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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국내성 

  
집안의 국내성 위치도 *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위성사진으로 본 고구려 국내성 *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고구려는 유리왕 22년(A.D. 3)에 졸본에서 국내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축조했다고 한다. 반면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공손씨의 침공으로 도성이 파괴되자 산상왕이 “새로운 도성을 건설했다[便作新國]”고 한다. 이에 우리나라나 중국학자들이 『삼국사기』를 근거로 국내천도 시기를 유리왕대로 보는 반면, 일본학자들은 산상왕대인 2세기 말경으로 파악하면서 산상왕 이전의 고구려 왕계나 사료까지 후대에 꾸며진 것이라며 불신한다. 

그런데 고구려는 첫 번째 도성인 졸본에서 이미 평지거점과 군사방어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계를 구축했다. 산상왕이 축조한 성곽은 국내 도성 전체가 아니라, 군사방어성이 환도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산상왕의 도성 건설은 공손씨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국내지역의 평상시 거점에서 새로운 군사방어성으로 거처를 옮긴 것을 가리킨다. 산상왕대 천도설은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다만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는 윤색된 부분이 많으므로 유리왕대 천도설을 그대로 신빙하기는 어렵다. 제반 상황을 종합하면 국내천도는 국가체제를 확립하던 1세기 중후반에 단행되었다고 생각된다. 천도 배경으로는 국내지역이 제2현도군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군사방어상 유리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이와 더불어 국내지역이 당시 고구려가 배후기지를 건설하려던 동해안 방면과 가깝고, 압록강 중상류 전체를 아우르는 수로망의 중심지라는 점도 고려되었다. 

국내 천도 초기 도성의 구체적인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늦어도 3세기 중반에는 통구분지의 국내성지와 산성자산성[환도산성]으로 이루어진 도성체계를 확립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이 무렵 각지의 유력 세력이 중앙귀족으로 전환하면서 도성의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라 거주구역이 국내서 외곽으로 확장되고, 고분 조영도 급격히 늘어났다. 대규모 인구를 갖춘 도시로 발전한 것인데, 국내성지 외곽의 건물지나 주변의 무수한 적석묘는 이를 잘 증명해준다. 

427년 평양천도에 따라 국내성은 또 다시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고구려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라는 위상을 상실한 것이다. 그렇지만 평양천도 이후에도 국내성은 별도로서 도성인 평양성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럈던 것 같다. 최근 발굴된 환도산성의 궁전터가 6세기에도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나 5회분과 같은 왕릉급 초대형 벽화고분이 6~7세기에도 집안지역에 조영되었던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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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 일대의 위성사진
(CORONA위성 1964)
통구분지(집안시) 일대의
고구려 유적 분포
환도산성 남문터 부근



위성로 본 산성자산성(환도산성) 만포시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통구분지(1935년)
국내성 서남벽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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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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