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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왕산성과 오국산성 기각지세 이뤄
[장경률의 두만강 따라 천릿길(10)] 두만강변의 가장 유명한 산성
기사입력: 2012/11/20 [10:41] 

▲ 천년의 숨결 높뛰는 한왕산성 © 김승산

천리두만강에서 가장 유명한 산성은 아마도 한왕산성이라 하겠다. 두만강변의 국가급 위생소도시 삼합에서 차를 타고 두만강 물줄기를 따라 최근 들어 새롭게 닦은 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면 굽이굽이 청천을 지나고 조동령을 톱아 오르면 왼켠에 한왕산성이 유표하게 한눈에 안겨 온다. 산앞으로는 두만강이 굽이쳐 흐르는데 현애절벽으로 장식된 산성이 병풍처럼 둘러서고 천부지산이 지척에 소소리 높이 솟아 세인을 매료하는 천혜의 절승이다.

한왕산성은 청나라를 개척한 왕족들의 발원지의 하나로 하여 중국에서 만족의 고향의 하나라는 데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천혜의 전략적 산성, 일명 조동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산봉에 위치한 산성의 둘레길이가 1500여미터, 성벽은 험준한 천험과 수직벼랑위에 0.5미터-5미터에 달하는 돌성벽을 쌓거나 현애적벽을 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성문은 동북켠성벽의 중간과 서남켠의 남문으로서 2개인데 성안에는 타원형의 천연늪과 인공우물이 있고 집터 3개가 아직도 그젯날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력력히 증명하고 있다. 성안에서는 돌구유, 구리숟가락과 밥그릇, 재빛네모난기와 등 많은 력사유물들이 출토되였다. 산성남쪽 두만강변에는 명조때 녀진인들의 무덤이 500여기 매장되여 있다고도 한다.

산성의 동남켠에는 성문이 하나 있다. 여기서 40메터 남짓한 거리에 둘레가 역시 40메터 되는 늪이 고즈넉이 누워있다. 바로 이 물이 있기에 여기가 산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늪에는 무릎을 넘치게 물이 고였는데 메돼지발자욱, 노루발자욱, 등 산짐승들의 무수한 발자욱이 어지럽게 찍혔다. 이름 모를 산새들이 가득 덮혔다가 인기척에 후루륵하고 하늘높이 날아 오른다.

<<한왕산성은 청태조 누르하치가 구축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누르하치의 조상인 멍거테물이 조선의 회령에 살다가 리조 장군 김종서가 북방6진을 평정하면서 추방당한 후 수백명에 달하는 식구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와서 여기에 터를 잡은 것으로 확정하고 있다>>고 원 연변력사학회 비서장 안화춘 선생이 설명하였다.

두만강건너에는 이 산성을 마주하고 조선의 오국산성이 한눈에 안겨왔다. 함경북도 회령(會寧) 서쪽에 있는 고적(古蹟). 일명 오국산성(五國山城), 운두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산성의 축성연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성터에서 출토된 기와조각에 ‘동진국 천왕(東震國 天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 고종7년(1220년) 당시 동진국(금국)의 산성으로 보고 있다. 이 성 안에는 ‘운연(雲淵)’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그 의미는 판독되지 않고 있다. 이 밖에도 성 안에는 3개의 성문터가 있고 옹성 자리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 회령도호부조(會寧都護府條)에 의하면, 험준(險峻)한 성 둘 중의 하나로 회령 서방 35리에 있는 이 성을 들고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부(府)의 서쪽 50리에 석성(石城)이 있어 둘레가 1만 7천 40자이며 성내에 일천 삼정(一川三井)이 있는데 지금은 폐성(廢城)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1760년(영조 36)에 성지(城池)를 수치(修治), 북변의 유명한 진성(鎭城)이 되었다.

