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8306

영의정 다섯 번이나 지냈는데 비새는 초가에 살아?
[광명기행 ①] 조선시대 '청백리' 오리 이원익 대감 기리는 충현박물관
14.09.30 10:50 l 최종 업데이트 14.09.30 10:50 l 유혜준(hjyu99)

▲  관감당(觀感堂) ⓒ 유혜준

9월이 닷새밖에 남지 않은 날, 광명시 소하동에 자리한 충현박물관을 찾았다. 여름의 끝이라 그럴까, 녹음은 여전히 푸르렀다. 태양은 가는 여름이 아쉬워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지만,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들은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다. 나무 사이로 서늘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 불었다. 

광명시, 하면 빽빽하게 들어찬 아파트 단지를 먼저 생각할지 모른다. 1981년, 시로 승격된 뒤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된 서울의 위성도시가 바로 광명시이기 때문이다. 서울과 인접하고, 서울로 출·퇴근하기 좋은 입지적 조건 때문에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힌다. 

KTX 광명역사 역세권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서 도시의 브랜드 가치가 높아지고 더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광명시는 도회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기지만, 꼭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니다. 광명시에도 오래된, 그래서 묵은 먼지로 덮인 듯 보이지만 닦으면 닦을수록 반짝이는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광명시 역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단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대감이다. 이 가을, 그에게 주목한 것은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 동안 이원익 대감을 기리는 '오리 문화제'가 광명시 일대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  충현박물관 오리영우(梧里影宇-이원익 사당)에 있는 이원익 대감의 영정 ⓒ 유혜준

올해로 23번째 열린 '오리문화제'는 다섯 차례나 영의정이 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빈하게 살았던 이원익 대감의 삶을 되새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영의정이 어떤 자리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불리면서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자리가 아닌가. 

지금으로 얘기하면 국무총리인데, 다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이가 비바람이 새는 초가에서 끼니를 걱정하면서 산다? 관직에 있으면서 재산을 불릴 기회가 엄청나게 많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 아닌가. 그건 그가 국가가 인정한 '청백리'였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영의정이 된 것은 선조 때였다. 이후 광해군과 인조를 거치면서 그는 다섯 번이나 영의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함락된 평양성을 이여송과 함께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를 폐하는 일을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했던 그는 인조 때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인조가 왕이 된 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돌자 오리 대감은 광해군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리 대감은 광해군 때 자신이 영의정을 지냈으니 광해군을 죽인다면 자신도 관직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해 광해군을 살렸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관직에 연연해 하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오리 대감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오리 대감은 직접 쓴 유서를 통해서 "후손들 간에 우애를 잃지 말고 검소할 것과 자신의 장례 또한 간소하게 치를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런 이의 삶은 당연히 되새기고 오래 기억하고 기리는 게 맞다. 기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본받아야 한다. 돈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곳곳이 썩어 있는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청렴결백'이다. 그런 면에서 오리 대감은 우리가 오래 기억해야 할 분이기도 하다. 

▲  관감당(觀感堂) ⓒ 유혜준

'오리문화제'를 핑계 삼아 충현박물관으로 '오리 이원익'의 흔적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오리 대감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오리 대감의 영정이 눈앞에 오래 어른거린 것은 그의 삶이 남긴 여운이 향기처럼 감돌았기 때문이리라. 

충현박물관은 오리 대감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는 전시실 충현관을 비롯해서 관감당(觀感堂), 오리영우(梧里影宇), 충현서원지, 풍욕대 등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오리 대감의 후손이 기거하고 있는 종택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실과 종택, 관감당, 오리영우 등 건물이 몰려 있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크고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둘러보면 충현박물관에서 오리 대감의 흔적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충현박물관의 역사는 163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관직에서 물러난 오리 대감이 비바람이 새는 초가에서 궁핍하게 사는 것을 알게 된 인조는 오리 대감에게 집을 하사한다. 바로 관감당이다. 관감이라는 옥호는 청백리 오리 대감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껴야 한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  관감당(觀感堂) ⓒ 유혜준

오리 대감이 세상을 떠난 것은 1634년이므로, 그가 관감당에 머문 시간은 고작 4년 남짓이었으리라. 한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관감당 역시 화를 당했다. 병자호란 때 아주 크게 훼손되어 후손들이 중건했다는 것이다. 그 뒤 1916년, 관감당은 옛 집터에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관감당이 오리 대감이 생전에 기거했던 집이라면 오리영우(梧里影宇)는 돌아가신 대감을 기리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리 대감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기 때문이다. 숙종 19년인 1693년에 건립됐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단다. 기단과 초석이 17세기 것으로 보인다니, 아마도 소실된 건물을 중건한 것이 아닌가 싶다.

