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31.html

부여에 뿌리 두고 동아시아로 뻗어가다 
[한가위별책-백제 깨어나다] - 동아시아의 디오게네스,백제인
일본 왕실이 흠모하고 백성들이 선망한 백제인
[2010.09.17 제828호]   서윤희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

부여에 뿌리 두고 동아시아로 뻗어가다. 출판사 <수막새> 제공

백제 멸망 뒤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주류성과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란 국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백제 유민은 신라에 편입돼 신라인으로 살아가거나 당과 일본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소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신료 93명과 백성 1만2천 명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백제 멸망 뒤 4천 명에 이르는 백제인이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이주해갔다고 한다. 나라는 망했지만 백제인과 백제 문화의 불씨마저 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이 맞닥뜨린 낯선 문화적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지켜갔고, 또 어떻게 새로운 문화와 융합해나갔을까?

백제인에게 계승된 부여

백제는 마한 소국 연맹체 가운데 한 나라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온조와 비류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과 졸본부여 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부여에 있을 때 태어난 아들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함께 남하해 형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정착해 ‘십제’(十濟)라고 했다. 비류가 죽은 뒤 그의 무리를 통합한 온조는 모든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즉, 백제는 주몽(동명)을 족조(族祖)로 하는 졸본부여계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한성 시기 온조왕대는 동명성왕을 시조로 모신 사당이 세워지고 왕실은 ‘부여씨’를 칭했다. 웅진 시기 개로왕은 북위에 보내는 국서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음을 강조한다. 또한 성왕은 아버지 무령왕에 이어 적극적으로 대고구려 정책을 추진했고, 사비로 천도해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뒤 새로운 사비 시대를 열었다. 성왕은 대내외적으로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나라로 자처했던 것이다. 한성, 웅진, 사비로 비록 도읍을 옮겼지만 백제인에게는 부여 계승 의식이 면면히 이어져왔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와 일본의 교류는 백제 아신왕 6년(397)에 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는 기록에 의한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략을 받은 직후였다. 전지가 귀국해 왕으로 즉위한 뒤 <일본서기>에는 전지왕이 그의 누이 신제도원(新齊都媛)을 왜국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또 백제가 개로왕의 동생 곤지(昆支)를 왜국에 파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곤지는 16년 동안 체류한 뒤 귀국하지만 그가 체재했던 일본 가아치국(河內國) 아스카군(安宿郡)에는 그를 모시는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가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아스카베노미야스코씨(飛鳥戶造氏)의 조상이다. 이 신사의 주변에는 고분 100여 기가 있는데 아스카베천총(飛鳥千塚)이라 불린다. 이 횡혈식 석실분은 일본에는 그 이전에 없던 분묘로 백제로부터 도입된 새로운 형식이었다. 일본 고분 시대에 많이 축조된 전방후원분이 점차 감소되면서 5세기 중반 백제 지배계급의 묘제였던 횡혈식 석실분이 도입되고 6세기 일본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는 단순한 무덤 구조만의 변화가 아니라 함께 토기를 묻는 부장품의 풍습과 장송 의례 절차의 변화를 의미했다.


(위)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건립한 일본 동대사와 대불(아래).
 
일본을 감화시킨 백제 학자와 승려들

5∼6세기에는 한반도로부터 철기·도자기 제작 기술, 금공·토목 기술 등 새로운 기술이 전파됐고, 백제 토기는 일본 토기 스에키(須惠器)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로소 일본에서 높은 온도의 가마를 이용한 경질토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제 금공예품 제작 기술의 전파를 보여주는 것은 금동제 신발과 장식대도, 귀면문 허리띠 등을 들 수 있다.

무령왕과 성왕은 중국 남조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입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 백제는 왜국에 불교를 전하고, 오경박사·역박사·의박사·채약사 등을 보낸다. 승려, 기술자 집단 등 인적 교류가 진행되면서 이들을 통해 다양한 선진 문물이 전해졌다. 왜는 백제에 군사력 지원으로 보답했다. 왜는 478년 이후 120여 년간 중국과 교류가 단절됐기 때문에 선진 문물의 수입은 거의 백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시기는 왜의 고대국가 형성기로 백제를 통한 불교의 수용은 지배층의 이념과 의식을 바꿔놓았다. 이렇게 선진 제도가 도입되고, 백제의 학자와 승려 등 선진 인력에 고무돼 왜 왕권의 문화 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대략 4세기 말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7세기 후반까지 300여 년 동안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런 양국의 우호적 관계는 백제 멸망 뒤에도 지속돼, 왜는 663년 백제를 구원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단을 파견해 백강구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왕인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일본 <고서기>(古事記)와 <일본서기>에 남아 있다. 그가 일본에 건너 간 시기엔 논란이 있지만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가서 일본에 유교와 한자를 전했다고 한다.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왜국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일본에 문자가 없던 시절 처음으로 한자를 전달한 공으로 일본에서는 크게 추앙받는 인물이 되어 오사카부(大阪府) 히라카타시(枚方市)에 있는 무덤을 비롯해 우에노 공원의 왕인박사비, 왕인신사, 왕인공원 등 그를 기리는 곳이 생겨났다. 왕인의 후손은 가와치노 아야우지씨(西文氏)인데 문필로 이름을 날려 일본 조정에서 일했고 대대로 가와치(河內)에 살았다.