이제 연변대학 김관웅교수의 저서 <<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한다(13)>>을 펼쳐 보기로 하자. 그는 <<회령의 오국산성과 “송제지묘”>>라는 문장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 두만강 건너 멀지 않은 곳에 오국산성이 바라 보인다.  © 김승산

운두산성(오국산성이라고도 함)은 조선 함경북도 회령시 성북리의 두만강변에 높이 솟은 운두산의 험한 산세를 리용하여 쌓은 석성으로 둘레는 약 6km이다. 운두산은 두만강에 면한 서쪽과 북쪽이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 역시 산등성이들로 둘러막혀 그안에 아늑한 골짜기가 이루어져있는 성쌓기에 좋은 지형이다. 성벽은 동쪽과 남쪽의 산등성이에 남아있는데 외면축조방법을 기본으로 하면서 량면 축조방법을 배합하여 쌓았다. 성돌은 모두 4각추형태로 다듬은 돌을 썼다. 성벽의 현존 높이는 3―5m이다. 성문은 동, 서, 남, 북 사면에 냈는데 그중 북문만은 북쪽의 절벽을 피하여 동북쪽 골목에 배치하였다. 동문과 남문에는 옹성을 쌓고 서문은 성벽이 안쪽으로 약 50m 휘여든 곳에 배치하여 성문밖의 좌우 성벽이 옹성을 대신케 하였다. 장대는 동, 서, 남, 북 네곳에 배치하였다. 그가운데서 남장대와 동장대는 봉우리우에, 서장대와 북장대는 절벽우에 설치하였다. 성안에서 솟아나는 물은 모두 한데 모여 서쪽 수구문을 통하여 두만강에 흘러들게 되였다. 백두산이 방벽처럼 가로 막아준 두만강류역은 발해시절에 그러했을뿐만아니라 금나라시기에도 가장 안전한 고장이였으므로 휘종, 흠종 같은 요인들을 감금하기 안성맞춤이였을 것이다. 

바로 이 오국산성에 중국고대 송나라의 황제 휘종, 흠종이 갇혀 있었다고 한다. 금나라군에 대패를 당한 송나라는 황제까지 붙잡혀 여기 머나 먼 두만강변의 험요한 요새에 갇혀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때 송 휘종은 처량하기 그지없는 “미안아(媚眼儿)”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한주에서 지었다고 하는 “연산정 • 북행하다가 살구꽃을 보면서(燕山亭 • 北行见杏花)”라는 시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裁剪冰绡              새하얀 비단 마름하여 
打叠数重,           사뿐히 몇겹을 접어서
冷淡胭脂匀注。     가볍게 연지를 골고루 칠한 모양
新样靓妆,           새로운 류행의 화장이라도 했는가
艳溢香融,           한껏 예쁜 자태 향기 감돌고 
羞杀蕊珠宫女。     예주궁의 선녀가 무색하구나
易得凋零,             그렇지만 이 꽃은 시들고야 말겠지
更多少无情风雨。  또 몇번이나 모진 풍우 겪어야 하겠는지.
愁苦。                 아, 이 괴로움!
问院落凄凉,        이 처량한 뜨락엔 
几番春暮。           봄이 몇번이나 지났던가. 
凭寄离恨重重,     겹치고겹친 상실의 서러움 전하고싶지만 
这双燕,              이 한쌍의 제비가 
何曾会人语?        사람의 말을 어찌 알수 있으랴
天遥地远,           멀고먼 하늘 저 멀리
万水千山,           첩첩한 산과 강을 건너서
知他故宫何处?     예전의 궁궐 그 어디에 있는가
怎不思量,           어찌 생각이 나지 않으랴
除梦里有时会去。  깨여서도 몇번이나 가보았건만
无据。                 이제는 의지할데 없구나. 
和梦也新来不做。  어이하여 요즘은 꿈에도 보이질 않느냐. 

화려한 구중궁궐 속에서 천하를 호령하면서 만판호강을 하던 만승지군(万乘之君)이 일조에 쇠고랑을 차고 창검을 쥔 군졸들의 감시를 받는 계하수(阶下囚)가 되였으니 그 락차는 너무나도 컸다. 천길벼랑에서 떨어져내린 사람과 한길 밭두렁우에서 떨어져내린 사람의 상처와 아픔은 비교할 바가 안 되는 법이다. 이 사는 결코 무병신음의 미사려구를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뚝뚝 떨어져내리는 피눈물을 찍어서 쓴 진정(真情)의 발로였던 것이다. 송휘종의 이 사를 보면서 “시연정(诗缘情)”이라는 이 중국 고대시론범주가 참으로 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관웅교수의 상기문장을 보면서 감회가 깊다.

