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vadada.tistory.com/354 ,  http://bit.ly/1oHYbSt

가야가 살아온다 <25>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① 고대 일본의 빛
가야의 '부뚜막신앙' 오사카에 오롯이

국제신문 

지난 2월 24일 오후 1시께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일본 후쿠오카시 하카다(博多)역 식당가의 한 음식점.

‘ヒビソバ’(비빔바·950엔)와 ‘チヂミ’(찌지미·480엔)라는 메뉴가 벽에 붙어 있었다. 한국의 비빔밥과 전이었다. 비빔밥은 내용물과 맛이 한국에서 먹는 그대로였다. ‘漢風’(한풍)이라는 식당 이름. 주인 시바타(58)씨는 ‘간후’라 발음되는 漢風에 대해 “대륙 즉 한반도에서 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시바타씨는 “우리 식당에서 비빔밥이 가장 많이 팔린다. 원래 한국과 일본은 국경이 없었던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다음날 오후 후쿠오카시 박물관 학예실. 미야 요시로(40) 학예사는 “맞는 말이다. 7천~8천년전의 유적인 부산 영도구 동삼동패총에서 일본에서 생산된 흑요석과 전기 조몽토기 등이 발견된다. 후쿠오카의 도도로키패총과 나가사키 시라하마유적 등에서도 부산과 김해 등지에서 생산된 융기문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웃처럼 넘나듦이 자유로웠다”고 말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가야지역과 일본열도가 관계를 가지는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취재에 동행한 부경대 이근우(사학과) 교수는 “일본에 벼농사와 청동기문화가 전파되는 기원전 4세기께부터 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원전 3세기 유적인 규슈 이타즈케(板付)에서 일본 최초의 벼농사를 시작한 농경취락지가 발견돼 후쿠오카 박물관에 그 모형이 전시돼 있다. 물론 한반도 남부에서 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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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가야인들은 일본으로 집단이주하면서 당시 그들이 사용하던 행정단위인 고을(郡.고리)이라는 명칭도 가져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실을 증명하는 듯한 것이 나라현의 지명이자 지하철 역명인 고리야마(郡山)다.


부산대 신경철(고고학) 교수는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는 김해를 위시한 남부지방 주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갔지만 일본에서도 일정한 사람들이 남부지방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한반도 남해안에서 많이 발견되는 일본의 야요이토기다.

야마토 정권 이전까지 김해지역 등 한반도 남부와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민간차원의 교류가 지속됐다는 게 한·일 양국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후쿠오카시 매장문화재센터 구수미 다케오(33) 연구원은 “3세기 중엽 토기를 대량생산한 후쿠오카시 니시진마치(西新町) 유적에서 상당량의 가야계 토기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볼 때 그 시기에도 가야계 도공들이 많이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인들이 일본역사의 획을 그으면서 집단이주한 시기는 5세기 초엽 무렵과 6세기 중엽으로 잡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광개토대왕의 남정으로 백제·왜·가야세력과 고구려·신라세력의 충돌로 인한 정치·사회적 혼란과 금관가야(532년)·대가야(562년)의 멸망이 그 요인이었다.

2월 27일 밤 10시께 교토역 인근의 한 식당에서 만난 도쿠시마대학 사다모리 히데오(50) 교수는 “가야인들의 이주 루트는 후쿠오카에서 오사카 바다에 이르는 세토우치 지역을 거쳐 점차 기나이(畿內) 지역과 동북지역으로 옮겼다”고 설명했다. 사다모리 교수의 말대로 규슈와 오카야마, 기비, 오사카, 나라 등 곳곳에는 가야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10살된 딸 이름을 ‘가야’로 지은 그는 또 “사카이 아래 지역인 기시와다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와 부산 동래구 복천동 31호분에서 발견된 토기는 같은 시기(5세기 전반)의 것으로 모양과 만든 형식이 똑같아 동일 도공이 제작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라고 밝혔다.

기시와다 유적에서 7.5㎞ 떨어진 오바데라(大庭寺) 인근에서는 김해가야 도공들이 그 주인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마터 1천여기가 발견돼 가야인들의 이주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기록돼 있듯이 김해지역에서 생산된 철(철원료 철제품 철기제작술)이 일본으로 전해져 야마토 정권, 즉 일본 고대국가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일 역사학자들이 서로 인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국내의 혼란상황과 야마토정권의 필요에 의해 일본에 건너간 토기와 직물, 토목, 농사, 축성 등 다방면의 기술자들이 오사카에서 이코마(生駒)를 중심으로 한 지역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고대 김해가야인들이 가족들의 생존을 관장하는 신이 깃든 것으로 인식한 부뚜막형 토기. 지카츠아스카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나라의 ‘고리야마’(郡山) 라는 지명에서 보듯 가야 등 남부지방에서 사용하던 ‘고리’(고을)와 ‘무라’(촌) 등 행정단위와 제도도 그대로 넘어가 일본 국가제도의 기틀을 세웠다. 또 일본의 조리문화에 큰 기여를 한 시루와 부뚜막, 난방시설인 구들과 흙벽도 전래됐다. 게다가 가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가와치(河內)씨와 기비(吉備)씨는 왜의 사신으로 다시 가야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편 문물의 배경에는 정신과 신앙이 바탕이 된 인적교류가 있었다.

지난 2월 27일 낮 12시께 오사카 남부 가와치에 있는 지카츠아스카 박물관. 마침 가야를 중심으로 한 도래계 유물 특별전(1월21~3월16일)이 열리고 있었다. 관 파편과 신발 파편, 가야인들이 만든 스에키 토기와 김해 가야식토기, 여인들이 쓰던 머리핀 등이 전시돼 있었다.

그중 기자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유물이 전시장 끝에서 발견됐다. 부뚜막형 토기였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변진조에 ‘가야인들은 부엌을 집의 서쪽에 두는 신앙 및 풍습을 가졌다’고 기록돼 있다.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이러한 습속의 실재는 김해 부원동 유적에서 확인된다”고 말했다. 

즉 고대인들의 종교였던 불교가 정착되기 전 김해가야인들의 정신을 지배했던 ‘부뚜막신앙’이 현 오사카 남부 일대에 그들이 정착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가야인들에게 부뚜막은 집안의 온기를 유지해줄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을 이어주는 밥을 짓는 곳, 즉 가족의 생존을 관장하는 신이 머무는 곳으로 인식됐다고 한다.

이 부뚜막토기는 이주한 가야인들이 살았던 지역의 고분에서는 어김없이 부장품으로 출토될 만큼 가야인들의 삶속에 정신적인 신앙으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가야인들의 공동체적인 끈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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