목간

백제인의 후손들 일본을 이끌다

왕인의 후손 가운데는 행기(行基)가 있다. 행기 스님은 나라 시대 최고의 고승으로 일본 왕실 최초의 대승정이 된 인물이다. 행기는 자신을 대승정으로 기용한 쇼무(聖武) 천황의 간청을 따라 도다이지(東大寺)의 비로자나불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평생 대중포교와 사회사업을 병행한 공로로 일본 조정으로부터 ‘대덕’(大德)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민중으로부터 ‘행기보살’이라고 불리며 부처의 화신으로 숭앙된 인물이었다.

<속일본기>에 따르면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 또는 禪廣)은 의자왕대 풍장과 함께 조메이(舒明) 천황을 모시도록 보내졌다. 백제 멸망 뒤 복신이 풍장을 맞이해 왕통을 복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선광은 백제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664년 덴지(天智) 천황은 선광을 백제왕(百濟王)으로 삼고 난바(難波)로 이주시켰다. 691년 지토(持統) 천황은 선광에게 백제왕을 씨성으로 쓰게 했다. 그리고 정광사(正廣肆·종3위 상당)의 관위를 주고 봉호를 100호 주었다. 693년 선광이 사망하자 지토 천황은 그에게 정광삼(正廣參·종2위 상당)으로 추증해 그의 후손에게 음직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몬무(文武) 천황은 701년 대보율령을 제정해 백제왕 선광이 거주하던 곳의 행정구역명을 셋쓰국(攝津國) 구다라군(百濟郡)으로 바꾸었다. 이곳에서 백제왕씨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 되었고 도다이지의 비로자나불을 세우는 데 큰 활약을 했다. 특히 백제왕 경복(敬福)은 황금 광산을 개발해 쇼무 천황에게 900냥의 금을 헌상하게 된다. 경복의 황금 헌상은 도다이지 대불 조영의 부정적인 여론을 누를 수 있었고, 황통의 권위를 높여준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경복은 750년 구나이쿄(宮內卿)가 되어 궁중 업무를 총괄 지휘했다. 이후 백제왕씨는 왜 조정에서 큰 활약을 했고 간무(桓武) 천황대로부터 닌묘(仁明) 천황대까지 백제왕씨의 여자들이 계속 천황의 후궁으로 들어가 그들의 소생이 천황의 아들로 고위직을 차지했다.


(위)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자 (아래)무령왕릉 청자를 닮은 중국 남경시박물관 청자

일본왕을 옹립하고 폐위한 도목

목협만치(木?滿致)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이 함락됐을 때(475) 문주왕을 모시고 조미걸취(祖彌桀取)와 함께 남쪽으로 간 인물이다. 그 이후 한국의 기록에는 없다가 <일본서기>에 목만치(木滿致)로 등장한다. 이후 그는 왜 왕조에서 재정과 외교를 담당하는 고위 관리로 등용된다. 그가 만든 새로운 성씨가 소아(蘇我·소가)씨였다. 이후 목협만치는 소아만치(蘇我滿智)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등장한다. 그가 왜에서 거주한 곳은 ‘소가’(曾我)라는 백제인 호족들이 지배하던 고장이었다. 지금의 가시하라시(?原市) 이마이초(今井町)다. 소아씨 가문은 소아만치를 이어 ‘한자(韓子)-고려(高麗)-도목(稻目)-마자(馬子)-입록(入鹿)’으로 계승되고, 특히 도목(稻目)대부터는 일본 왕실의 외척이 되어 천왕의 옹립과 폐위를 좌지우지하며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신선성씨록>(新撰姓氏錄)은 815년에 편찬된 일본 고대 씨족의 실태와 유래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기록된 씨족의 3분의 1이 한반도계 이주민으로 백제계 씨족 수는 104개다. 백제계 도래인들은 앞에서 말한 백제왕씨의 거주지인 난바와 소아씨의 터전이던 소가 인근, 왕인의 후손이 살던 가와치 등에 많이 모여 살며 백제 도래인촌을 형성했다. 난바에는 백제사(百濟寺)와 백제니사(百濟尼寺)가 세워져 백제인의 정신적 위안처가 되기도 했다. 덴지 천황은 667년 도읍을 오미국(近江國) 오쓰궁(大津宮)으로 옮기는데, 백제가 멸망한 뒤 이주해온 백제 이주민 1천여 명을 새 도읍지로 이주시켰다. 여기에는 백제의 주요 인물들이 포함됐다. 그 이유는 백제인의 선진 지식과 기술을 새 왕도의 건설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덴무 천황은 도래한 백제인에게 10년간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내리는 등 백제계 도래인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했다.

