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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

 

 패왕조산성 평면도그림  패왕조산성 평면도
 
 
 패왕조산성 서벽단면도  패왕조산성 위치도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재원향 패왕조촌 (吉林省 集安市 財源鄉 覇王朝村)

연대

대체로 2~3세기경에 초축하여 후기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경철화는 2001년 탐방 결과를 바탕으로 서기 1세기 초·중기에 축조했다고 파악함.

조사내용
20세기 전반

-『집안현향토지』(1915년)에서는 집안현성 서쪽 220리에 위치한 패왕조의 산 위에 '石城古壘'가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山城子'라고 부른다고 함. 『집안현지』(1931년)에서는 "집안현에서 북쪽으로 180리 거리의 산성구 안의 산령에 석단이 남아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 성문이 하나씩 있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현지주민들은 산성자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축조 시기는 잘 모르겠다"고 기재되어 있음. 패왕조산성이 20세기 전반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1956년 4월 조사 : 길림성문물국 문물조사조(吉林省文化局 文物調査組)

-환인댐 건설 때문에 동북박물관(요녕성박물관의 전신)이 환인 경내의 혼강 유역 수몰지구를 조사할 때 길림성문화국 문물조사조가 長崗유적, 南台유적과 함께 패왕조산성을 조사함. 그 결과, 이때의 조사를 토대로 1961년 4월 20일에 길림성인민위원회가 패왕조산성을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함.
1962년 4월 15일~16일 조사 : 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吉林省博物館 集安考古隊)

-상기 고고대의 왕승례, 이전복, 방기동, 진상위, 길림사범대학 조정용,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소 주함강, 집안현 문물관리소의 임지덕과 조벽인이 참가하여 성곽의 전반적인 제원 및 간략한 지표조사를 하였고 『고고』 1962-11호의 「吉林集安高句麗覇王朝山城」을 발표함.
1983년 5월 30일 조사 : 집안현박물관 문물조사대(集安縣博物館 文物調査隊)

-성곽의 제원과, 성벽 축조상태 확인 및 사진촬영을 하였으며, 『집안현문물지』의 '패왕조산성'을 발표함.
1983년 7월 조사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吉林省文物考古硏究室), 집안현박물관(集安縣博物館)

-길림성문물고고연구실의 방기동 및 집안현박물관의 임지덕, 경철화, 손인걸이 참가하여 집안현 경내 남북 교통로의 계통을 조사하고, 『文物』1984-1의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을 발표함.
2001년 10월 3일 조사 : 학자들의 비공식적인 조사

-통화사범대학 교수 경철화, 길림성 문학예술계연합 당 조직 서기 장복유, 사진가 협회 부서기장 상옥주, 통화시 사학회 고문 손정진, 부회장 고어무 장해무가 참가하여 성곽 내부의 건물유적 조사 및 토기편을 수습하고 사진 촬영을 함. 경철화, 2002「訪高句麗覇王朝山城」 『學問』2002-2 및 경철화, 2004「訪高句麗覇王朝山城」 『高句麗考古硏究』를 발표함.

구조특징

성곽은 산등성이의 자연 지세를 따라 험준하고 가파른 절벽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아 箕(키) 모양을 이룸. 서북 모서리는 바깥쪽으로 뻗어나갔고, 남벽은 안으로 조금 휘어 전체 평면은 사다리꼴을 이룸.

산세가 낮은 곳과 남쪽 골짜기 입구의 평평하고 완만한 곳에는 화강암 성돌로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고, 지세가 낮은 곳일수록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서벽이 잘 보존되어 있음. 서벽 남단과 북벽 동단의 성벽을 높이 축조하였고, 이곳의 성벽은 매우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성가퀴(女墻)와 기둥구멍(柱洞)의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음. 성문은 북문과 남문 등 2개가 있음. 성곽 내부에서 건물지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나무가 꽉 들어차 있기 때문에 유적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상태로 1961년 4월 20일에 길림성인민위원회가 길림성 중점문문보호단위로 지정함. 1962년 조사 당시 건물지를 확인하지 못했고, 1983년 5월 조사 당시 산성 중앙 샘 북쪽의 평탄한 산비탈에서 비교적 큰 돌을 확인했는데 병사 둔지로 추정했으나 구체적인 조사는 하지 않음. 2001년 조사에서 세 개의 건물군이 확인되었으나 측량 장비가 없어 나뭇가지로 측량한 다음 나중에 실측함. 