이처럼 두만강동안의 험요하고 유서깊은 오국산성과 이를 마주한 두만강서안의 성자산성, 이 두 산성은 서로 기각지세를 이루고서 사이가 좋을 때는 친선을 도모하면서 공동번영을 이루었을 것이다. 반대로 량안이 서로 반목하고 적대시하였을 때는 자기령역을 굳건히 지키는 철옹성으로 뚜렷한 력사의 한 장을 남겼을 것임을 의심할바 없다.

그 누가 말했던가? 력사는 굴러가는 수뢰바퀴와 같다고. 천여년이 지나면서 두만강서안의 한왕산성 이 지역은 번영, 황페, 봉금지로 되었다가 다시 오늘날 재개발의 서광을 맞고 있다. 해당력사기재에 의하면 광서7년(1881년)에 청조가 실시하던 봉금정책이 페기되면서 이 지역도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정착하여 개척된 고장이다. 개척당시에는 화룡욕에서 통관하는 남강초간국에 속하였다. 일제가 패망한후 명동향, 삼합인민공사부유관리구, 명동인민공사, 부유향으로 여러 번 행정구역이 바뀌다가 얼마전에 다시 삼합진에 합병되면서 그 중심촌이 부유촌으로 이름지어졌다.

부유촌 촌민위원회 주임 리종국(48세)은 현재 부유촌은 4개 자연툰으로 되었는데 345가구에 500여명의 촌민들이 주로 사과배재배를 하고 지척에 있는 천부지산에서 송이버섯채집으로 수입을 올리고있다고 소개하였다. 부유는 모래가 특히 많은 지방이라 봄, 겨울이면 거친 황사가 대지를 뒤덮어 천지간을 분간키 어렵다고 한다. 오죽하면 황사가 몰아치는데 모래불에 말의 발목이 푹푹 빠져 도저히 길을 갈수 없어 부득불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하마래(말에서 내려 걸으라.)라고 이름을 지었겠는가.

리종국주임은 부유의 독특한 자연우세를 빌어 관광산업을 발전시킬 청사진을 이렇게 밝혔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우리는 한왕산성의 력사문화관광자원을 개발하는것으로서 부유촌과 그 지역을 하나의 관광점으로 건설할 타산입니다. 주 정협의 해당 위원들과 성, 주 해당 연구기관의 전문가들로 무어진 전문고찰조가 현지고찰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한왕산성개발과 관련된 력사적고증과 관광산업개발전망에 대한 고찰과 검증은 이미 기본상 완료된 상태입니다. 이제 어떻게 이 력사적유적지를 복구하여 문화력사관광지로 만들며 그 스타트를 어떻게 떼는가하는 과제가 지금부터 풀어나갈것입니다.>>

부유지역은 독특한 자연조건과 지리적우세가 있다. 산 좋고 물 맑고 산천이 수려하고 록음이 우거지여 한여름이 되어도 모기, 파리가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한때 여기는 전국모범위생촌으로 되기도 하였다. 

부유는 기후조건도 아주 좋아 과일재배로는 연변지역에서 최적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사과배는 물론이고 사과, 살구, 오얏, 복숭아 등 갖가지 과일이 모두 생산되여 봄이면 과일꽃이 활짝 웃어주는 꽃동산이다. 여름에 살구부터 나오기 시작하면 오얏, 복숭아, 사과배, 사과가 련이어 출하하면서 그 풍성함으로 세인을 매료한다. 이는 둘도 없는 생태관광체험기지건설에서도 훌륭한 토대로 된다. 이에 촌지도부는 촌민들을 이끌고 사회주의 새 농촌건설템포를 다그쳐 당지 우세를 한껏 살리면서 부유촌의 4개 자연툰에 3개 촌민소조를 자기특색의 무릉도원으로 건설하고 있다.
 

▲ 한왕산성 성안에서 고요히 잠자는 천연늪     © 김승산


▲ 산성 여기저기서 고적의 유물들이 눈길을 끌었다.     © 김승산

 
연길 = 글 : 장경률/ 사진 : 김승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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