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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 산성 (高爾 山城)


중문 : 高尔山城

크기 : 둘레 2.8㎞

현 소재지 : 요령성 무순시 순성구 무순성가도

고이 산성 동문 터



정의


요령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북쪽의 고이산(高爾山)에 위치한 고구려의 포곡식(包谷式) 토축 산성.



개설


고이 산성은 무순시의 북쪽 고이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동성을 중심으로 서성, 남위성, 북위성 및 동남쪽의 세 개의 소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성(新城)으로 비정되고 있는 고이 산성은 요동 평원과 동부 산간 지대의 접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혼하(渾河)와 소자하(蘇子河)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또 산성 둘레가 4㎞에 달해 인근 고구려 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의 요해지로 먼저 점령하지 않고서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라고 했던 당(唐)나라 장수 이적(李勣)의 언급은 고이 산성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이 산성은 둘레 2.8㎞인 동성에서만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 토기와 기와, 투구를 비롯한 각종 철기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 시기 중요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주변 위성에서는 고구려와 관련된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어, 축조 시기와 성격에 대한 논란이 있다.



건립 경위


신성이라는 명칭은 3세기 후반부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한다. 그런데 3세기 후반은 고구려가 요동 지역에 진출하기 이전으로 모용씨(慕容氏)와도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점이라는 점에서, 해당 시기에 고구려가 고이 산성을 축조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서천왕(西川王) 7년[276년]의 분주 기사에 신성이 나라의 동북쪽에 위치한 큰 진영[국지동북대진야(國之東北大鎭也)]이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신성은 고구려의 서북쪽이 아니라 동북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대해 임기환은 지명 및 역사적 상황 등을 근거로 해당 시기의 신성은 고구려의 동북 지역 즉 책성이 위치한 두만강(豆滿江) 즉, 연길(延吉)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한편,『삼국사기』에는 335년에 고구려 북쪽 지역에 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진서(晉書)』와 같은 중국 문헌에도 신성은 337년이나 339년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요동 지역 신성의 축조는 3세기 중반이 아니라 4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성으로 비정되고 있는 고이 산성에서도 개원통보(開元通寶)를 비롯한 출토 유물이 대부분 고구려 중기 이후의 것이고, 무순 일대에서도 적석총(積石塚)이 아닌 석실분(石室墳)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4세기 중반 이후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치


산성은 무순시 북쪽의 해발 154m인 고이산에 위치한다. 고이 산성에서 혼하 하류를 따라 서남쪽으로 나아가면 요동 평원으로 진출할 수 있고, 혼하 상류를 거슬러 동북쪽으로 나아가면 요동 동부 산간 지대로 진입할 수 있다.


요하 평원과 요동 산지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고이 산성은 혼하에서 소자하를 거쳐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혼강 유역으로 진출할 수 있고, 송화강(松花江) 상류를 거쳐 동북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부여(夫餘)의 중심지였던 길림(吉林) 지역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북쪽인 철령(鐵嶺) 방면으로 나아가면 요하(遼河) 중상류로 통할 수 있다. 즉, 고이 산성은 요동 평원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로 진입하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고이산에서 남쪽으로 0.5㎞ 떨어진 지점에는 무순성, 산성의 동쪽 1.5㎞ 지점에는 시가구 고분군[고구려~발해], 고이산 서남쪽 2㎞ 지점에는 장군보가 있다. 한편 무순에서 철령간 도로가 남북 방향으로 산성의 동성과 남위성을 통과하고 있다.



형태


고이 산성의 평면 형태는 불규칙하다. 고이 산성이 위치한 해발 154m인 고이산은 동·서·북 세면은 산등성이이고, 가운데는 북쪽의 장군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등성이로 인해 동·서 두 개의 깊은 산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산줄기를 따라 토축 성벽을 축조하였다.


고이산 정상부에서는 주변이 트여 있어 산성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산성은 동성을 중심으로 서성, 남위성, 북위성 및 동남쪽의 세 개의 소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성 전체의 둘레는 4㎞에 달하며, 동성은 둘레가 2.8㎞ 가량이다.



현황


현재 고이 산성 일대는 대규모 개발계획이 진행 중이다. 2007년부터 성 내부의 민가가 철거되기 시작하여, 성 바깥쪽 남측의 대로변까지 정비가 확대되고 있다.


고이 산성의 주성인 동성의 성벽은 토축 또는 토석 혼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동안 여러 차례의 성벽 절개 조사를 통해 축성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동성 동문의 북쪽 성벽에서는 흙을 다져가며 교대로 쌓아 올리는 판축 기법이 사용되었다. 동성과 서성의 경계 지점에서는 토성 내부에 1단의 석축을 보강하고 그 위에 흙을 덧쌓은 방식[包骨墻]을 썼다. 동성의 성문으로는 남문, 북문, 동문이 있다. 남문이 정문이며, U자형 옹성 구조이다.


동성의 성벽 안쪽 사면에는 병사들의 주거용 건물지가 마련된 계단상의 대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동안 조사된 주거지는 평면형태 방형의 온돌 건물지로, 그 크기는 대략 10㎡ 전후이다. 주거지 주변에서는 대형 옹이 땅 속에 묻혀있는 채로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식품의 장기 보관을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이 산성에서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철기로는 투구, 갑옷편, 화살촉, 창, 칼 등과 같은 무기와 방어구류, 도끼, 삽, 낫, 보습 등과 같은 철제 농공구류, 차축두와 등자 등의 마구류가 있다.


토기는 주로 고구려 중기와 후기로 편년될 수 있는 것들로, 니질(泥質) 태토의 호(壺), 옹(甕), 동이, 시루, 완(碗), 뚜껑, 원통형 사족기(四足器) 등 생활 용기가 대부분이다. 고이 산성 출토 토기는 기종 구성 및 기형과 제작 기법상에서 남한의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에서 출토된 6세기 대 토기와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이 밖에도 고이 산성의 서쪽 봉우리에는 요(遼)·금(金) 시기의 탑이 있으며, 동쪽 산 위에도 허물어진 요대 탑지가 남아있다. 탑 아래의 관음각은 명대 건축물인데, 청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의의와 평가


요동 평원에서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 일대로 진입하는 길목일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여러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고이 산성은 고구려의 신성으로 알려진 중요한 유적이다.


그간 여러 차례 발굴 조사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고구려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구려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이 산성 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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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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