패왕조산성 구조와 유물 - 동북아역사넷  http://tadream.tistory.com/13314


역사적 의미

石城 유적으로 『集安縣鄉土志』(1931년)에는 “산성 부근 강 연안에도 석성이 있는데, 홍수로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큰 돌만 몇 개 보인다”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集安縣志』(1931년)에는 “성곽이 모래 사장에 매몰되어 그 전에는 큰 돌이 몇 개 노출되어 있었으나 그 뒤(1915년 이후) 현지 주민들이 가옥을 지으면서 채석을 하여 (당시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함. 1962년 조사 당시 현지 주민이 옛날에는 석성 유적이 북둔촌 서쪽의 혼강 강변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미 볼 수 없었다고 함. 고분군은 산성에서 4km 정도 떨어진 천안구촌 일대에 고구려 시기 고분군이 3곳 있으며 모두 70여기 정도됨. 관애는 패왕조산성에서 신개하를 따라 40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望波嶺關隘가 나오는데 이곳은 입지조건상 신개하를 거슬러 올라오던 적군을 방어하던 군사시설로 추정됨.

지정학적으로는 고구려 첫번째 도성이 있었던 환인 오녀산성과 30km 거리이며, 패왕조산성이 위치한 신개하 하구 일대는 환인분지나 부이강 방면에서 혼강 유역을 지나 국내성이 위치했던 집안으로 나가는 교통로의 길목임.

산성의 기능과 성격에 대한 견해를 보면 첫째, 군사방어성설으로 1962년 조사 결과, 거주나 경작에 적합하지 않은 산 위에 위치하였고, 둘레도 1km 남짓 밖에 안된다는 점에서 일상적인 거주지로서의 기능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 다음, 군사적 성격'이 강한 성이었다고 강조함. 국내성이 수도일 때 신개하 하구 일대를 공제하면서 수도원 외곽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 산성의 하나로 망파령관애와 함께 신개하 일대에서 도성 외곽의 弧形방어선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특히 집안 산성자산성, 환인 고검지산성, 신빈 흑구산성 등에 있는 성가퀴 안쪽의 기둥구멍이 이 산성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패왕조산성은 이들과 함께 압록강 중류 일대의 입체적 군사방어 체계를 구성한 것으로 파악됨. 3세기 중엽 제3현토군을 출발하여 소자하·혼강을 거쳐 판차령을 넘어 환도성으로 진입한 魏 관구검을 비롯하여 고구려 국내성을 침공하였던 중국 왕조측 침공군 가운데 상당수는 이 일대를 지나쳤을 것으로 추정됨(방기동, 왕면후, 여호규).

둘째, 위나암성설으로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유리왕은 郊豕가 도망가기에 너무 먼 거리라는 점을 근거로 환인 오녀산성에서 30km 떨어진 패왕조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비정하였고, 더욱이 패왕조산성 일대는 혼강·신개하·부이강의 합류지점으로서 '山水深險'하다는 기록과 합치하며, 패왕조산성은 산봉우리 위에 위치하였고 내부에는 샘(泉水)도 있어 '巖石之地'로서 '泉水'가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파악함(이전복, 손진기, 왕면후, 풍영겸).

