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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지역 고구려 유적의 검토

지금까지 유물을 바탕으로 연변 지역에서 고구려 시대로 판단되는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연변 지역에는 100여 개의 성곽이 분포하고 있는데, 연구자에 따라 고구려 유적으로 추정하는 성곽의 수는 각기 다르다.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의 경우 가장 보수적으로 접근하여 2개소만을 고구려 성으로 비정하였고, 『연변문화유물략편』에서는 출토 기와를 기준으로 삼아 8개소를, 『고구려의 역사와 유적(句麗の歷史と遺跡)』에서는 26개소를 고구려 유적으로 판단하고 있어, 그 차이가 매우 크다.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 성곽에 대한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19> 연변 일대 주요 고구려 성(구글어스)
굵고 큰 글씨로 표시되어 있는 유적이 연변 지역에서 고구려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보고된 성이다. △는 산성을, □는 평지성을 의미한다. 북한 지역의 운두산성을 제외한 나머지 작은 글씨로 표시된 유적은 일부 연구자들이 고구려 성으로서의 가능성을 제기한 적이 있는 곳이다. 

본고에서는 기존 자료와 관련 유물을 최대한 검토하여 객관적인 판단기준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확보할 수 있는 자료의 한계로 인해 10개소의 유적만을 고구려 성으로 판단하였다. 해당 유적은 평지성이 대부분이며, 산성은 2개소에 불과하다. 고구려가 일찍부터 연변 지역으로 진출하였다고는 하지만 과연 평지성을 구축하는 것만으로 연변 지역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고구려의 영역 지배 방식에 따라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요동 지역이나 남한 지역 등 고구려 전역에 산성이 축조되고 있는 양상을 감안해 볼 때 연변 지역에도 산성이 추가로 발견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성제의 견해가 주목된다. 용정의 조동산성(朝東山城)을 고구려의 산성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입지 조건, 축조 방식 및 인근 성곽과의 배치 양상 등을 들고 있다. 조동산성은 두만강 건너편 서남쪽으로 5km 떨어져 있는 북한의 운두산성(雲頭山城)과 대응하여 운용 가능하며, 이러한 배치는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를 연결하던 압록강변의 호산산성(虎山山城)과 백마산성(白馬山城)과의 조합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22) 필자가 조동산성을 답사한 결과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요동 지역의 고구려 석축산성과는 석재의 가공이나 성벽 축조 방식 등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또 지금까지 조동산성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견된 예가 없었다. 그러나 입지 등의 측면에서 본다면, 고구려 산성으로 기능했을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므로, 앞으로의 조사·연구결과의 축적을 기다리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① 조동산성 전경  ② 성벽  ③ 산성에서 바라본 운두산성
<그림 20> 조동산성 

이성제는 동일한 논문에서 성자산산성이 성안에 넓은 평탄지를 보유하면서 문지가 완만한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어 평지에서 어렵지 않게 산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는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산 정상부에 산성을 축조하여 접근을 용이하지 않게 만든 고구려 전기와는 다른 고구려 중기의 특징임을 강조하였다. 또 산 능선을 따라 먼저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채워 덮은 토석혼축의 축조 방식이 무순의 高爾山城과 유사하기 때문에 성자산산성 역시 4세기 이후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산성의 입지 조건이나 성벽 축조 방식 등 외관상의 몇 가지 특징만을 가지고 축조의 시기나 세력을 판단하는 것은 주의가 요구된다. 고구려 중기 이후, 고구려의 성장에 따라 대형의 포곡식 산성이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중기 이후에 포곡식 산성만 축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황해도 지역의 대형 성곽과는 달리 작은 보루들이 교통로 상에 배치되거나 한강 유역의 아차산 보루군처럼 여러 개의 보루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중대형 성곽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23) 고구려는 이처럼 전력 혹은 지배 방식과 지역에 따라 성곽의 운용을 매우 탄력적으로 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토축·토석혼축·석축 등 성벽의 축조 재료나 축성 방식에 따른 구별을 통해 연대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도 주의가 필요하다. 성곽은 활용되는 동안 필요에 따라 지속적인 보수와 개축을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현상 변경이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잔존하는 성벽의 외형만을 가지고 그 계통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성곽이 폐기되는 최종 단계의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동안 지표조사 등을 통해 백제의 유적으로 알려졌던 충청 지역의 여러 성이 발굴조사 결과 상당수가 신라 또는 그 이후 시기에 축성된 것으로 밝혀진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산성의 축성 시기나 주체를 외형적인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므로, 결국에는 산성을 축조하고 영위했던 사람들이 남긴 물질 자료, 즉 유물과 같은 고고 자료가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기초 자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연변 지역의 많은 산성이 그동안 정식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된 예가 없고, 산성의 경우 특정한 시기가 아니면 평지성에 비해 지표에서 유물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후에도 고구려 산성을 확정짓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음으로는 연변 지역 고구려 시기의 평지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번에 확인된 고구려의 평지성은 8개소인데,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수가 월등히 많은 편이다.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동흥고성을 제외하면, 가장 작은 규모인 태암고성은 둘레가 0.3km이고, 석두하자고성과 하룡고성은 1km 내외이고, 나머지 평지성은 모두 1.6km 이상이다. 고구려의 도성 지역 내 위치한 토성 24)이나 漢이 축조한 토성을 재사용한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고구려 평지성은 연변 지역에 비하면 그 크기가 상당히 작은 편이다. 구체적으로는 태암고성의 규모와 비슷하거나 더 작다. 물론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지성의 경우 수로를 통제하거나 역참의 기능을 수행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연변 지역과 직접인 비교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고구려 성곽과 관련하여 연변 지역은 평지성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규모가 다른 곳에 비해 특이한 것만은 분명하다.

