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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26>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② 日 기비지역의 가야인들
국제신문 입력: 2003.04.17 20:43  조해훈기자 massjo@kookje.co.kr  

가야식 산성으로 알려진 기노죠성. 각루가 있고 돌 쌓인 사이에 나무기둥이 독특하며 이러한 축조양식을 분석,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인의 기술이라고 해석한다.

즈쿠리야마 고분과 가야인들

지난 2월 26일 오후 취재진은 가야인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던 곳의 하나인 오카야마현 기비(吉備)지역을 찾았다. 소자역에서 택시를 타고 10분쯤 산요도로를 타고 가니 즈쿠리야마(造山) 고분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 지역이 어떤 곳인가. 1천6백년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 등으로 인한 혼란의 상태를 피하고자 두려움을 안고 나라를 떠난 가야인들이 정착한 땅이다.

일본학자들은 기비지역은 463년 이 지역호족들이 야마토 정권과 싸워 패배하기전까지 철기를 바탕으로 60여년간 일본전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있었던 지역이라 주장하며 그러한 것을 증빙하는 자료로 현지의 고분을 든다. 이 고분을 중심으로 기비세력이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즈쿠리야마 고분은 기비시기인 5세기초에 조성됐으며 일본에서 네번째로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으로 길이가 360m나 된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트였다. 이 사방 시야가 닿는 곳에는 전부 가야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것은 발굴된 5, 6세기의 수많은 유적이 웅변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이날 만난 오카야마 리카대학 가메다 슈우이치(50) 교수는 ‘철과 도래인’ 주제의 논문에서 ‘발굴이 되지 않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즈쿠리야마 고분은 분명 가야인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인제대 이영식(사학과) 교수는 “‘국조본기’를 참조하면 기비지역에 가야계인 가야쿠니노미야즈코와 아나쿠니노미야즈코 씨족이 있었으며 이들이 8세기까지 이 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가메다 교수는 뜻밖의 주장을 조심스레 펼쳤다. “고구려와의 전쟁에 왜가 참가했는데 당시의 전쟁에서 주로 활약한 왜의 주체는 기비지역의 호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그러니까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왜란 다름아닌 기비지역의 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만큼 기비세력이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부산대 신경철(사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한국 학계에서는 비문에 있는 왜의 주체를 기타큐슈나 기나이(畿內)세력으로 본다”고 말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2세기말~3세기초에 규슈와 기비, 야마토지역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경대 이근우(사학과)교수는 “당시 야마토의 히미코 여왕이 240~250년에 후쿠오카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체크했다는 것으로 봐서 이 시기가 되면 아먀토와 기비 2대 중심세력권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야마토정권에 패했지만 476년 기비지역의 호족세력이 난을 일으키자 유라쿠 천황이 70명을 죽였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와있다. 이 사건 이후 기비지역에서는 전방후원분을 크게 쓰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 기원전 1천년에 이미 한반도 토기가 출토되는 등 한반도와 교류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 고분을 중심으로 가야인들이 살았던 주거지와 일터, 즉 철을 생산했던 공방과 무덤이 곳곳에 있다. 이를테면 이 고분의 뒤쪽에 5세기초인 구보키 야쿠시(窪木藥師) 유적이 있다. 기비 지역에서 처음으로 가야인에 의해 철이 생산된 곳으로 알려진 이 유적은 철을 만들던 공방으로 철정(덩이쇠)과 철작업 후 남은 찌꺼기, 그리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 21·22호분에서 나온 철촉과 유사한 철촉 등이 출토됐다. 또한 이 시기 일본에는 없었던 시루와 부엌도 나왔다.

여기서 1㎞ 정도 떨어진 다카즈카(高塚)유적은 이 공방에서 일했던 가야인들의 주거지로 추정되며 부엌 시루 등의 시설이 많이 조사됐다. 즈쿠리야마 고분과 구보키 야쿠시 유적의 중간쯤인 호래(法蓮)유적은 이들의 사후 거주지였던 무덤이었다. 즉 이 지역에 이주해 살았던 가야인들의 주거지와 일터, 무덤이 세트로 인근에 많이 형성돼 있었던 셈이다.

또 즈쿠리야마 고분 바로 인근인 사카키야마 고분은 고위직 가야인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카즈카 유적 뒤 즈이앙(隨鹿)고분에서 일본에서는 5곳 밖에 없는 단야세트가 나오며 수혈식석실분으로 원통형 목관을 가야식 꺽쇠로 고정하고 있다. 이처럼 이곳에서 7세기 후반까지 200년간의 단야관계 유구가 확인되며 기비의 호족들은 이처럼 가야인들의 철을 기반으로 해 강력한 세력을 키웠다.

가야식 산성 기노죠성

취재진은 즈쿠리야마에서 나와 가야식 산성으로 불리는 기노죠성으로 향했다. 60대의 택시 기사는 기골이 크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으로 봐 가야인의 후손이 아닐까라는 막연한 호기심까지 발동했다.

산성입구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성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는 둥글게 쌓여있는데 일정부분이 튀어나와 있고 나무기둥을 중간중간에 박아 놓은 것이 특이했다. 보통 치(稚)라고 부르는 각루(角樓)였다. 당시 일본에는 이러한 축조방법이 없었다. 

7세기 중엽으로 파악되는 이 산성은 5, 6세기대 기비지역에 왔던 가야인들 또는 그 후손들이 만들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이영식 교수는 “이 산성은 입지조건이나 축조방식이 김해의 분산성과 경북 고령의 주산성과 흡사한 테뫼식으로 여기에 관련돼 전해지는 우라(溫羅)전승이 가락국의 수로왕과 신라의 탈해왕이 서로 변신하면서 다투던 내용과 아주 닮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지역에 이주한 가야인들이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방위하던 상징이라는 것이다.

남문 북문 동문 서문이 있으며 특히 이 산성의 곳곳에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배수구가 잘 발달돼 있다. 이 곳에서 보면 즈쿠리야마를 비롯한 오카야마 시가지가 다 보인다.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씨는 1960년대 임나분국을 주장했다. 즉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기노죠성을 중심으로 한 기비지역에 건너간 가야인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한낮에 기노죠성을 둘러보는 취재진은 마치 부산과 김해를 내려다보며 금정산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일본 오카야마 글·사진 = 조해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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