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00305&artid=200910271724005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37) 낯설지 않은 부랴트를 찾아서
정수일|문명사학자·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입력 : 2009-10-27 17:24:00ㅣ수정 : 2009-10-27 17:25:17

씨름·강강술래 즐기고, 체구·생김새까지…한국인과 너무 닮았네

지금의 시베리아 초원로는 ‘신 실크로드’ 개념에서 보면 ‘철의 실크로드’이다. 이를테면 기계동력에 의해 움직이는 기차를 타고 편히 다니는 초원길이다. 길은 그 길이되, 그 옛날 말 잔등에 업혀 다니던 험난한 길은 아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기차에서 몇 밤 몇 날을 지내는 것쯤은 거뜬히 넘겨야 할 것이다. 7월5일 오전 10시45분에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모스크바행 시베리아 횡단열차(5호차 10번 좌석)를 타고 7일 오후 6시5분 목적지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으니 꼬박 2박3일, 55시간이 걸린 셈이다. 주파한 거리는 무려 3336㎞나 된다. 4인 1실의 열차 칸은 여행에 불편함이 없이 잘 꾸려져 있다. 소형 TV가 침대마다 한 대씩 있고, 조명과 선반 같은 시설도 이용에 편리하게 설계돼 있으며 침구도 깔끔하다. 현대화로 걸음을 옮기는 러시아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사실 기차 여행은 나름대로의 멋이 있다. 긴 시간을 빨리 달리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사상(事象)에 관한 사색의 여유를 가질 수 있으니 그러하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변의 농촌 풍경

열차는 타이가(침엽수림대)의 우거진 숲과 스텝의 푸르싱싱한 풀밭 속을 이리저리 숨바꼭질 하듯 꼬리를 휘저으며 미끄러져간다. 한여름의 시베리아는 온통 푸른 바다이다. 자작나무와 잣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가 하면, 짙푸른 평원과 늪지대가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다. 곁가지 하나 없이 하늘을 향해 올곧게 자란 자작나무와 잣나무의 행렬은 참말로 장관이다. 동틀 무렵 호숫가나 강가의 나무 숲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나는 뽀얀 물안개, 백야의 어둠을 사뿐히 몰고 오는 낙조, 여기 시베리아만이 간직한 환상이고 운치다. 졸지에 창가를 적시는 빗방울은 나그네의 추념(追念)을 다독거린다. 어쩌면 세계의 마지막 청정 호수가 될 저 바이칼을 옆에 끼고 몇 시간 달린다는 것은 드문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몇 시간씩 달리고는 역에서 길게는 30분까지 정차한다. 정차하면 영락없이 아낙네들이 바구니에 삶은 감자와 계란, 찐빵, 건어물 같은 갖가지 먹을거리와 들꽃 다발을 들고 다가와 앞다퉈 호객한다. 옛날과 달라진 풍경이다. 그전엔 이동수레 같은 데 차려놓고 앉아서 팔았었는데, 지금은 발품을 팔아 뛰어다니며 벌이를 한다. 이러저러한 이상야릇한 풍경 속에 별로 지루함을 모른 채 시간은 흘러간다. 그러나 이 길에서 꼭 들러봐야 할 곳 두 군데가 있는데, 일정상 들르지는 못하고 스쳐지나갈 수밖에 없어 못내 아쉽기만 하다. 

그 첫번째가 이르쿠츠크에서 동쪽으로 약 600㎞ 떨어진 치타다. 치타는 우리와 인연이 있는 고장이다. 일찍이 이곳에서 고구려 말등자와 함께 극동과 서역 간의 교류를 실증하는 악기 등 몇 가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치타가 교류 통로인 초원 실크로드상에서 길목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기병이 이곳까지 왔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등자를 비롯한 고구려의 마구가 전래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진대, 이것은 두 지역 간에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더욱이 이번 시베리아 초원로 답사에서 연해주에 자리했던 발해가 이른바 ‘초피(貂皮)의 길’을 통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와 교류를 진행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그 길이 바로 이곳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단되니 어찌 치타역에서 발걸음이 떨어지겠는가.
 

울란우데 기차역 외관.
 
