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27.html

비운의 명장 흑치상지
[한가위별책-백제 깨어나다] - 동아시아의 디오게네스,백제인
부흥군 궤멸시킨 백제의 유장···당에서 승승장구하다 모반죄 몰려
[2010.09.17 제828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비운의 명장 흑치상지 
 
중국 하남성 낙양에 북망산이 있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라는 <성주풀이>의 낙양성 무덤은 북망산을 뜻한다. 낙양에 도읍했던 중국 여러 왕조 지배층의 귀족 묘지인데, 현재 고묘(古墓)박물관이 조성돼 있다. 그런데 우리와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곳에 뜻밖에도 우리 역사와 관련된 인물이 여럿 묻혀 있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백제의 유장(遺將)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을 발견한 곳도 북망산이다. 흑치상지는 <삼국사기>는 물론 중국의 <구당서>와 <신당서>에도 열전이 실려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파란만장하고 국제적인 인생을 살았음을 뜻한다. ‘흑치’라는 특이한 성씨의 유래가 수수께끼인데 흑치상지 ‘묘지명’은 “그 선조가 부여씨에서 나와서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았다”라고 적고 있어서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의 지파(支派)임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기>와 <구·신당서> 모두 ‘백제 서부인’이라고 적고 있기 때문에 흑치는 백제의 서쪽 어디쯤으로 유추된다.

임존성 사수하자 3만 병사 모여들어

흑치상지 ‘묘지명’은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했는데,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고 전한다. 흑치상지의 운명은 백제의 멸망과 함께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으로 접어든다. ‘묘지명’은 “당 현경(顯慶·656~660) 연간에 당나라에서 소정방을 보내 백제를 평정하자, 그 주인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입조(入朝)했고, 당나라는 이들을 만년현인(萬年縣人)에 예속시켰다”라고 간단하게 전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군의 맹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는 “소정방이 늙은 왕(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니 흑치상지는 두려워서 측근 무장 10여 인과 도주했다”면서 “(흑치상지가) 무리를 모아서 임존성에 웅거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 되어 모여드는 이가 3만 명이나 되었는데, 소정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흑치상지는 드디어 200여 성을 회복시켰다”라고 전하고 있다.

백제 부흥군이 기세를 올리자 소정방은 황급히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장병 1만3천여 명을 당나라 장안으로 압송했다. 백제 부흥군의 복신·도침 등은 일본에서 귀국한 부여풍(夫餘?)을 임금으로 추대했는데, 흑치상지는 이 세력의 주요 무장이었다. 당나라는 662년 부여융을 당나라 장수 유인궤와 함께 귀국시켜 백제 부흥군에 맞서 싸우게 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백제 부흥군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흑치상지의 운명길이 달라진다. 백제 무왕의 조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실권을 잡자 풍왕이 복신을 제거한 것이다.


낙양 북망산 고묘 박물관의 경릉. 고구려 여인 문소태후의 아들 북위 세종의 릉.
 
부흥군 내분으로 당나라 투항

<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은 “용삭(龍朔·661~663) 연간에 고종이 사자를 보내 흑치상지를 타이르니 유인궤에게 항복했다”고 전하고 있다. 당 고종이 사자를 보내 타일렀다는 것은 부여융이 흑치상지 회유에 적극 나섰음을 뜻하는데, 백제 부흥군에 서로 죽고 죽이는 내분이 발생했을 때 부여융이 회유하자 흑치상지는 투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백제 부흥군의 수도인 임존성 함락에 가담해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흑치상지는 부여융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받고, 664년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귀국하는데 ‘묘지명’은 “(흑치상지가) 웅진성에 진수하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나라의 관점이고, 백제 유민들은 백제 부흥군의 맹장이 당나라 장수로 돌아온 것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당나라로 들어간 흑치상지는 “함형(咸亨) 3년(672)에 공이 있으므로 충무장군(忠武將軍)…과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는 ‘묘지명’의 기록처럼 승승장구한다. 그의 공은 대부분 당나라 변방을 공격한 토번(티베트)과 돌궐(투르크)과 맞서 싸운 것이었다. <구당서> 흑치상지 열전에 따르면 그는 당 고종 의봉(儀鳳) 3년(678) 토번이 변방을 공격하자 이경현과 함께 격퇴하러 나섰다. 당군이 진흙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 흑치상지가 야밤에 결사대 500명을 거느리고 토번의 군영을 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당 고종은 흑치상지의 지략을 높이 사 좌무위장군으로 봉하고 금 500냥과 비단 500필을 하사했다.

또한 토번의 찬파와 소화귀 등이 3만여 군사를 이끌고 공격했을 때도 흑치상지는 3천여 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기습해 토번 2천여 군사의 목을 베고 양과 말 수만 필을 획득하기도 했다. 당 중종 수공(垂拱) 2년(686)에는 돌궐(투르크)이 변경을 침범하자 흑치상지가 다시 격퇴하러 나섰는데, 직접 기병 200명을 이끌고 선봉에서 질주하자 돌궐군이 도주했다. 흑치상지는 밤에 군영에 봉수처럼 불을 질렀는데 마침 동남쪽에서 대풍이 일자 돌궐군은 구원병이 오는 것으로 알고 도주했다고 <구당서>는 적고 있다.

토번과 돌궐 토벌하며 북방 호령

이처럼 서방의 티베트와 북방의 투르크를 진압한 것에 대해 ‘묘지명’은 “오랑캐의 티끌을 숙청하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한(漢)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어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런 공으로 흑치상지는 드디어 연국공(燕國公)의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당 중종 수공(垂拱) 3년(687) 돌궐이 삭주를 다시 공격했을 때 대총관(大總管)으로 격퇴에 나선 흑치상지의 운명에 암운이 깃든다. 흑치상지는 황화퇴에서 돌궐군을 크게 격파하고 40여 리나 추격했다. 돌궐군이 흩어져 적북으로 도주하자 중랑장(中郞將) 찬보벽이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전군이 궤멸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당서>는 찬보벽이 “흑치상지와 상의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지만, 찬보벽이 사형당하면서 그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우응양위장군 조회절 모반 사건이 발생하는데 <구당서>에 혹리(酷吏·악독한 관리)로 기록된 주흥이 흑치상지가 여기 가담했다고 무고하면서 흑치상지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신당서> 측천순성무황후(則天順聖武皇后·무측천) 영창(永昌) 원년(689)조는 그해 10월 우무위대장군 흑치상지를 죽였다(殺)라고 기록했다. 사형을 당한 것이다. <구·신당서> 흑치상지 열전과 ‘묘지명’은 스스로 목매 자살했다고 조금 달리 전하고 있다. 10년 후인 699년, 아들 흑치준(俊)은 부친이 누명을 썼음을 밝혀내고 무측천으로부터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을 추증받고 묘소도 귀족 무덤인 북망산으로 이장했다. ‘묘지명’은 “천하가 애통해했고, 해내(海內)가 그의 어짐을 애통해했다… 기리는 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끝맺고 있다.

백제 유장이었다가 백제 부흥군 궤멸에 앞장서고 다시 당나라로 건너가 토번과 돌궐 정벌의 공으로 연국공에 올랐다가 끝내 사형당한 흑치상지. 그에게 국가는, 또 역사는 무슨 의미였을까?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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