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37.html

중생의 얼굴을 한 백제의 미소 
[한가위별책-백제 깨어나다] - 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신라의 귀족적 불상과 울림이 달라···토착신앙 강한 일본도 감화
[2010.09.17 제828호]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서산 마애삼존불상

12년 전, ‘백제 불교’의 현장을 처음 발로 찾아간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충남 지역의 고대·중세 유적을 탐방하다가 결국 서산 근처 마애삼존불을 보러 간 것이다. 주차장에서 꽤나 걸어가고, 개울을 다리로 건너 계단으로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가슴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익히 들었던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84호)의 유명한 ‘백제의 미소’가 어떤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사진으로는 옛날부터 많이 봐온 불상인데도, 직접 그 모습을 보니 감회는 유달랐다. 중앙에 서 있는 여래불의 살찐 듯하고 포근한 듯한 얼굴, 반원형의 매력적 눈썹, 넓은 코, 튀어나온 듯한 볼…. 열반에 든 초월적·탈속적 ‘부처’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저잣거리의, 옆집의 마음씨 좋고 인연들을 잘 챙겨주는 아저씨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후덕하고 풍만한 얼굴의 따뜻한 미소…. 최고의 진리를 터득한 ‘초인’으로서의 부처가 아니고 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자비행을 하면서 세상에 따뜻한 빛을 발산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하면서 묵묵히 선행을 행하는 유마(維摩) 거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여래불 오른쪽에 서 있는 과거의 부처인 제화갈라보살(提和竭羅菩薩)과 왼쪽의 미래불인 미륵불도 하나같았다. 그때까지 많은 부처들을 봤지만, 이만큼 친근한 부처는 처음 본 것인지라 감동은 참으로 깊었다.

처음 본 친근한 부처의 감동

같은 부처라 해도 만드는 사람과 주문한 사람, 예불하려는 신자들의 의도와 사회·문화적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은 천차만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6세기쯤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보다 약 한 세기 늦은 7세기 중반으로 보이는 신라의 금동보살입상(국보 184호) 같으면 역시 둥근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포근한’ 미소라기보다는 우아하고 탈속(脫俗)적인 듯한 귀족적인 미소다. 세인들과 너무 다르다는 느낌을 주는 신라 불상의 날씬한 육체도 상당한 ‘귀족성’을 내비치는데, 이는 그 시대 신라 불상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백제 불상들은 가시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일제 말기에 출토돼 백제의 ‘대표적 불상’으로 알려진 군수리 절터의 석조여래좌상(보물 329호)과 같은 곳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보물 제330호)을 봐도 ‘귀족티’가 전혀 나지 않고 풍만하고 포근하고 친근할 뿐이다.

백제 불상들은 왜 하필 이처럼 범용하면서도 따뜻한 모습의 부처를 중생들에게 보이는가? 이는 백제 불교의 특성으로서 ‘완숙함’과 놀라운 ‘풍토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신라보다 한 세기 반 일찍이, 즉 384년에 불교를 유서 깊은 중국 남부 지방으로부터 받아들인 백제에서는, 불상이 많이 제작되기 시작한 6세기 중반에 이르러 불교가 이미 현지인의 토착성이 강한, 완전히 ‘백제화’된 신앙으로 정착·발전한 것이다. 소박하게 ‘평안’ ‘다산’ ‘공동체의 화목’을 다 함께 기원했던 현지인의 토착화된 신앙이다 보니 부처도 너나 나나 다 될 수 있는 ‘착한 아저씨’로 변하고 말았다. 그만큼 방방곡곡 선남선녀들의 가슴 깊이 부처의 자비의 이상이 새겨졌던 것이다.


국보 330호 금동보살입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구려보다 더 빨랐던 천태교학

그렇다고 백제 불교가 세계와의 소통을 피한 것도 아니다. 고대 동북아의 국제 허브인 백제의 불교인 만큼 ‘국제성’도 남달랐다. 경쟁국인 신라와 고구려의 불교보다 백제 불교는 중국 불교의 최신 동향을 읽는 데 자주 선수를 치곤 했다. 예를 들어 고려 말까지 한반도 불교의 주류 경향은 <법화경>을 중심으로 그 체계를 잡은 천태(天台) 교학이었지만, 그 수입에서 누구보다 백제가 빨랐다.

