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tdGqAF (문서파일) 
* "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현황과 과제 - 양시은" 중 "Ⅲ. 연변 지역의 주요 고구려 유적 - 2_ 溫特赫部城"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온특혁부성(溫特赫部城)

온특혁부성은 琿春市 三家子鄕 古城村에 위치한 평지성이다. 성은 평탄한 강안대지 위에 흙을 다져 축조하였으며,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이다. 북쪽의 성벽은 금나라 성터인 비우성[斐優城] 9)으로 인해 파괴되었으며, 동쪽과 서쪽 성벽 일부 또한 훼손되었다. 비우성의 남벽을 포함하였을 경우 온특혁부성의 전체 둘레는 2.3km가량이다.

성 내부에는 남쪽 경작지를 중심으로 고구려와 발해 시기의 유물이 확인되고 있는데, 최근까지도 다량의 기와편이 분포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당시 온특혁부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림 2> 온특혁부성의 평면도(齋藤優, 1978: 도면 34)와 위성사진(구글어스)


『琿春縣文物志』와 『연변문화유물략편』에 따르면, 성내에서는 귀면문[獸面紋]와당과 立蓮花紋(乳釘紋)와당, 팔련성 출토품과 동일한 발해 시기의 연화문와당 등이 출토되었다. 귀면문와당은 만주국 시기에 수집된 것으로 보이나, 관련 정보가 부족하여 더 이상의 논의가 어렵다. 입연화문와당은 온특혁부성뿐만 아니라 동대자유적[東台子遺址]과 평양 일대에서도 확인된 유물로, 고구려 연화문와당으로는 극히 드문 형식이다. 동대자유적에서 출토된 입연화문와당은 온특혁부성 출토품과 그 형태가 거의 동일하여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평양에서 출토된 와당보다는 그 문양 요소가 간략화되어 있기 때문에, 온특혁부성 출토품의 경우 평양보다는 늦게 출현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입연화문와당은 발해 초기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六頂山古墳群 출토품의 경우 문양 요소가 다른 와당에 비해 가장 단순화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입연화문와당의 기본 문양 요소를 지키고 있는 온특혁부성 출토품은 발해 시기보다는 이른 고구려 시기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강현숙은 입연화문와당의 출현 상한을 6세기 후엽경으로 비정한 바 있다. 10)

<그림 3> 각종 입연화문와당 11)
 
정영진은 온특혁부성의 동쪽벽에 대한 조사 당시 토축 성벽 내에서 승문과 승석문, 사격자문 등의 기와편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성벽은 고구려가 아닌 발해 시기에 다시 쌓은 것으로 파악하였다. 12)

한편,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훈춘 고려성(高力城, 高麗城土城)에서 채집된 유물이 소장되어 있는데, 대부분 고구려와 발해의 기와편이다(그림 4). 고구려 암키와편의 내면에는 대략 3cm 내외의 폭을 지닌 모골흔이 확인된다. 유물에는 12년 4월 22일에 채집된 것으로 명기되어 있으며, 유물 대장에는 대부분 도리야마 기이치가 기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2년은 昭和 12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 채집 연도는 1937년이다. 이와 관련한 기록은 도리야마 기이치와 후지타 료사쿠가 작성한 『간도성고적조사보고』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보고서에는 1937년 4월 22일에 高力城子土城을 조사하면서 작성한 평면도가 남아 있는데, 기록 등을 대조해 보면 현재의 비우성임이 확인된다. 당시 보고서에서는 채집된 기와편과 성벽의 구조 등을 감안하여 비우성이 고구려 시대부터 이용되다가 遼代 이후에 개축된 것으로 보았다.도리야마 기이치가 비우성을 조사한 이후 사이토 마사루가 비우성과 온특혁부성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당시에 채집된 유물들은 그림 5와 같다. 1·2번은 발해 와당이며, 3~6번은 고구려 기와편으로 보고되었는데. 특히 회색 승문 기와편(3번)은 비우성의 토루 내에서 발견되어 주목된다. 13)

<그림 4> 비우성 출토 고구려와 발해 기와 14)

<그림 5> 비우성 출토 고구려와 발해 기와(齋藤優, 1978: 도면 34 재편집)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온특혁부성이나 비우성에서 모골흔이 확인되는 고구려 기와편이 다수 확인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분명 고구려 때부터 활용된 성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입연화문와당이 고구려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다는 점과 성 내외부에서 고구려뿐만 아니라 발해 유물 또한 다수 확인되는 점, 그리고 비우성과 온특혁부성 모두 토축 성벽 내에서 고구려 기와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해당 성은 고구려와 발해 시기에 지속적으로 개축되면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밖에도 온특혁부성은 고구려 시대의 책성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주요 근거로는 온특혁부성이 넓은 평지성이기 때문에 살기성과는 달리 행정중심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 고구려 외에도 발해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의 책성이 발해 시기에도 계속 사용되었다는 문헌기록과 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발해의 동경용원부인 훈춘의 팔련성 부근에 있다는 점 등이다. 



 9) 『琿春縣文物志』에 따르면 비우성은 배우성(裴優城) 또는 고려성(高力城)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10) 姜賢淑, 2010, 「中國 吉林城 集安 東台子遺蹟 再考」, 『韓國考古學報』 75, 韓國考古學會, 186~187쪽
 
 11) ① 井內古文化硏究室 編, 1977, 『朝鮮瓦塼圖譜』 2, 眞陽社, 219번 자료
      ②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之遺蹟』上, 45번과 258번 자료
      ③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吉林省博物院 篇, 2010, 『集安出土高句麗文物集粹』, 科學出版社, 61쪽
      ④ 연변박물관 연변문화유물략편 집필소조, 1989, 『연변문화유물략편』, 연변인민출판사, 79쪽
      ⑤ 宋玉彬, 2011, 「近年來吉林地區歷史考古的重要成果(1999~2010)」, 『동북아시아 고대문화의 새로운 지평』, 경희대학교·길림대학교 학술교류 특별강연회 자료, 중앙박물관·경희대학교 

12) 鄭永振, 1990, 「연변지구의 고구려유적 및 몇 개 문제에 대한 탐구」 298~299쪽, 

 13)  齋藤優, 1978, 『半拉城と他の史蹟』, 半拉城史刊行會, 94~101쪽 帶金具 副葬 고구려 고분의 고고학적 함의 

 14) 온특혁부성에서 채집된 3번을 제외한 나머지 유물은 비우성에서 채집된 것으로, 5번은 『間島省古迹調査報告』의 도판 63에 소개된 바 있다.  

 15) 우측 사진에 게재된 기와는 좌측 4번 기와의 내면을 촬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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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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