새벽 2시39분까지 잠을 쫓아가면서 치타역을 기다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곳은 1910년대 재러시아 한인들이 벌인 독립운동의 한 중심지였다. 당시 치타는 자바이칼 주의 수부로서 주로 감자 농사를 짓는 한인 120~130명이 살고 있었다. 물을 따라 물고기가 생기는 것처럼 한인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것이 당시의 시대상황이고 보면 이해가 간다. 미국 국민회로부터 파견된 이강(李剛)이 주도한 이곳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화(1911~15년)가 블라디보스토크의 권업회와 쌍벽을 이루며 재러 한인들의 반일독립운동을 이끌어갔다. 어딘가에 그러한 흔적이 남아 있으련만 찾지 못하고 지나가는 마음이 무쇠덩어리처럼 무겁다. 23분의 정차 시간은 마음의 상처만 남겨놓았다. 다음으로 꼭 들려봐야 할 곳은 부랴트 공화국의 수도 ‘울란우데’다. 부랴트,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미국 에모리대학 연구소의 세계 종족별 DNA 분석 자료에 의하면 바이칼 주변의 부랴트인과 야쿠트인, 아메리카 원주민, 그리고 한국인의 DNA가 진배없다고 한다. 평평한 얼굴, 튀어나온 광대뼈, 얇은 입술, 낮은 코, 두꺼운 눈꺼풀, 가는 실눈, 작달막한 체구, 두꺼운 피하지방층 등 생김새도 한국인과 이들, 특히 부랴트인은 엇비슷해서 가려내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러한 체질인류학적 유사성 말고도 생태적 및 문화적 유사성도 쉬이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서로가 낯설지 않고 만나면 친근감마저 든다. 이제 그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하자.

사실 울란우데는 2년 전 울란바토르를 거쳐 서시베리아 답사를 할 때 들렀다. 그 전에도 두세 번 지나간 적이 있다. 원래 부랴트인들은 바이칼 호수 분지와 앙가라 강 유역, 동사얀산맥에서 유목생활을 해 온 고아시아인의 몽골계에 속한 한 인종이다. 신화에 따르면 ‘부르데 치노’, 즉 ‘푸른 늑대’라는 이름의 남자가 그들의 조상인데, 그는 ‘고아마랄’, 즉 ‘고운 붉은 사슴’과 결혼해 후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고 한다. ‘부랴트’란 말은 ‘늑대’란 ‘부르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들의 거주 지역에서는 30만년 전 인류의 생활 흔적과 신석기 및 청동기 유물도 다수 출토되어 그들 역사의 유구함을 증명해주고 있다.


우스찌 오르딘스크 시의 표식물인 기마동상.
 
부랴트는 칭기즈칸 시대에 몽골 제국에 편입된 이래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 때까지 줄곧 몽골과 운명을 같이해 왔다. 그러다가 1727년 러시아와 만청 사이에 맺은 카흐타 조약에 의해 러시아령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이곳은 혁명적 적군(赤軍)과 반혁명적 백군(白軍) 간의 격전장이었다. 적군의 승리로 끝나자 소비에트 정부는 이곳을 완충지로 만들기 위해 울란우데를 수도로 하는 극동공화국을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반적 시베리아 정세가 안정되자 소비에트 정부는 이 공화국을 소비에트 러시아로 흡수(1922년)해 부랴트몽골자치사회주의공화국으로 개명했다. 그 이후 부랴트와 다른 지역 몽골인들과의 통합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1958년에 모든 공식 명칭에서 ‘몽골’자를 삭제해버렸다. 그러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80년대 후반부터 이곳에도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어왔다. 라마교가 부활되고 학교에서 부랴트 몽골어 교육이 정식 채택되었다. 90년에 자체 법령이 소련 법령에 우선하며 부존자원에 대한 독자적 통제권을 주장하는 ‘주권 선언’을 발표했으나, 이듬해에 그냥 러시아 연방 내의 자치공화국으로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선상에서 94년엔 새로운 ‘부랴트 헌법’이 채택되고 자유선거로 대통령을 뽑았으며, 부랴트인이 수도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를 이른바 부랴트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대다수 주민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공화국 인구는 100여만명이며, 그중 부랴트인은 40만명쯤 되는데 30만명이 울란우데에 몰려 있다.서쪽으로 바이칼 호수를 끼고 있는 수도 울란우데는 ‘붉다’라는 뜻의 ‘울란’과 ‘우다’라는 강 이름이 합친 합성어이다. 이곳은 북쪽으로 타이가 산림지대가 에워싸고 남쪽으로도 낮은 산들이 둘러싼 분지이다. 울란우데는 여느 러시아 중소 도시와 별반 차이 없는 수수한 도시로서 큰 건물은 얼마 없으나 공장 굴뚝은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몽골을 거쳐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만나는 접지로서 역사는 꽤 크고 붐빈다. 인상적인 것은 라마교의 부활이다. 티베트 라마교가 몽골을 거쳐 이곳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초다. 유입 후 세력을 키워 한때 제정 러시아의 공인을 얻었으나, 말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세워질 무렵까지만 해도 부랴트와 치타, 이르쿠츠크 일원에 46개의 수도원과 150여개의 사원이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 탄압을 받아 승려 수천명이 수용소로 보내지고 수도원 2개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부랴트에만도 사원 20여개가 다시 문을 열었다. 조금은 과장된 수치지만 신도가 20만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오늘날 부흥을 선도하는 총본산은 울란우데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자리한 이로브긴스크 마을에 있는 다찬 사원이다. 승려 30여명과 학승 100여명이 있다고 한다. 대웅전에는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부랴트의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들에는 예외 없이 불상이 모셔져 있다. 격변기를 맞아 흔들리는 마음을 종교적 신앙으로 다잡으려는 부랴트인들의 속내를 읽을 만도 하다.


