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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가 살아온다 <29> 제5부 동북아 속의 가야 ⑤가야와 광개토대왕 '광개토왕 南征 가야에 큰 타격'
국제신문 입력: 2003.05.08 19:55 박창희기자  chpark@kookje.co.kr  

지안 (集安) 시내에 있는 국내성. 남아 있는 일부 성벽이 아파트 화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4~5세기는 광개토대왕의 시대였다. 대왕의 기마군단은 당시 만주벌을 지나 따싱안링(大興安嶺) 산맥을 넘어 동몽골초원(중국 내몽고자치주)까지 나아갔고, 중원과 만주의 경계인 랴오허(遼河)의 서쪽, 만리장성 인근까지 뻗쳐 있었다. 지금의 한반도보다 더 넓은 땅이다.

지난달 23일 취재진은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에서 출발해 고구려 옛 왕도였던 지안(集安)까지 달렸다. 이른바 고구려 북쪽길(北路)이다. 거리로는 약 400㎞. ‘광개토경(廣開土境)’을 밟아보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렸다.

고구려의 바탕색

광활한 평원과 아득한 구릉지대에 난 길을 달리고 달려 닿은 곳이 퉁화(通化). 창춘과 지안의 중간쯤되는 인구 2백20만명의 유서깊은 도시다.

“퉁화는 고구려의 목에 해당합니다. 나아가고 들어갈 때 반드시 거치게 되지요. 그래선지 주변에 고구려 산성이 많습니다.” 창춘의 동북아역사문화연구소 이종수(36) 소장의 설명이다.



퉁화에 닿기 전, 취재진은 고구려 산성 한곳을 찾아갔다. 유하(柳河) 부근의 나통산성(羅通山城)이란 곳이었다. 해발 960m 나통산 정상 일대에 구축된 이 성은 둘레가 7.5㎞에 달하는 고구려 최대 산성이다.

남문의 ‘회마령(廻馬嶺)’에 오른 취재진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득한 시선 저편에 펼쳐진 장쾌한 경관. 깎아지른 절벽 위에 쌓은 철벽 요새는 당당하고도 아름다웠다. “아,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바탕색이구나!”

한시절 피비린내를 풍겼을 산성의 돌틈새엔 붉은 진달래가 피고 있었다. 산성 너머에서 고분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병사라도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취재진은 역사기록에 나오는 고구려 북쪽길을 따라가며 가야를 찾기에 앞서 고구려에 흠뻑 취해 있었다.

고구려와 가야의 만남

지안의 광개토대왕 비를 찾은 것은 다음날 오전 9시께. 현지 안내원은 “높이가 6m39㎝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비문 네 면에 1천7백여자가 적혀 있다”고 소개했다.

근세에 와서 광개토대왕 비는 제국주의의 발톱을 숨긴 일본에 의해 ‘임나일본부설’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사료가치를 갖는다. 중국땅에 남겨진 아쉬움이 있지만, 이 비석은 한국인의 의식기저에 불멸의 표식으로 곧추서 있다.

비문에는 고구려와 가야의 첫 만남을 알려주는 단서가 있다. 비문의 제2면 영락십년경자년조(永樂十年庚子年땥), 즉 서기 400년 기사에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수수께끼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기사는 고구려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성의 왜적을 쫓아내고, 임나가라 종발성(從拔城)까지 추격해 귀복시킨 것으로 돼 있다.

‘임나가라’에 대해서는 김해설(김태식, 신경철)과 고령설(주보돈, 이영식), ‘김해+고령설’(이도학)등이 제기되고 있으나, 지금까지는 김해설이 가장 유력하다.

홍익대 김태식(역사교육) 교수는 “광개토대왕 남정은 임나가라에 큰 타격을 입혀 금관가야 멸망의 원인이 된다. 이는 곧 전기가야 연맹의 해체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지안(集安)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고구려와 가야의 첫 만남을 알려주는 소중한사료다.

광개토대왕 남정이 가야와 신라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학계의 통설이다. 4세기 무렵에 가야적인 색채를 내면서 발전하던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창원 도계동 등의 고분에서 5세기 이후 고분 규모가 작아지고 신라계열의 토기가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신라의 득세현상을 말해준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호, 11호분에서 출토된 갑주류·마구류 등을 고구려 계통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풀리지 않는 ‘역사퍼즐’

비문에 세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도 풀어야 할 과제. 가야사 해명의 열쇠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종전의 통념은 안라, 즉 아라가야(함안)의 수병으로 보는 것이었으나, 1980년초에 중국학자 왕건군(王健群·작고)이 ‘나인(羅人)’을 신라인으로, 안(安)을 ‘두다, 배치하다’로 해석하는 새로운 설을 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내 학계에서 ‘왕건군설’을 지지하는 학자도 적지않다.

지난달 중순 개최된 김해시 주최 가야사 학술회의에서는 ‘나인’을 고구려인(백승옥), 또는 임나가라인(이도학)으로 보는 새로운 설도 제기됐다.

이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신중하다. 광개토대왕 비의 탁본을 연구해온 중국 사회과학원 서건신(徐建新) 교수는 “고구려 호태왕의 전승기록이란 점을 중시, 안라인수병을 구절로 여겨 ‘安’을 동사로 보고 싶다”고 했다.

베이징대(北京大) 마세장(馬世長·고고학) 교수는 “비문의 용법과 용례를 충실히 비교 검토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라며 결론을 유보한다.

중국측은 고구려 논의는 경계하면서도 고구려 유적의 관광자원화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 안타까운 것은, 중국 당국이 고구려를 자기들의 변방 소수민족사로 파악하면서 그들의 시각으로 고구려를 해석·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손색없는 장군총(장수왕릉)에 철제난간을 설치, 관광객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파손위험을 도외시하는 것도 문제였다.

‘고구려연구회’ 서길수 회장(서경대 교수)은 “중국 지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한·중 공동연구가 절실한데도 중국측이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늦었지만 우리 학계가 중국 속의 고구려 찾기, 고구려 속 가야찾기에 전략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 중국 지안(集安)=박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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