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avy.ac.kr/common/file/chungmugong1_01.pdf 

15. 이순신의 리더십 (3) 무과 시험 준비를 위한 10년의 공부는 그가 위대한 민족적 영웅으로 탄생하는 토대가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순신은 우리민족을 위해 하늘이 낸 인물임이 분명하지만 위대한 인물이 되기까지 그에게는 숨은 노력이 있었다. 그는 22세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무과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한 번의 낙방을 거쳐, 3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무과에 합격하였다. 10년의 공부가 있었던 것이다. 활쏘기 등의 무예 익히기와 무경칠서로 대표되는 병법서에 대한 공부는 그가 위대한 장수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 이순신은 초급 군관 시절부터 무인으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순신은 22세부터 무과 시험에 뜻을 둔 이래 6년간의 준비를 거쳐 28세에 처음으로 치른 무과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뜻하지 않은 낙마(落馬) 사고 때문이었다. 이후 절치부심(切齒腐心)의 4년간의 준비를 통해 32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비로소 무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10여 년간의 인고(忍苦)의 세월이 있었기에 그는 초급 군관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순신이 파직과 백의종군을 거듭하며 미관말직을 전전하다 어느 날 갑자기 유성룡의 천거에 의하여 정읍현감(종6품)에서 전라좌수사(정3품)로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준비된 무인(武人), 이순신은 초급 장교 시절부터 실력 있는 장수로 인정받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무과에 합격(1576년)하여 종9품인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종8품), 충청병사 군관 등을 거쳐 1580년에는 종4품인 발포 만호가 되었다. 4년 만에 5계급을 승진한 것이다. 초고속 승진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시점(1576년)은 바야흐로 북쪽의 오랑캐들이 변방을 호시탐탐 노리던 시기였다. 이순신이 무과에 합격한 이후 조선은 세 번 오랑캐와의 전쟁을 치렀다. 1583년의 니탕개난과 1587년의 녹둔도 전투 그리고 오랑캐의 녹둔도 침입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진 1588년의 시전부락 전투가 그것이다. 니탕개난 때 이순신은 함경도 남병사 이용의 군관으로 참여하여 니탕개난을 주도한 3인의 대추장인 ‘니탕개’, ‘울지내(또는 울기내)', ‘율보리’ 중 2인자 격인 울지내를 유인하여 체포하는 공을 세웠으며, 녹둔도 전투에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에서 여진족의 기습을 격퇴하였으나 북병사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종군하는 일이 있었고, 그 이듬해에 있었던 시전부락 기습작전에서는 백의종군의 신분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볼 때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있기 전 북쪽 오랑캐와 벌인 모든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역전의 장수였다. 그 시절 선조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였던 북쪽 오랑캐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이순신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셈이다. 당시 장수들 가운데 이순신과 같은 풍부한 실전(實戰) 경험을 지닌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투 결과 논공행상의 과정에서 이순신을 포상해야한다든지 아니면 보고 계통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처벌해야 한다든지에 대한 분분한 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순신이 있었음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덧 조정 안팎에서 이순신은 꽤 유명한 장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력 때문에 1589년 ‘계급에 관계없이 유능한 장수감을 천거하라’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의 인사정책이 시행될 때 이순신은 병조판서 정언신과 이조판서 이산해에 의해 추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등용이 단순히 누구의 천거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진 것이 아니라 10여년의 무관 관료 생활을 통해 드러난 그의 공적과 능력에 기초한 것임을 말해 준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이순신의 이름과 경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북쪽 오랑캐와의 전투 때에 이미 이름이 조정에 오르내렸을 뿐만 아니라 대신들에 의해 이미 천거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사간원에서는 이순신을 종6품인 정읍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7계급 특진시키는 인사에 대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관작의 남용에 의해 인사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런 건의에 대해 선조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높고 낮음을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선조실록』 선조24년 2월 16일) 

선조는 사간원 대간(臺諫)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단행하였다. 위의 실록의 기록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순신의 장수로서의 능력과 실력에 대한 돈독한 믿음과 신뢰 때문이었다. 

조선의 수군 병사들은 이순신과 함께 하는 해전이라면 물불의 가리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이순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이순신의 리더로서의 군사전문성 이른바 실력은 부하 장수 및 병졸들을 마음으로부터 복종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리더의 실력! 리더의 전문성! 그것은 부하나 구성원들에게 무한한 신뢰감을 주어 리더를 믿고 따르게 할뿐더러 그들의 역량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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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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