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0904151556045&code=900306&med=khan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11) 고구려의 서경(西境) 디더우위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04-15 15:56:04ㅣ수정 : 2009-08-19 11:35:46

초원을 깨우는 고구려 말발굽 소리 들리는 듯

일행이 대흥안령을 관통하는 초원 실크로드의 정상 시저리무쑤무(西哲李木蘇木)에 다다른 것은 2008년 10월21일(화요일) 오후 3시50분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오래도록 기억에 담아두고 싶은 것은 비단 곳(장소)만 아니라, 때(시간)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란 시·공의 협연으로서 시간은 삶의 깊이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드넓은 우주무친 초원

이 높은 곳에 펼쳐진 초원도 신기하거니와,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퍽 궁금했다. 마침 장허핑(江和平)이란 한 유목민을 만났다. 이름 두 자처럼 정말 화평스러워 보이는 순박하고 어진 사람이다. 마흔 다섯의 나이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중국에서는 산아 제한으로 자식을 한 명밖에 낳을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애 셋이라니, 의아해서 그 영문을 물었다. 유목민에 한해서는 자식 두세 명이 허용, 아니 묵인된다는 것이다. 경하할 일이라 그에게 박수를 보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줍어하면서도 못내 흐뭇한 표정이다. 방목에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니깐.

그는 700마리 양과 50마리의 소를 키우는데, 살림은 괜찮다고 한다. 20년 전 대흥안령 기슭에서 농사를 짓다가 이 궁벽한 산속으로 이사해 와 유목민이 되었다. 사회의 수평적 이동이다. 이 마을 20여호는 대체로 그러한 경우라고 한다. 그 말고 몇 집만 한족이고 대부분은 몽골족이라고 한다. 한족들은 흙집이나 벽돌집에서 살지만, 몽골족들은 여전히 몽골식 바오(包)에서 흩어져 산다. 전통과 현대라기보다, 서로 다른 두 문화의 공존 현상이다.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기 시작해서 풀어놓은 양떼와 소떼를 서둘러 몰아와야 할 시간인데도 그는 일행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기념사진까지 함께 찍었다. 나지막한 언덕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채찍을 든 손을 휘저으며 우리를 바래주었다. 

여기서부터는 내리막길이기는 하지만 험한 흙길이며, 게다가 밤길을 가야 한다. 70㎞쯤 가야 포장길이 나온다니 서둘러야 한다. 5㎞쯤 가니 꽤 큰 마을이 나타난다. 집집마다 양떼 우리가 삥 둘러 있고, 이곳저곳에서 대형 콤바인이 윙윙 돌아가고 개별용 풍력발전기 날개가 산바람을 타고 신나게 돌아간다. 어느새 다섯 시도 채 안 되었는데,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어둡기 전에 이 영을 넘어야 했었는데, 이렇게 지체되고 보니 다들 걱정이 앞선다. 누구보다도 기사의 얼굴에는 불안끼마저 서리기 시작한다. 산속이라 어둠은 상상 외로 빨리 찾아든다. 어림잡아 불빛을 따라 한참 간 곳은 바창치롄(場七連)이란 마을이다. ‘사격장’이란 ‘바창’이 의미하듯, 옛날 이곳은 기병들의 사격장이었다. 7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앞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하다. 더 이상 우리의 힘으로는 길을 찾아 떠날 수가 없다. 아직도 50㎞ 더 가야 한다니 방도는 오직 하나, 선도차를 구하는 것이다. 농기구 공장 비슷한 곳에 찾아가 선도차를 부탁했더니, 미리 대기라도 한 듯 제꺽 연락이 닿았다. 상업망이 가동된 셈이다. 건장한 두 젊은이가 지프를 몰고 나타났다. 중국 돈 300위안에 낙착을 보고 지프를 따라 나섰다. 한시름 덜었는가 했는데, 웬걸 마을 어귀를 갓 벗어나자 갑자기 선도차가 길가에 멎는다. 무슨 고장이라도 났는가 해서 가슴이 덜컥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선불 때문이다. 현지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선불 받고는 도망치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무턱대고 선불해야 간다는 것이다. 후환이 걱정되기도 하고, 또 그들에게 남은 반조각의 양심에라도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어처구니없는 승강이 끝에 반액만 먼저 주기로 했다. 우리가 만만찮은 대상이라고 짐작됐던지, 그제야 투덜거리며 시동을 건다. 돈에 눈먼 이 야박한 세상, 인간다움의 양심이나 신뢰가 시궁창에 빠졌으니 한심스럽기도 하고 가련하기도 하다. 

