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39.html

백제미에 보내는 무한한 경의 
[한가위별책-백제 깨어나다] - 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금동대향로·왕흥사 사리함·미륵사 서탑 사리호 등 아름다움의 구체화
[2010.09.17 제828호]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장엄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 문화에 조금이라도 상식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백제의 아름다움에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 품위 있고 우아하고 부드럽고 친숙한 느낌 같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백제 미술을 상징하는 부여 정림사터 5층 석탑 앞에 서면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 보내는 찬사보다 황량한 배경에 덩그러니 서 있는 쓸쓸함을 먼저 말하며, 백제 성왕·위덕왕·무왕 시절의 찬란한 전성기 문화보다 의자왕 시절 패망에 이르는 아픈 기억을 먼저 새기곤 한다.

그동안 백제 유물 중에는 웅혼한 기상이 깃든 고구려의 고분벽화, 화려한 금관이 있는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 신라에 걸맞은 구체적 이미지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발굴된 아름다운 향로와 사리함이라는 금속공예품들로 우리는 이제 ‘백제미’에 대해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베일 헤치며 나타난 무령왕릉

베일 속에 가려진 백제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이었다. 이는 해방 뒤 우리나라 고고학과 미술사의 최대 성과로, 여기서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라는 기록(매지권)과 함께 금관을 비롯해 총 108종 2906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일제시대 도굴로 실체를 잃었던 백제 고분미술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쾌거였다.

그러나 무령왕릉의 유물들은 백제 아름다움의 보편적 이미지만 전해주었지 딱히 한 점으로 백제를 대변할 유물은 없었다. 그러다 1993년 부여 능산리 고분군 바로 곁에 있는 능사(陵寺)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6세기 후반 위덕왕 때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백제금동대향로는 규모가 크고 기법이 완벽한데다, 대상의 묘사가 정확하며, 상징적 내용이 풍부한 백제미의 진수로 동시대 중국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향로는 높이 64cm, 무게 11.8kg으로 다른 향로보다 두 배 크기이며, 봉황이 올라앉아 있는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용이 입에 물어 올리는 모습이다.

용은 힘껏 용트림을 하고 있고, 봉황은 한껏 날갯짓을 하려는 순간을 포착했다. 대단한 동감이 일어난다. 이에 반해 몸체와 뚜껑으로 이뤄진 꽃봉오리는 풍만하면서도 팽팽한 볼륨감이 넘친다. 정(靜)과 동(動)의 절묘한 조화다. 뚜껑에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불사조·물고기·사슴·학 등 동물이 26마리, 네댓 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25개 산봉우리. 거기에는 산길, 계곡, 폭포, 호수가 있다. 솔숲이 6곳, 바위가 12곳이다.

산봉우리에는 피리·비파·거문고·북 등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이 있고, 또 봉황·용·호랑이·사슴 등 상상과 현실 세계 동물 39마리가 들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약 100가지 도상은 백제인의 관념 속에 들어 있던 신선 세계의 모습이다.


백제금동대향로.

금동대향로의 충격과 감동

이 향로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때부터 유행한 박산향로(博山香爐)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박산이란 동쪽 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았다는 삼신산, 즉 봉래산·영주산·방장산을 말한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도교적인 상징성의 박산향로를 불교적 이미지인 연꽃과 결합시키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공예는 ‘용’(用)과 ‘미’(美)로 이뤄진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쓰임새에서도 아주 뛰어나다. 향로 뚜껑의 산봉우리 뒤에는 10개의 구멍이 있어 향을 피우고 뚜껑을 닫으면 향 줄기가 구멍을 통해 피어오르게 돼 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됐을 때 일부에서는 이 유물이 과연 백제에서 제작된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에 걸맞은 백제의 다른 유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7년 부여 왕흥사터에서 금·은·동 한 세트의 아름다운 사리함이 명문과 함께 발견되고, 2009년에는 익산 미륵사 서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더없이 화려한 금사리호가 출토되면서 그런 의심은 일거에 가시게 되었다.

백마강 구드레 나루터 건너편에 있는 왕흥사터에서 발견된 금·은·동 사리함에는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우고 사리를 모셨다는 글씨가 새겨 있어 누구도 백제의 유물임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미륵사 서탑 사리호에서는 총 194자가 새겨진 금제사리봉영기도 함께 출토됐는데, 내용은 무왕 40년(639)에 왕후인 사택적덕의 따님이 봉안했다는 것이다.

왕흥사 사리함은 아주 단아한 형태미를 보여준다. 동사리함은 소박하고, 은사리함은 듬직하며, 금사리함은 고귀한 자태를 자랑한다. 단순한 디자인 같지만 그 심플한 멋에서 다가오는 우아함과 품위에는 현대 금속공예도 따를 수 없는 세련미가 있다.

화려하면서 사치스럽지 않은

이에 비해 익산 미륵사 서탑의 사리호는 말할 수 없이 화려하다. 몸체에는 환상적인 인동초와 넝쿨무늬를 배열하면서 여백에는 어자무늬(魚子紋)라는 물고기 알 모양의 작은 동그라미를 촘촘히 넣었다. 무늬의 구성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새김 기법도 점·선·면의 처리를 능숙하게 구사해 더없이 세밀하고 화려하다.

왕흥사터 사리함에 고전적인 기품이 있었다면 이 미륵사지 서탑 사리호에는 바로크적인 과장과 화려함이 넘쳐난다. 이제 어느 누구도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술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름다움에 대한 재인식까지 생겼다.

1965년 익산 왕궁리 5층 석탑에서 출토된 금사리함과 유리 사리병은 아름다운 형태미와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새김으로 그동안 우리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사리함으로 손꼽히며 대개 통일신라의 유물로 추정해왔다. 그러나 사리함 몸체에 연꽃과 넝쿨무늬를 면새김으로 처리한 것과 바탕무늬로 동그라미를 장식한 것, 그리고 이파리 3개가 난 연꽃잎과 어자무늬는 미륵사 서탑 사리호와 거의 한 솜씨로 보일 정도다. 이제 미술사가들은 백제의 유물로 고쳐 생각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백제금동대향로, 왕흥사 사리함, 미륵사 서탑 사리호, 왕궁리 석탑 사리함과 사리병 등을 통해 구체적인 백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가지며 이에 대해 무한한 경의를 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찾아낸 백제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미학적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온조왕 15년(기원전 4)에 위례성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면서 표현한 다음과 같은 여덟 글자 속에 들어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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