<송고승전>이라는 중국 송대의 자료에 따르면, 백제의 승려 현광(玄光)은 일찍이 중국 천태종의 제3조인 혜사(慧思·515~577) 스님이 남악산에서 주석했던 567~577년쯤 그 밑에 들어가서 <법화경>의 오묘한 의미와 법화삼매, 즉 <법화경> 봉독을 수반한 참선의 비법을 익혔다고 한다. 현광의 경전 이해 수준과 참선 능력이 꽤나 좋았던 모양으로, 그 영정이 중국 천태종의 중심 사찰인 국청사(國淸寺)의 조당(祖堂)에 모셔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나중에 고구려의 파약(波若) 스님 등 고구려·신라 출신들도 천태학에 천착해 중원에서 명성을 얻은 일은 있었지만 이는 이미 혜사의 제자인 지의(智顗·538~597)가 황실의 외호를 받고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수나라 시절(581~618)이었으며, 그보다는 현광이 빨랐다.

고구려·신라보다 중국과 어쩌면 더 적극적인 불교 교류를 해온 백제는, 이와 함께 익히고 토착화한 불교를 일본열도에 전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52년 신라·고구려와 싸우면서 야마토(大和) 정권과의 동맹 관계를 강화하려는 백제 성왕(재위 523~554)의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 이뤄진 불교 전래였다지만, 대부분의 학자는 다른 자료에 나오는 538년이라는 더 이른 연대를 백제가 일본열도에 불교를 전한 시점으로 본다.

쇼토쿠 태자, 극진한 예 표시

고대 한반도 국가들과 달리 야마토에서는 귀족 가문들과 긴밀히 연결된 토착신앙이 상당한 정치적 기반을 다져 불교 국교화에 가열찬 저항을 펼쳤는데, 이 저항을 눌러야 했던 봉불파(奉佛派)들은 일본열도 주민에게 백제의 높은 문화적 권위를 부단히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대표적 봉불파인 쇼토쿠(聖德) 태자(574~622)는 583년 백제 사신으로 도일한 사문 일라(日羅)를 보고 ‘구세(救世)관세음’ ‘신인’(神人)이라고 하여 무릎을 꿇고 예를 다할 정도로 극도의 존경을 표했다. 결국 백제의 완숙한 관세음 신앙의 권위를 빌려 일본열도에서 이와 유사한 신앙의 씨를 뿌리면서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공고화하려 했던 것은 쇼토쿠의 계산이었을 터인데, 여기서 백제가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다.

백제 승려의 권위는 왜 일본열도에서 그토록 높았을까? 단순한 설법이나 교의 전수에 그치지 않고 사회 발전에 필요한 수많은 지식과 솜씨들을 전해줌으로써 ‘요익중생’(要益衆生)이라는 사문의 의무를 제대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쇼토쿠의 스승 중 한 명인 백제 승려 관륵(觀勒)은 602년 일본열도에 도착했을 때 불경뿐 아니라 지리·천문·책력 관련 서적까지 다 가져왔다. 백제는 6세기 후반 초기 일본 승려들이 불교와 제반 선진 문화를 배우기 위해 유학 가기 시작한 최초의 국가이기도 했다.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에 백제는 무너졌지만, 백제 불교의 전통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백제 승려들에 대한 기억은 일본에서 계속 간직됐으며, 통일신라 시기에도 백제 유민들 사이에서 그 지역 출신의 진표 율사(8세기)의 점찰(占察·점치고 숙생의 죄업을 참회함) 운동이 인기를 끄는 등 종교적 결속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따뜻한 미소를 짓는 백제인의 모습을 띤 부처는, 이미 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속에 각인돼 있었으며, 일본 등 다른 지역들의 중생까지도 크게 감화시켰기에 나라는 망해도 그 불교는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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