 
길은 길대로 또 얼마나 험악한가. 울퉁불퉁, 고불고불, 질벅질벅, 표지판은 없고… 길의 악조건은 죄다 갖춘 셈이다. 빛이라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뿐, 문자 그대로 칠칠흑야다. 70㎞의 내리막길을 무려 4시간40분이나 걸려 더듬었으니, 시간당 15㎞의 거북걸음을 한 셈이다. 일단 하산하고 나서는 북행으로 훠린궈러(林郭勒)를 향했다. 이 근방에서 캐내는 석탄을 만재한 대형 트럭들이 길을 메우고 있다. 불빛이 환한 꽤 큰 도시인데, 들러서 허기라도 가시려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50㎞ 더 가니 자그마한 읍 바인후스(巴音胡碩)가 나타났다. 더 이상 견디는 것은 무리라 싶어 식당을 찾았지만 10시가 훨씬 넘은 늦은 시간이라서 식당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다. 겨우 문 닫는 소리가 나는 한 허름한 식당에 가서 사정을 하니, 주인은 흔쾌히 받아드린다. 놀라운 것은 설거지는 이미 마쳤을 턴데 금세 닭과 돼지, 소, 양 고기 등 네 가지 도가니탕을 내놓으며 택하라는 것이다. 친절봉사에 맛도 일품이다. 새벽 2시 반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렇게 18시간 이상의 강행군을 마다하고 찾아 온 곳은 대흥안령 바로 서편의 내몽고자치구 시린궈러멍(錫林郭勒盟) 둥우주무친치(東烏珠穆沁旗)의 중심 도시 우리야스타이시(烏里雅斯太市)다. 찾아 온 목적은 고구려의 서경(西境)을 현장에서 확인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의 교과서적인 이야기로는 5~6세기 가장 강성할 때의 고구려 강역을 서쪽으로는 요동 지방, 동쪽으로는 목단강 유역에서 연해주 일원까지, 북쪽으로는 쑹화강 유역의 북만주 일대, 남쪽으로는 한강 이남의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원까지로 잡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도 그 영토가 가장 넓었던 나라였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 강역이 과연 이것으로 그쳤을까? 더 너머로 뻗어간 적은 없었을까? 사실 이 강역 문제는 주로 중국 사서에 의존해 논한데다가 우리 자체의 연구가 부실하다보니 제대로 밝혀낼 수가 없었다. 이 서경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물론, 한 나라의 국경이라는 것은 유동적이다. 항구적일 수도 있고 일시적일 수도 있다. 설혹 일시적일지라도 국경은 국경이며, 따라서 그것은 그 나라 역사와 위상의 반영이기 때문에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자고로 역사상의 국경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는 것이다. 대체로 축소냐 확대냐, 아니면 사실이냐를 놓고 갑론을박한다. 이제 고구려의 서경 문제를 한번 따져보자. 지금껏 이 문제를 해명하는 데서 전거가 될 수 있는 단서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서 제공 받고 있다. 그중 가장 확실한 것은 장수왕의 디더우위(地豆于) 분할 통치 기록이다. 우리는 그 단서의 현장 확인을 위해 불원천리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중국 사서인 <위서> ‘거란전’에 보면, 북위 효문제 태화(太和) 3년, 즉 장수왕 67년인 479년에 고구려가 몰래 유연(柔然)과 디더우위를 분할 통치하려고 모의했는데, 그 침탈을 두려워 거란족의 한 부족인 막하불(莫賀弗) 족장이 차량 3000과 부중 1만, 그리고 가축들을 이끌고 오늘의 다릉허(大凌河) 동쪽으로 남하해 북위의 보호를 구했다고 한다. 당시 내몽고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중흥기를 맞고 있던 유연(일명 )은 북위에 대해 통혼을 강요하리만큼 고압적 자세를 취하고 여러 차례 북위를 침공하면서 호시탐탐 디더우위 등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시도한다. 북위와의 대결관계에서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있던 유연과 고구려는 마치 순치(脣齒)처럼 밀착관계에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전성기를 일궈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 모두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두 세력을 조종하는 능란한 이원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 북위와의 관계는 결코 순탄치 않고 기복의 연속이었다. 북위는 남조에 대한 고구려의 우호관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백제가 고구려 토벌(472~473)을 위해 북위에 파병을 요청하고, 고구려가 백제에 파견되는 북위 사신의 영내 통과를 불허하는 등 백제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국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게다가 고구려의 북방에서 흥기한 물길(勿吉)이 디더우위를, 에도는 길을 통해 북위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북위를 등에 업고 고구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로서는 디더우위를 장악해 그 길목을 차단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렇게 유연의 고토 회복과 고구려의 북방 진출 및 물길 통로 차단이라는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물림으로써 디더우위를 함께 공략해 분할 통치하는 모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실천 없이 그저 모의에만 그쳤을까. 앞의 <위서> 기록만 보고는 판단하기가 애매하지만, 그후에 나온 <수서> 등 몇 가지 사서에 의하면 당시 거란족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고 북위에 ‘내부’(內附, 보호)를 구했다는 내용이 누누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가 디더우위 일원을 점령 통치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판단된다. 얼마 동안, 어떻게 통치했는가는 아직 미상으로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단, 분명한 것은 장수왕이 대군을 이끌고 대흥안령을 넘어 디더우위까지 원정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5세기 말 고구려의 서경은 대흥안령 너머 몽골초원의 디더우위 일원이었다고 확언할 수가 있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5세기 당시 디더우위는 이른바 16개 북적(北狄, 북쪽 오랑캐)의 일국으로서 대흥안령 일원에 자리한 실위(室偉)국에서 서쪽으로 1000여리 되는 곳, 즉 오늘의 시린궈러멍 동·서오주무친치에서 활동한 유목국가다. 기름진 초원이라서 소와 양이 많고 명마의 고장으로서도 유명했다. 고구려는 여기의 비옥한 초원에서 전마를 기르고 보충 받아 기마전투력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 
 