우리의 ‘강강술래’를 닮은 부랴트인들의 집단놀이(부랴트 민속박물관 소장).
 
현대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는 부랴트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삶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방편에는 이런 종교뿐만 아니라, 고유의 샤머니즘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한국 무속의 원류가 바로 이 북방 민족들 고유의 샤머니즘에 닿아 있으니, 그 현장을 찾아가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다음날, 시내에 있는 작지만 알찬 향토박물관을 둘러본 다음 300㎞나 떨어진 알혼 섬으로 향했다. 한 시간쯤(80㎞) 달리니 갖가지 들꽃이 만발한 드넓은 초원이 나타난다. 안내 표식으로 길 오른쪽에 우뚝 서 있는 기마동상에서 우회전해 자그마한 도시 우스찌 오르딘스크에 이르렀다. 시 한가운데 부랴트 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 관장은 일행을 친절하게 맞아준다. 이 두 박물관과 이어지는 답사 길, 그리고 알혼 섬에 있는 후즈르 박물관에서 우리는 부랴트의 어제와 오늘을 생생하게 알아낼 수가 있었다. 특히 관심거리인 샤머니즘에 관해서 말이다.박물관에는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한 각종 토기와 마구, 불상, 다양한 생활과 놀이 도구, 순록 뿔 왕관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 두 박물관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 것은 다채로운 샤먼 의식과 도구, 장옷과 마고자, 세형동검과 비파형 동검, 씨름과 강강술래 같은 우리의 것과 너무나 흡사한 문화유물들이다.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보지는 못했지만, 민속박물관에는 민속공연장이 따로 마련되어 주로 샤먼의 연출과 더불어 민속 노래와 춤도 선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공연장 입구에서는 불을 피워 관람객을 정화시키고 샤먼이 주술을 읊어 액운을 막아준 다음 입장시킨다. 불과 샤먼에 대한 믿음과 기대의 표현이다. 민속박물관에서 돌아오는 길에 미젤리자(‘눈보라’라는 뜻) 식당에서 이곳 토속음식인 닭고기 볶음밥과 훈제한 돼지고기를 흑맥주에 곁들어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곳을 떠나 알혼 섬에 이르는 길가 곳곳과 알혼 섬 안에서도 알록달록한 색 천으로 단장한 세르게(몽골의 오보)와 구르칸(적석묘)을 발견했다. 다른 점은 세르게의 경우 대개 1~2m 길이로 잘라 채색 천을 휘감은 통나무를 수직으로 몇 대씩 나란히 세워놓는 형식이다. 아마 그 기능은 몽골에서처럼 샤머니즘적 기능과 함께 도로나 경계의 표식인 듯하다. 샤머니즘은 부랴트인들을 포함해 시베리아인들의 정신적 근간으로서 인간과 주변의 자연환경이나 현상에 대한 관계를 중시하는 친환경주의 사상이다. 그들은 처해진 주변의 환경이나 현상에 대해 예를 표하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버리고 인간만을 생각하는 이기(利己)에 대해 경고한다. 이러한 친환경주의 사상의 결정체가 바로 샤머니즘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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