할 수 없을까?

 

삼성혈 신화, 탐라국을 열었던 초창기 세 명의 개국조는 알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말을 타고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았다. 농담이 아니라 그들 개국전설이 그렇다. 우리나라 속언에 지금도 그 출자(出自)를 모르는 사람이나 물건을 보고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았냐?’라고 묻는다. 어디에서부터 오기는 왔다, 하지만 그게 어디인지는 모른다. 바깥에서부터 이주해온 선주민을 보고 탐라의 토착민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혹은 ‘땅에서 솟아난’ 사람들이라며 그런 이야기를 전한 것은 아니었을까?

 

[十五年, 秋八月, 王獵於龍山之陽, 五日而還. 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月, 遣將伐百濟, 大雪, 士卒凍皸而還.]

15년(506) 가을 8월에 왕은 용산의 남쪽으로 사냥하다가 닷새 만에 돌아왔다. 9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장수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사졸들이 동상을 입고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고려에서 용산의 남쪽이면 동명왕의 사당이 있는 곳인데.

그곳에서 5일 동안 사냥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석 달 뒤에 백제를 친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 그때의 사냥은, 군사훈련을 겸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때의 백제 공격은 때아닌 폭설 때문에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해 가을 7월에 이미, 말갈족이 백제 북쪽의 고목성(高木城)을 쳐서

6백 명에 달하는 백제인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고, 백제본기는 전한다. 


[十六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王遣將高老, 與靺鞨謀, 欲攻百濟漢城, 進屯於橫岳下, 百濟出師逆戰, 乃退.]

16년(507)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은 장수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칠 것을 꾀하여, 횡악(橫岳) 밑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므로 물러났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이듬해 겨울 10월, 문자명왕은 다시 장수 고로(高老)에게 명하여 말갈과의 백제 합공을 시도했으나,

이미 말갈의 침공을 받아 고목성이 깨진 적이 있는 백제는 벌써부터 말갈의 공격에 대비해서,

다섯달 전에 북쪽 진(鎭)인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長嶺城)을 쌓아둔 터.

한성을 공격하려던 고려군은 횡악 아래에서 백제군에게 패하고 쫓겨간다.

 

[十七年, 梁高祖下詔曰 『高句麗王樂浪郡公某, 乃誠款著, 貢驛相尋, 宜豊秩命, 式弘朝典, 可撫軍一作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17년(508)에 양(梁) 고조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려왕 낙랑군공 아무[某]는 그 정성이 두드러지고 조공하는 길이 서로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의전을 넓혀,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는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八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18년(509)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九年, 夏閏六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19년(510) 여름 윤6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했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후위서》에는 문자명왕 19년에 해당하는 영평 3년, 간지로는 태세 경인에 해당하는 서기 510년 3월에

고구려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회하고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삼국사》에서는 이게 빠졌다.

 

[二十一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21년(512) 봄 3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고려에서 양에 사신을 보냈을 때, 양(梁)에서는 무제(武帝)가 즉위해 있었다.

양 무제 천감(天監) 11년, 간지로는 태세 임진(512) 3월 경진에 해당하는 때에 고려 사신이 양에 가고,

바로 한 달만에 백제에서도 양에 사신을 보냈다. 《양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리고 위에 사신을 보낸 것은 북위 연호로는 연창(延昌) 원년이고, 날짜는 5월 신묘.

 

[秋九月, 侵百濟, 陷加弗·圓山二城, 虜獲男女一千餘口.]

가을 9월에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加弗) · 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21년(512)

 

그리고 2년 뒤 가을 9월의 백제 침공. 백제의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인 남녀 1천을 포로로 잡았다는

고구려본기의 기록만 본다면 고려의 승리로 보이지만, 백제본기는 고구려본기가 차마 기록하지 못한

또 하나의 사실을 부기하고 있다.

 

[王帥勇騎三千, 戰於葦川之北. 麗人見王軍少, 易之不設陣. 王出奇急擊, 大破之.]

왕께서 용맹스러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에서 싸웠다. 고려인들은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만만하게 생각해 진을 치지 않았다. 왕께서는 기묘한 계책을 내어 급히 쳐서, 이를 크게 격파하셨다.

《삼국사》 권제26, 백제본기4, 무령왕 12년(512)

 

장수왕 때에 그 수도를 쳐서 파괴하고 돌아온 뒤 그 힘이 상당히 약해졌다고 여겼을 백제를 얕보다가

때아닌 기습을 당하고 크게 패하고 만 것이니, 국왕이자 군대 지휘권자인 국왕의 실책이라 여겨서

차마 고려 사관이 기록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제로서는 그걸 일부러 숨기거나 할 필요가 없으니,

저렇게 당당하게 실어놓았다.

 

[二十二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22년(513) 봄 정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三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

23년(514) 겨울 11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四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24년(515)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25년(516) 여름 4월에 사신을 양에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고려는 중국 왕조와의 수교만 중시하지는 않았다.

많지는 않지만 왜국 즉 일본에도 사신을 보냈던 기록이 《니혼쇼키》에 간간히 출몰하곤 한다.

게이타이 덴노 10년 병신(516) 가을 9월 14일 병인조.