대흥안령 기슭의 소목장

‘디더우위’의 어원에 관해서는 ‘지두’(地豆)는 몽골어 ‘달단’(, 몽골)의, ‘우’(于)는 ‘간’(干)의 와전으로서 ‘달단의 왕’이란 뜻이라고 해석하는 일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다. 이에 비해 오늘날의 ‘우주무친’은 몽골어로 ‘포도를 따는 자’란 뜻으로서 13세기 알타이산맥의 포도산 일대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부족을 지칭하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늘 동·서 우주무친의 면적은 7만260㎢이고 인구는 약 13만명인데 그중 몽골족이 70%다. 90%가 푸르싱싱한 초지인 우주무친 초원은 몽골초원 가운데서도 비옥하기로 이름 나 있다. 석탄과 철광석을 비롯한 부존자원도 넉넉해 발전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예로부터 대흥안령을 넘어 외몽골(몽고인민공화국) 동부고원으로 이어지는 초원로가 바로 이곳을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와 있는 동우주무친치의 중심 도시 우리야스타이에서 서쪽으로 68㎞만 가면 내·외 몽골을 가르는 관문인 주언가다푸(珠恩達布)가 나타난다. 우리야스타이 길가에는 내·외 몽골을 오가는 화물차가 가끔 눈에 띈다. 그 옛날 고구려 사절이 외몽골에 세워졌던 돌궐에 파견되고, 광개토왕이나 장수왕 휘하의 날쌘 기마군단이 우주무친 초원을 누비며 서쪽의 유연과 섭외할 때 십중팔구 이 길을 통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은 한반도로 이어진 초원 실크로드의 한 요로였다고 할 수 있다. 말갈기를 휘날리며 장검을 뽑아들고 쏜살같이 돌진하는 고구려 기마군단의 그 용감무쌍한 기상이 마냥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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