정영진은 연변 지역의 고구려 평지성을 발해 시기에 다시 쌓은 것이 많다고 보았다. 25) 대부분의 평지성에서 고구려와 발해 기와가 함께 출토되고 있고, 옹성과 치가 없다는 점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기존의 논문에서 밝힌 자신의 견해와도 일부 상충되는 것으로, 이전 논문에서 정영진은 석축 혹은 토석혼축 성벽을 고구려 시기의 특징으로 파악한 바 있다. 26) 온특혁부성처럼 성벽 내부에서 고구려 기와편이 발견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발해 시기에 전면적인 개축을 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연변 지역에 고구려 평지성이 축조된 배경은 무엇일까. 현 단계에서 고고학적으로 풀어나가기에는 자료가 부족하여, 평지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해답을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현혜는 고구려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혼강 및 압록강 유역과 두만강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함경북도 무산 호곡 유적과 회령 오동 유적에서 나온 기원전 3~2세기 단계에 해당하는 철부가 압록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위원 용연동 유적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戰國계 철기라는 점과 무산 호곡 유적에서 漢의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고 있는 점 등을 그 근거로 삼았다. 이후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고구려 중심지로부터 함흥-두만강 일대를 서로 연결하는 교통로를 장악함으로써, 이 일대의 풍부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수송받았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27) 물론 여기서 언급한 교통로는 연변 지역보다는 함경도 일대에 보다 적합한 것이기는 하지만 참고할 만하다.

“북옥저(北沃沮)를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며, 남옥저(南沃沮)와는 800여 리 떨어져 있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의 기록이나, 고구려의 영역이 “요동 남쪽으로 천여 리에 이르고, 동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에는 소해(小海), 북으로는 부여의 옛 땅(舊夫餘)에 이른다”라는 위서 열전(『魏書』 列傳)의 高句麗傳을 고려할 때, 북옥저의 중심지는 책성이 위치한 연변 지역이었을 것이다. 『삼국지』에는 고구려가 옥저를 병합한 이후에 그 지역에 大人을 두고 使者로 삼고, 大加에게 조세를 통괄 수납케 하여 천 리나 되는 거리에서 자원(貊·布·魚·鹽·海草類)을 거둬들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임상선에 따르면, 697년 唐에서 죽은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의 묘지명에는 그의 선조인 량(量)이 고구려의 삼품책성도독위두대형겸대상(三品柵城都督位頭大兄兼大相)을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한다. 28) 책성은 지방통치 중심인 大城에 해당하고, 책임자 도독은 욕살(褥薩)에 해당하는 지위이기 때문에, 고구려에서 책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책성은 고구려의 동쪽 영역을 관할함과 동시에 주변의 풍부한 물자를 고구려의 중심지로 운송하기 위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연변 지역의 평지성은 이와 같은 고구려의 지방 지배전략과 맞물려 등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보통 평지성은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인 성격보다는 행정 지배 방식과 보다 깊은 관련이 있다. 연변 지역 고구려 평지성은 대부분 평야의 중심이 아니라 중심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 혹은 외부에서 중심지역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목의 초입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평지성의 입지 조건이 고구려가 연변 지역을 대하는 전략적인 방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평지성이 고구려의 중심지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큰 것도 주민의 거주와 함께 최소한의 방어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고고학적인 조사를 통해 추후 검증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석

 22) 이성제, 2009, 「高句麗와 渤海의 城郭 운용방식에 대한 기초적 검토-延邊地域분포의 성곽에 대한 이해를 겸하여」, 『高句麗渤海硏究』 34, 高句麗渤海學會 , 178~180쪽 
 
 23) 양시은, 2010, 「남한 내 고구려 성곽의 구조와 성격」, 『高句麗渤海硏究』 36, 高句麗渤海學會, 121~123쪽 
 
 24) 환인의 하고성자토성이 0.94km, 집안의 국내성이 2.7km, 평양의 청호리토성이 5km가량이다. 
 
 25) 鄭永振, 1999, 「延邊地域의 城郭에 대한 연구」, 『高句麗山城硏究』(『高句麗硏究』 8), 학연문화사, 410~411쪽 
 
 26) 鄭永振, 1990, 「연변지구의 고구려유적 및 몇 개 문제에 대한 탐구」, 『韓國上古史學報』 4, 韓國上古史學會, 304쪽
 
 27) 이현혜, 2010, 「沃沮의 기원과 문화 성격에 대한 고찰」, 『韓國上古史學報』 70, 韓國上古史學會, 41~67쪽128 동북아역사논총 38호
 
 28) 임상선, 2006, 「발해 ‘東京’지역의 고구려 문화 요소」, 『高句麗硏究』 25, 高句麗硏究會, 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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