▲  충현박물관 안에 있는 충현서원지. 서원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다. ⓒ 유혜준

오리영우 뒤로 나가면 '충현서원지'가 나온다. 나무들에 둘러싸인 너른 터에는 비석이 홀로 서서 충현서원이 한 때 존재했던 역사적 사실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충현서원은 이원익 대감의 뜻을 기려 제사를 지내고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평평하면서 잔디가 깔린 바닥에 박힌 몇 개의 돌들이 옛 흔적을 조심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표석만 남은 채 사라졌던 삼상대(三相臺)는 1993년, 오리 대감의 후손들이 복원했다. 풍욕대(風浴臺) 또한 마찬가지로 후손들이 복원한 정자다. 이곳이 전부 예전에 충현서원이 있던 자리라고 하니 충현서원의 규모가 제법 컸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충현서원지와 삼상대, 풍욕대를 둘러보면서 거닐다 보니 도심에서 뚝 떨어진 아주 깊은 산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때문이다. 소나무, 감나무, 향나무 등등이 아주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여름에 이곳에 오면 더위를 한껏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지 않은가.

▲  충현박물관 안에 있는 삼상대 ⓒ 유혜준

특히 400년 묵은 측백나무는 엄청났다. 오리 대감이 올라앉아 가야금을 탔다는 탐금암 바로 옆에 서 있는 측백나무의 수령은 어림잡아 430살이 넘었다. 1982년에 400년이라 해서 보호수로 지정되었고, 30여 년이 흘렀으니 말이다. 이런 나무를 볼 때마다 경이롭기 짝이 없다. 사람은 100년도 못 살고 스러지는 존재이나 나무는 해가 갈수록 뿌리를 더욱더 깊게 내뻗으면서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키고 있으므로.

▲  충현박물관 안에는 산책하기 좋은 길이 있다. ⓒ 유혜준

나무는 무엇을 보고 들으면서 나이를 먹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오리 대감이 탄금암에 올라앉아 가야금을 타고 있는 모습을 기억할까? 오리 대감이 연주한 가야금 음률을 이따금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무는 병자호란에 관감당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관감당이 중건되는 것을 보면서 기쁨에 겨워 나뭇가지를 신 나게 흔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가 말을 할 줄 안다면, 나무가 품고 있는 생각을 토해낼 수 있다면 그런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풀어내겠지?

▲  이원익 대감의 부모 함천군 이억재 내외의 묘 ⓒ 유혜준

충현박물관 안에는 무덤도 있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오리 대감의 묘소와 신도비는 충현박물관에서 뚝 떨어진 곳(광명시 소하동)에 있지만, 그의 부모, 숙부, 형님 묘소가 있다. 아,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오리 대감이 '풍수지리'를 믿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오리 대감은 "사람은 천수(天壽) 있는 것인데 장지 때문에 길흉화복이 바뀌지 않는다"며 후손들에게 "풍수설에 현혹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단다. 

그러면서 오리 대감은 자신이 묻힐 자리를 미리 정해 놓았다. 오리 대감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묘소의 위치가 아니라 남은 후손들이 우애 있게 잘 지내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오리 대감은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라고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이원익 종가 종택 ⓒ 유혜준

오밀조밀하게 잘 꾸며진 박물관 내부를 돌아봤다면 이제는 오리 대감의 영정과 육필을 볼 수 있는 전시관으로 들어갈 차례다. 오리 대감의 영정은 충현박물관 외에도 소수서원과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오리 대감의 유품 외에도 종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기를 포함한 다양한 살림살이들이 전시되어 종가의 살림을 엿볼 수 있다. 충현박물관이 국내에서 유일한 '종가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몇 가지 물품들은 내가 어릴 적에 익숙하게 보던 것이어서 더욱 정감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충현박물관 안에 있는 종택은 1917년에 안채를, 1940년에 문간채를 건립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수리 중이라 대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그래서 문밖에서 안을 살짝 기웃거리기만 했다. 

충현박물관은 1996년, 충현전시관을 개관하면서 시작됐다. 2003년, 박물관으로 새롭게 거듭났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박물관은 이원익 종가의 13대 종부 함금자 관장이 운영하고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까지이며, 겨울(11월~2월)에는 예약해야 관람이 가능하다. 한겨울, 눈이 내릴 때 찾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눈 덮인 충현서원터가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관람요금은 일반은 3500원, 청소년은 2500원이다. 

덧붙이는 글 | 충현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chunghyeon.org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