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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살아온다 <27> 제5부 동북아속의 가야 ③日 야마토 정권의 가야인들
국제신문 입력: 2003.04.24 19:44  조해훈기자 massjo@kookje.co.kr 
 

취재에 동행한 부경대 이근우 교수가 이치스카 고분군에 있는 한 무덤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 무덤 가운데 있는 석실은 방문객들을 위해 발굴당시의 모습으로 놓여있는 것이며 일본화가 많이 진행돼 있다.

오사카 가와치 지역

지난 2월 27일 오전 취재진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인 오사카 남부 가와치군에 위치한 지카츠아스카 박물관에 들렀다가 오후에 박물관 옆길을 따라 이치스카 고분군을 찾았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치스카 고분군에서는 금관 파편뿐만 아니라 금칠 신발과 초기 스에키토기 등 한반도 가야 관련 유물이 수없이 나왔다. 이치스카 고분군 지역은 가야인들에 의한 일본 최초의 스에키 생산지역”이라고 가야와의 관계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박물관측은 또 이치스카 고분군의 관파편과 금칠 신발 등의 주인공은 5세기 무렵 한반도내 정세 탓으로 가야인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넘어온 가야계의 최고 지배자급의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니까 가야인들은 4세기말부터 6세기까지 오카야마 기비지역과 시가켄 오오츠와 쿠사츠, 나라 아스카지역 등에도 건너왔지만 가장 집단적이고 조직을 갖춘 체제로 넘어온 곳은 역시 당시 야마토 정권이 있었던 오사카 가와치 지역이었다. 

가야인들이 가와치 지역에 집단 이주한 이유는 아무래도 야마토 정권의 필요와 가야인들의 어쩔 수 없는 상황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치스카 고분 인근은 갑주와 마구 등을 제작하던 제철유적은 물론이고 스에키토기 등을 만든 도요지가 특히 많다. 이를 반증하는 것으로 이 인근에 스에키기타(陶器北)라는 지명이 있으며 오바데라를 포함한 스에무라(오사카와 이치스카 사이에 위치한 지역)엔 가야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수의 가마터가 발견됐다. 이들 지역은 가야인들의 일터였다. 이치스카 고분군에서 3㎞ 거리의 카시바시에는 가야인들의 생활유적이 있다. 즉 가야인들은 천황이 살았던 지역에 생활지와 일터, 그리고 사후세상인 고분군을 갖추고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했을 것으로 고대사학자들은 추측한다.


미쿠니가오카 전철역 광장에서 바라본 닌토쿠 (仁德)릉 고분이 건물과 주택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일본에서 가장큰 전방후원분으로 당시 외래인들이 야마토정권 지역으로 들어오던 관문에 위치해 있다.

부경대 이근우(사학과) 교수는 “야마토 지역에 건너온 가야인들은 매우 집단적이었으며 이들은 자체 지배조직을 갖고 있었고 가야지역에서 사용하던 행정단위도 그대로 옮겨올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치스카 고분군은 반경 1.5㎞ 29㏊에 걸쳐 광범위하게 자리해 있다. 현재 발굴된 고분만 250기(6세기초~7세기초 조성)로 이중 99%가 횡혈식석실묘로 한 묘에 2,3명의 가족이 매장돼 있었다.

간바야시 시로(47) 지카츠아스카 박물관 주임 학예원은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주한 가야인들 1세대나 그 자손들로 보인다”고 말할 만큼 당시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는 가야인들의 땅이었다.

가와치의 가야인들에 대한 보충취재를 위해 이날 해거름 무렵 가와치의 동북쪽인 시가현 구사츠 지역 아즈치 박물관을 방문했다. 이 박물관 오하시 노부야(56) 학예관은 “이치스카 고분군에서 오사카쪽으로 몇㎞ 떨어진 구로히메야마(黑姬山·길이 160m) 고분에서 나온 갑주유물 중 특히 핀으로 갑주를 고정시킨 것이 있는데 이는 틀림없는 가야계”라며 “보통 갑주는 검은데 왕이 입는 건 금이 칠해져 있다. 쇠의 표면에 금도금하는 기술은 당시 일본에 없었다. 이러한 작업을 한 주인공 역시 가야인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오사카만에 인접, 길이 486m로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방후원분인 닌토쿠(仁德·또는 大仙)릉 고분에서는 부산 복천동 갑주와 동일한 5세기 갑주가 발견됐다. 미쿠니가오카 전철역 맞은 편에 건물과 집에 둘러싸여 온갖 소음에 시달리며 동산으로 변한 닌토쿠릉 고분을 마주한 취재진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한때는 무덤만큼이나 큰 권력으로 오사카만을 바라보며 야마토지역에 오는 외래인들에게 위엄을 나타냈을 것이다. 5세기 초 야마토지역에 가야인들을 이렇게 대규모로 불러들이고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닌토쿠왕이었다. 지난 96년 지카츠 아스카 박물관은 도굴된 닌토쿠릉 고분 유물을 모아 특별전을 개최했지만 이 고분의 주인공이 닌토쿠왕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또 구로히메야마 고분의 피장자가 가야인들의 최고 지배자 신분이었을 것이라는 게 현재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두 고분에서 나온 갑주와 마구 칼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지난 4세기대 전방후원분의 동경과 옥 등에서 보이는 주술적인 성격에서처럼 철제의 무기로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탄 무사 캐릭터의 군사적인 이미지로 급변했다는 것이다. 즉 가야인들의 제철기술 등에 의해 무력적인 강력한 왕권이 형성됐고 가야인들의 행정조직을 바탕으로 야마토 정권의 행정력이 체계를 갖춘 것이다. 또한 이치스카고분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바데라 등지에서 가야인들에 의해 생산된 스에키토기가 왕권을 상징하는 부장품으로 매납된 사실도 일본 고대국가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하시 학예관은 또 “당시로서는 신분이 높거나 특정 기술력을 가진 가야인들은 가와치지역으로 이주를 했고 그 보다 하급계층의 가야인들은 그 주변지역인 오오츠와 쿠사츠 지역 등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추정한다”며 “당시 가와치 지역은 왜의 중심지였다”고 덧붙였다.

2월 나라 카시하라 고고학연구소에서 만난 반 야스시(41)학예사는 “나라지역은 전성기인 4세기 이후에도 가와치 지역의 변방으로 가야인들의 이주가 계속됐다. 이는 ‘일본서기’에도 가츠라기 지역의 가야인들 관련 기록이 있듯이 고세시 난고유적과 니아자와 센즈카 유적에서 나온 갑주와 토기 등을 비롯, 5세기 초반인 미야야마(宮山) 고분군 소츠히코 추정 무덤에서 김해형 배모양의 도질토기가 발견된 것으로도 증명된다”고 말했다.

5, 6세기 고구려의 남진 등으로 나라를 등질 수밖에 없었던 가야인들이 매화꽃 하얀 이치스카 고분군의 햇살 속에 당시 모습으로 살아나 이곳을 처음 밟은 취재진에게 말을 거는 듯 했다.

“아! 1천6백년전 한치앞을 가늠할 수 없었던 그 혼란스런 시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으로 와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당신들의 그 얄팍한 역사의 눈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 일본 가와치 / 글·사진=조해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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