셋째, 거주성설으로 2001년 패왕조산성을 탐방했을 때 많은 건물지와 토기편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거주나 경작지에 적합하지 않다는 종전의 인식을 바꾸어, 산비탈을 거주지로 활용하고, 성 바깥의 계곡을 논밭으로 경작했으며, 주변의 혼강과 신개하 일대에는 고기잡이와 사냥이 발달했다고 추정하며, 고구려 시기의 중요한 거주 성곽인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함(경철화).

자연환경

길림성 집안시 소재지 서북 97km, 재원향 패왕조촌 동북쪽 4km에 위치하며, 패왕조촌 동쪽 골짜기를 거슬러 동북으로 약 2.5km 지점에 이르면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협곡이 나타나는데 산성은 이 협곡의 해발 764m(방기동, 경철화/862.8m, 『吉林省志』, 王線厚/기타 765m와 862m 등)인 높은 산에 위치함. 노령산맥의 주맥인 '亮紅頂子'의 서단에 해당하고, 서쪽 30km에 환인 오녀산성이 위치함.

산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동벽과 서벽, 그리고 북벽의 서단은 모두 험준한 절벽임. 산성 내부는 경사가 가파른 산비탈이며, 중앙에 평평한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산성 북사면 아래에는 혼강 지류인 신개하가 북류하여 패왕조촌 앞에서 혼강에 합류함. 북쪽 골짜기를 따라 약 3.5km 내려가면 혼강 연안의 泉眼溝村에 이르고, 또 골짜기 입구를 나와 혼강을 따라 약 4.5km 내려가면 北屯村에 이르는데 북둔촌 앞에서 남류하던 富爾江이 혼강에 합류함. 산성 서쪽의 패왕조촌 앞으로는 혼강 유역에서 신개하 상류를 거슬러 노령산맥을 넘어 집안으로 향하는 도로가 지나가고, 산성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혼강 연안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으며, 혼강과 신개하 연안의 교통로를 공제할 수 있는 요충지임.

유물정보

철제 차관(鐵車輨) 1점, 행엽(杏葉) 1점, 철경동촉(鐵鋌銅鏃) 4점, 철제 띠고리(鐵帶扣) 2점, 토기편 30여 점, 토기 호편 2점, 사이호편 1점, 석제 절구(石臼)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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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吳光國 편, 「地理」 『輯安縣鄉土志』, 1915
· 張拱垣 편, 「古蹟」 『輯安縣志』, 1931
· 方起東, 「吉林輯安高句麗覇王朝山城」 『考古』1962-11, 1962
· 李殿福, 「1962年春季吉林輯安考古調査簡報」 『考古』1962-1, 1962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孫進己, 馮永謙, 『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1988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覇王朝山城」 『吉林省志』43(文物志),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覇王朝山城」 『中國文物地圖集-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 「高句麗考古的回顧與展望」 『遼海文物學刊』1992-2, 1992
· 遲勇, 「高句麗都城的戰略防禦系統」 『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李殿福(차용걸ㆍ김인경 역), 『중국내의 고구려 유적』, 학연문화사, 1994
· 王禹浪, 王宏北, 「中國吉林省集安市高句麗覇王朝山城」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上), 哈爾濱出版社, 1994
· 魏存成, 「城址·建築址」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 『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 『遼海文物學刊』1994-2, 1994
· 余昊奎, 「集安 覇王朝山城」 『高句麗 城』I(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杜宇 編著, 「老嶺山區古道」 『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 秦升陽, 「南北道上的關隘與城堡」 『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楊春吉, 王曉南, 「高句麗疆域調査與硏究現狀」 『高句麗歸屬問題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0
· 王綿厚, 「覇王朝山城」및「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 『高句麗古城硏究』, 北京;文物出版社, 2002
· 耿鐵華, 「訪高句麗覇王朝山城」 『學問』2002-2 : 2004 『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2002
· 魏存成, 「中期都城通往遼河流域的兩條道路與毌丘儉紀功碑」및 「山城的分布」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李樂營, 李淑英 편저, 『中國高句麗學者與硏究綜述』, 吉林文史出版社,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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