일본 불교의 큰 스승들

성왕대에 일본에 불교가 전해지면서 점차 일본에도 불사의 건립이 활발해져 일본 최초의 가람 형식을 갖춘 사찰 아스카데라(飛鳥寺)가 지어졌다. <일본서기>에는 이 사찰이 조영될 때(588) 백제에서는 혜총·영근·혜식 등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보냈고, 사공(寺工)·노반박사(?盤博士)·와박사(瓦博士)·화공(畵工) 등 많은 기술 인력이 파견됐다고 기록돼 있다. 이 사찰은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인 소아마자(蘇我馬子)의 발원에 의해 창건됐다. 소아마자는 그의 아들을 사사(寺司)로 임명하고 백제승 혜총을 설법자로 삼았다. 백제의 기술로 만든 이 절이 준공되는 날 소아마자를 비롯한 100여 명의 도래인 후손이 백제 옷을 입고 절을 보면서 기뻐했다고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다. 아스카데라의 대불(大佛)을 안치한 안작조(鞍作鳥) 또한 백제계 도래인이었다. 그는 호류지의 석가삼존상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호류지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5층 목탑과 금당이 있는데 백제 건축의 영향이 뚜렷하며, 이곳에서 발굴된 기와도 백제 와당과 양식적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목조관음보살입상인 구다라관음(百濟觀音)은 일본의 국보로 백제 도래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과 백제가 7세기 초에 왜 왕실로 만들어 보낸 것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백제와의 관련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한편 쇼무 천황은 지배체제의 강화와 사상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 지방 사원 체계를 정비하면서 도다이지를 건립하게 된다. 이 절과 비로자나불 주조의 설계와 제작을 지휘한 사람은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인 양변(良弁) 스님이었다. 앞서 언급한 행기 스님은 당시 대승정으로 임명돼 도다이지의 불사 사업을 돕고 있었다. 양변은 비로자나불 조영 중 사망해 대불전 바로 앞에 그의 목상이 안치됐다. 당시 공사의 책임자는 국중공마려(國中公麻呂)였는데, 그는 백제에서 건너온 덕솔(德率) 국골부(國骨富)의 손자였다. 일본 고대의 대표적 불교 사찰들이 백제 도래인과 관련됐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백제 것이 아니면 ‘시시하다’… ‘구다라나이’

일본에는 백제 도래인의 기록과 유적이 많아 남아 있지만 당으로 간 백제 유민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소정방이 귀국하면서 1만2천여 명의 백제인을 데리고 갔다고 하지만 자취가 알려진 사람은 매우 소수다.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은 그해 병사해 낙양의 북망산에 묻히고 그의 아들 부여융은 다시 백제 땅으로 돌아와 웅진도독에 임명됐다가 당으로 가서 생을 마감했다. 흑치상지는 사비 함락 뒤 당군에 맞서 싸우다 항복하고 당으로 갔다가 다시 백제 땅으로 돌아와 부여융을 수반으로 하는 웅진도독부의 군장이 되었다. 웅진도독부가 해체된 이후에는 당으로 가서 토번 공격의 선봉에 서서 두각을 나타내다 모반을 꾀했다는 무고로 옥사하고 만다. 흑치상지는 2대 흑치준(黑齒俊)으로 이어진다. 백제 유민 대부분은 군대에 종사하거나 서주와 연주 등 하남 지역에 배치돼 당의 백성으로 살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에 간 인물 중에는 2·3대에 걸쳐 두각을 나타낸 집안도 몇몇 있지만 그들이 일본의 백제 도래인처럼 씨족을 형성하거나 백제의 유적을 남긴 경우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과 일본에서 살았던 백제 유민들의 자취의 차이는 역사적으로 당과 일본이 처했던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백제는 당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해,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일본에 선진 문물과 기술을 전해주는 위치에 있었다. 일본의 처지에서 선진 문물의 주인공인 백제인들은 당연히 환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어의 ‘구다라나이’(百濟無い)는 ‘시시하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백제(百濟)를 ‘구다라’라고 부른다. 구다라나이는 ‘백제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고대에 백제의 것이 일본 것보다 훌륭하고 뛰어났기 때문에 ‘구다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일본서기>에 보면 조메이 천황 10년(638)에 백제천 옆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짓고, 13년 10월에는 조메이 천황이 백제궁에서 죽었는데, 북쪽에 빈궁을 설치해 이를 백제대빈(百濟大嬪)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고대 일본의 왕가가 얼마나 백제의 문화를 흠모하고 이를 모방하려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아키히토 일왕은 “나 자신으로 말하면, 환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 역사책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 혈연을 느끼고 있다”(<요미우리신문> 2001년 12월23일치)는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아키히토 왕의 이 발언은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또 유사성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며, 일본에 전해진 백제 문화 속에서 일본 고대문화의 원형이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시사한다.

서윤희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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