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8.htm
"발해유민의 재건운동 : 후발해와 대발해 (渤海遺民의 再建運動 : 後渤海와 大渤海)"글에서 "Ⅳ. 晩期 再建運動(만기 재건운동) - 1. 大延琳(대연림)의 興遼國(흥요국)" 부분을 가져오고 약간 한글로 좀 바꿨습니다.

大延琳(대연림)의 興遼國(흥요국)

거란의 오랜 외정으로 확대된 국경은 군민들에게 그만큼 부담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피정복민인 발해, 堂項(당항), 吐渾(토혼), 奚(해), 室韋(실위) 등은 잦은 정복사업에 참여해야 하는가 하면 동남수만리전선에 수자리를 살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또 상당수가 병기제작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그 생활은 곤약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병합되어 요의 일부민화되었지만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하였다. 비록 정(政)·군(軍) 등 국가통치기구에 참여하고 있어도 역시 그 한계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비록 발해가 타부에 비하여 우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019年(개태:開泰 8年) 오랫동안 끌어오던 麗遼(려료)의 투쟁에서 화해가 모색되고 화평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거란은 지난번 고려와의 전쟁에서 몇번이나 실리를 거두고 돌아 온 쓰라린 경험을 상기시키시면서 고려서북변의 戌兵(술병)을 완전히 철수시키지 못하고 鴨綠江畔(압록강반)의 보주·선주 양진을 남겨 놓았으며 고려 역시 요의 이러한 미지근한 태도를 방관만 할 수 없어서 北鄙(북비)의 接遼國境地帶(접요국경지대)의 동향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어쨌든 가장 큰 문제였던 대고려관계가 정상궤도에 오르자 요는 동요지방에 비로소 刻苦監?之法(각고감국지법)과 關市之征(稅)(관시지정(세))을 시작하였다. 그 시행초에 馮延休(빙연휴), 韓紹勳(한소훈) 등이 좀 심하게 하자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이와 같은 대내적으로 어수선한 기회를 이용하여 東京舍利軍詳穩(동경사리군상온) 大延琳(대정림)이 1029年(티평:太平 9年) 部衆(부중)을 이끌고 거사하였다. 그들은 먼저 東京留守駙馬(동경유수부마)를 蕭孝先(소효선) 과 南陽公主(남양공주)를 가두고, 戶部使 韓 終勳(한종훈), 副使 王嘉(왕가), 四捷軍都指渾使(사첩군도지혼사) 蕭頗得(소파득) 等을 죽였다. 그리고 大延琳(대연림)이 스스로 등위하여 국호를 興遼(흥요)라 하고 天慶(천경)이라 建元(건원)하였다. 그는 곧 관부의 장을 임명하고 주변의 각주현이 모두 내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미구에 남북여진이 모두 대연림에게 내부하였다. 그리하여 한때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그러나 서방의 瀋州(심주)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요정은 대연림이 거사하던 날 밤 부유수 왕도평이 성을 몰래 넘어 도망하여 사변을 고하므로 동경의 변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곧 제도병을 징집하는 한편 우선 가까이 있었던 國舅詳穩 蕭匹敵(국구상온 소필적)에게 本部管轄兵(본부관할병)과 가병(家兵)으로 要害處(요해처)를 방어하고 대연림의 서방진출을 막는 작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또한 渤海太保 夏行美(발해태보하행미)도 군사를 거느리고 보주에서 屯戍(둔수)케 하였다. 이때 대연림이 밀서를 하행미에게 보냈는데 이것을 통수 耶律蒲古(야율포고)에게 알리자 행미 휘하 발해병 800餘名이 포고의 손에 살륙되었다. 대연림은 행미의 배반으로 동로로 나갈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황룡·보주가 모두 내부하지 않음을 알고 서방으로 진출하여 심주를 취하려 하였다. 이때 요정에서 절도사 소왕육과 절도부사 張傑장걸(主張假降주장가항, 退興遼軍以其功퇴흥요군이기공 自瀋州節度副使자심주절도부사 當瀋州節度使당심주절도사)이 대연림에게 항복을 청하므로 연림이 사기를 늦추고 있는데 요군은 그 기간을 이용하여 준비를 완료하였다. 대연림이 속은 줄 알고 공격하였을 때에는 이미 때는 늦었다. 그리하여 끝내 발성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다만 남방에는 남방여진이 모두 추종하고 고려 또한 적대시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였다. 그때 고려는 대연림의 거사를 전해 듣고 조신간에는 요에 대한 설욕의 기회로 보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때 주전론자는 형부상서 곽원이었다. 원은 어전회의석상에서 "鴨綠江東岸契丹保障, 今可乘機取之"("압록강동안거란보장, 금아승기취지")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崔士威(최사위)·徐訥(서눌)·金猛(금맹) 等의 시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반대에 부딪쳐 결국 성공치 못하였다. 최사위 等 신중론자의 변으로는,

兵者危事, 不可不愼, 彼之相攻, 安知非我利耶, 但可修城池, 謹烽燧, 以觀其變耳.

라고 하였다. 국왕도 최사위의 신중론을 따라 관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郭元(곽원)은 끝내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변의 요의 둔수지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그 성내다으로 發疸(발달)이 생겨 죽었다.

延琳(연림)이 瀋州敗退以後(심주패퇴이후) 요의 諸道兵(제도병)이 第次로 도착하자 不得已退師(부득이퇴사)하여 嬰城固守(영성고수)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편 밖으로는 통할 수 있는 곳이 남방의 고려이므로 계속 사신을 보내어 군사원조을 청해 왔다.

그동안 요는 대군이 징발되자 南京留守燕王 蕭孝穆(남경유수연왕 소효목)이 도통이 되어, 國舅詳穩(국구상온) 소필적이 요동으로부터 동경에 도착하였고, 도통 蕭孝穆(소효목)은 전군에 하령하여 東京城四面(동경성사면)에 各各 5里밖에 성보를 쌓고 포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연림의 군대가 대단히 두려웠던 존재였던지 駙馬延寧(부마연령)은 출정하였으나 그 妹(누이)와 같이 혈지에 숨어 버리고 오직 공주 최팔만이 뒤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동경성 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그해 8月에 가서야 사면초가인 동경성내에서 요군에 밀통하는 자가 생겨났다. 즉 장군 楊詳世(양상세)가 몰래 요군과 통하고 그날 밤 남문을 열고 대연림을 잡아 바쳤다. 이로써 대연림이 반요부국을 꾀한지 1年餘만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비록 대연림이 高왕의 후예이긴 하였으나 전발해왕국을 부흥한다는 생각보다는 발해인중심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성격이 더 짙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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