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adada.tistory.com/354#<17> 제3부 가야인의 삶 ⑥토속신앙

가야가 살아온다 <17> 제3부 가야인의 삶 ⑥ 토속신앙
국제신문

부뚜막에 웬 귀신

한반도 동남부의 고대인, 특히 가야인들은 ‘부뚜막에 귀신이 있다’는 독특한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현대의 주거공간에서는 부뚜막을 찾기 어렵지만 먼 옛날부터 부뚜막은 요긴한 삶의 공간이었다. 음식물을 조리하고, 부엌에 온기를 가져다주며, 방까지 데워주는 부뚜막의 다기능은 고대인들에게 신앙으로 인식됐을 수 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부뚜막에 불이 꺼지는 것을 집안의 망조쯤으로 받아들인 듯한데, 이를 증명하는 유적들이 지난 80년대 이후 잇따라 발굴됐다. 경남 김해의 부원동, 합천 저포리, 진주 대야리 등 가야지역 유적에서 조사된 부뚜막이 있는 집자리는 전기가야에 이른바 부뚜막 신앙(조왕신앙)이 성행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 교수는 “부뚜막 문화는 기원전 108년 한(漢)에 의해 멸망한 고조선의 유민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철기문화와 함께 남쪽으로 전파됐으며, 가야지역에는 기원전후 처음 부뚜막 유적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삼국지’ 변진조에는 ‘가야사람들은 귀신을 섬기는데 차이가 있고, 부뚜막은 반드시 집의 서쪽에 만든다’하는 대목이 있어 문헌상으로도 부뚜막 신앙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삼국지’의 기록은 서기 3세기 후반이고 김해 부원동 주거지 등은 1~2세기로 추정돼 시기적으로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학계의 연구결과 전기 가야인들은 절기에 따라 부뚜막에 대한 제의를 가졌으며 폐기할 때도 특별한 의례를 행했다. 가야의 부뚜막 신앙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에도 전파돼 현지에서도 신앙으로 숭배됐다.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

가야인들은 부뚜막 외에도 다양한 민간 신앙과 믿음을 갖고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 불교가 5세기 중반에 수용됐다고 보면 불교 이전의 여러가지 신앙이 가야인들의 생활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먼저 토속신앙의 존재를 주목한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어산불영조에는 수로왕이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나찰녀(羅刹女)’와 ‘독룡(毒龍)’을 주술로 제압했다는 대목이 있다. 후대에 불교적으로 윤색된 것이긴 하지만 이를 달리 해석하면 불교 이전의 토속신앙의 단면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의 토속신앙은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 그 편린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샤머니즘이다.

가락국과 대가야의 건국신화에 보이는 구지봉과 가야산, 소도의 대목(大木)은 지상의 샤먼이 행하는 제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변진과 전기가야에서 큰 새의 깃털을 매장하던 풍습이나 가야고분에서 나온 압형(鴨形)토기, 마골(馬骨), 주형(舟形)토기 등은 새, 말, 배를 상징한다. 이는 샤먼이 저 세상을 여행하는 수단으로 당시에 샤머니즘이 성행했음을 암시한다.

물, 동물, 새도 숭배

물과 우물을 신성시하는 정천(井泉)신앙도 주목된다. 물에 부정을 씻어 주는 힘이 있다고 믿고 행했던 가락국의 계욕제와 가락국 이전 구간사회에서 우물을 파서 마셨다는 기록 등은 정천신앙의 단면이라는 것.

후대의 전승이긴 하나 대가야에는 왕을 위한 특별한 우물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군 연혁조에는 왕궁 옆에 어정(御井)이 있어 왕의 생명력을 보장하고 통치력을 쇄신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해 예안리 유적에서는 ‘井’ 또는 ‘井勿’자를 긁어 새긴 명문토기가 있는데, 이 역시 정천신앙의 요소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진주 남강의 귀동 고분군에서도 6세기 중엽 대가야식 토기의 뚜껑 안에 ‘井’이라 쓰인 글자가 조사됐다.

모든 동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동물신앙’도 유행했다. 김해의 대성동, 구지로, 양동 고분군 등에서 나온 호형대구(虎形帶鉤)와 마형대구(馬形帶鉤) 등은 지배층이 힘의 상징으로 이들 동물을 숭배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지가에 등장하는 거북,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의 거북형태 미니어처, 창원 성산패총과 사천 늑도유적에서 나온 사슴뼈 등은 이들 동물이 힘과 다산의 상징으로 인식됐음을 보여준다. 동물뼈를 이용한 복골(卜骨·점치는 뼈)도 유행했다.

함안 도항리 고분에서 나온 여러 마리 새가 달린 미늘쇠는 해신 산신 천신과 인간세계를 연결해주는 메신저로 새가 숭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늑도 유적에서 개가 사람과 함께 매장된 사례는 가야인들이 개를 영혼이 있는 동물로 인식한 증거다.

가야에는 이밖에도 두개골 성형의 풍습(편두), 파형동기, 통형동기, 청동제 정(鼎)과 같은 의기(儀器), 판상철부 철정 등 벽사로서의 철기의 부장, 샤먼과 철에 관한 바이칼 연안의 민속지적 자료, 고분 부장품의 배열상과 출토위치, 각종 제사유적 등 당대인들의 토속신앙 자취를 보여주는 유적이 부지기수다.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가야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것은 향후 과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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