"백제가 적막고(灼莫古) 장군과 일본의 사나노아비다(斯那奴阿比多)를 보냈다

[百濟遺灼莫古將軍, 日本斯那奴阿比多]."는 기사 뒤에

"고려의 사신 안정(安定) 등과 함께 내조하고 수호를 맺었다[副高麗使安定等, 來朝結好]."

고 적고 있는 것이 보인다. 고려와 백제는 이때만 하더라도 한참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나라였을 텐데,

백제 사신을 고려 사신이 함께 따라간 건지, 아니면 서로 따로 사신을 보냈다가

우연히 왜국 땅에서 마주쳤는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에 이들 사신의 사이가 썩 좋았던 것 같지는 않다.

어쨌건 이들은 적국이었으니까.

 

나운왕 25년은 중국 연호로는 위 효명제(孝明帝) 희평(平) 원년인데,

《삼국사》에는 없지만 이때 고려는 연연이라는 유목민족과 또한번 전쟁을 치렀다. 《문헌통고》에 

"연연(蠕蠕)의 우두머리 배노(配奴)가 용병을 잘하여 서쪽으로 고려를 정벌해 크게 격파하였다."고

적은 것이 그것이다. 연연이란 유연(柔然)이라 더 알려져 있는,

5세기 초기(402)에 건국되어 6세기 중엽(555년)에 멸망할 때까지,

열일곱 명의 왕이 대를 이어 즉위하여 다스렸던 나라다. 또한 '가한(可汗)' 즉 '칸(汗)'이라는 이름을

그들 지배자의 칭호로 사용한 최초의 나라이기도 하다. 선비족의 분파로서 당초 선비족의 지배를 받았지만,

선비족이 중국으로 이주한 뒤 몽골 고원에서 세력을 확대한 유연은 5세기 초엽

초대 구두벌가한(丘豆伐可汗) 사륜(社崙)이 고차(高車)를 복속시킨 뒤 

지금의 타림분지 일대를 차지하고 북위와 대립했다. 북위는 세 차례에 걸쳐 군사를 보냈고

유연의 가한을 패주시켰으며 그들의 본거지를 함락시킨 적도 있었지만,

그 세력이 본격적으로 약화된 것은 485년과 486년에 지배하에 있던 고차가 반란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552년 돌궐의 이리가한(伊利可汗)과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아나괴(阿那壞)가 전사하고, 

북위에 원조를 요청하러 갔던 잔당들이 돌궐의 요청으로 살해당하면서 종말을 고했다.

 

고려와 전쟁을 벌였던 유연의 왕은 11대 치노(醜奴)로 한자로는 두라복발두벌가한(豆羅伏跋豆伐可汗)이라 불리는데,

《문헌통고》는 고려를 격파한 뒤 "드디어 유유의 강역이 넓어져서 동쪽으로는 옛 조선 땅의 서쪽,

북쪽으로는 사막을 건너 한해(瀚海)에까지 이르고, 남쪽으로는 대적(大磧)에까지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二十六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26년(517) 여름 4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三月, 暴風拔木, 王宮南門自毁.]

27년(518) 봄 2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며, 왕궁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나운왕 27년 3월의 폭풍과, 안학궁 남문의 붕괴는, 아마도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었으리라.

《삼국사》에서는 나운왕 27년조 "5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五月, 遣使入魏朝貢]."는 기사 앞에

"여름 4월에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였다[夏四月, 遣使入魏朝貢]."는 기사가 붙어있지만,

이건 26년조의 중복기재다. 둘다 마찬가지로 《후위서》를 참조했을 거다.

《후위서》는 517년 여름 4월의 고려 사신은 기록이 있지만 518년 여름 4월의 고려 사신은 기록이 없다.

이상하게도 《삼국사》는 실제 사실보다 1년을 밑으로 끌어내리거나

아니면 위로 끌어올려 중첩한 기록들이 몇 군데 보인다. 502년의 일을 501년의 일로 끌어올린 것도 그렇고

조공기사도, 실제로 사신이 간 해보다 1년 늦춰서 연도를 표기한 것도 있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太后擧哀於東堂, 遣使策贈車騎大將軍. 時魏肅宗年十歲, 太后臨朝稱制.]

28년(519)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문자명왕이라 하였다. 위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위 숙종(肅宗)이 나이가 열 살이어서, 태후가 조정에 나와 황제의 권력을 행사했었다.

《삼국사》 권제19, 고구려본기7, 문자명왕

 

문자명왕이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장수왕에게 한 것처럼 북위의 태후가 직접 나와서, 열 살밖에 안된 어린 황제를 대신해 문자명왕에 대한 애도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장수왕 때에 비하면 어딘가 맥이 없어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문자명왕의 죽음 이후, 고려의 정치가 한동안 어지러워지는 것을 생각한다면 단순한 기우라고 볼수도 없겠다. 하지만 신라와 백제 두 나라가 갑자기 서로 동맹을 맺고서, 고려의 침공을 서로 도와주면서 고려를 견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장수왕의 평양 천도가, 그리고 그에 따른 고려 주력군의 이동이, 남쪽의 백제와 신라에게는 얼마나 위협적인 요소로 다가왔던 것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위험이 앞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강해지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강해져야만 한다는 것은 무척 서글픈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될테니.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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