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8.htm
1) "발해유민의 재건운동 : 후발해와 대발해 (渤海遺民의 再建運動 : 後渤海와 大渤海)"글에서 "Ⅲ. 발해유민의 초기재건운동 - 3. ?惹(왕야)" 부분을 가져오고 한글로 좀 바꿨습니다.
2) 대부분의 자료에서 올야(兀惹)를 쓰므로 명칭을 바꿨습니다. "?惹(왕야)=올야(兀惹)"로 보시면 됩니다.
3) ?惹(왕야) 같이 깨진 한자가 좀 보일 겁니다.

올야(兀惹)

올야는 忽汗水(홀한수)의 상류인 上京龍泉府(상경용천부)와 中京顯德府(중경현덕부) 사이에 있는 忽汗湖(홀한호) 부근에 위치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올야의 위치에 대하여 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장편)에 의하면 올야는 東京城(동경성, 遼陽城) 東北 600里에 위치하였다고 기록하였으며 그 국경은 동남으로 고려와 접하고, 또 북으로 여진에 이르고, 동쪽으로 압록강을 넘으면 곧 신라라고 하였다. 이 신라라고 한 데는 혼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렴풋이나마 그 위치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여기에 대하여 일인학자 池內宏(지내굉)도 올야는 鐵驪(철려)와 고려북계의 중간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人戶가 10,000餘戶나 되었다고 하며 한자를 썼고 또 印(도장)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惹란 名도 문헌통고에는 烏舍城浮渝府琰府王(오사성부투부염부왕)이라 하였는데 宋史의 烏舍城을 말하며, 遼史에는 兀惹部(올야부), 또는 屋惹國(옥야국)이라 하였으며 宋史, 松漠紀聞(송막기문), 契丹國志(거란국지) 等에는 烏舍(오사), 屋惹(옥야), 溫熱(온열), 金史(전사)에는 兀的改(올적개), 烏底改(오저개), ?史(왕사)에는 吾者(오자), 明史(명사)에는 ?者(왕자), 兀狄哈(올적합)이라 부른 것이 올야이다.

일찍이 宋과 통왕하면서 宋과 연합하여 요를 공략할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995年(統和 13年) 兀惹王(올야왕) 烏昭度(오소도) <屬國表(촉국표)에는 烏昭羅(오소라)였음>와 燕頗(연파)와 함께 鐵驪國(철려국)을 공격하였다. 철려국은 거란에 급히 이 사실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거란은 즉각 奚王和朔奴(해왕화삭노)로서 都部署(도부서)를 삼고, 蕭恒德(소항덕)으로 副部署(부부서)를 삼고, 耶律斡臘(야율알랍)으로 行軍都監(행군도감)을 삼아서 곧바로 출정하였다.

거란(契丹)이 선뜻 출정한 裸面(裸=裏이면)에는 두가지 理由가 있었던 것 같다. 첫째는 지난번 발해인 연파가 반란하여 요의 추격을 피하여 兀惹城(올야성)에 피한 것을 잘 庇護(비호)해준 일 때문이고, 둘째는 宋太宗이 岐溝關戰役以前 助戰出兵(기구관전역이전 조전출병)을 요구하자 받아들인 때문이다. 이 두가지 일을 되돌려 상술해 보면 출정이유가 자명해진다.

연파사건은 곧 975年(保寧 7年) 黃龍府衛將 燕頗(황룡부위장 연파)가 都監 張琚(도감 장거)를 살해하고 요에 반하자 遼廷(요정)은 敞史 耶律曷里必(창사 야율갈리필)을 보내어 평정케 하였다. 그가 출정한지 두달이 지난 그해 9月 치하에서 격전을 벌인 결과 연파가 패주하였다. 야율갈리필이 그 동생 安博(안박)을 보내어 추격케 하였다. 그러나 연파는 부중을 이끌고 올야성으로 피하였다. 安博(안박)은 더 이상 추격치 못하고 회군하게 되었다. 그 뒤 연파는 일당 1,000여호를 거느리고 올야성을 나와 通州城(통주성)을 쌓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더 이상 방치하면 隣近諸部衆(인근제부중)을 통합하여 거란(契丹)에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을 생각하였던 것 같다.

두 번째의 결송공벌은 곧 981年(太平興國 6年) 송태종(宋太宗)이 대거공요를 앞두고 서로 출정시기를 정하였던 것이다. 그때 宋太宗이 왕야국에게 발병상응하도록 하조한 조문을 보면,

朕纂紹丞構, 奄有四海, 普天之下, 岡不率?, ?太原封城, 國之保障, 頃因竊據, 遂相承襲, 倚遼爲援, 歷世逋誅, 朕前歲親提銳旅, 盡護諸將, 拔幷門之孤壘, 斷匈奴之右臂, 眷言吊伐, 以蘇黔黎, 蠢玆北戎, 非里構怨, 輒肆?食, 犯我封略. 一昨師逆擊, 斬獲甚衆. 今欲鼓行深入, 席捲長驅, 焚其龍庭, 大殲醜類, 索聞爾國寇讐, 迫於呑倂, 力不能制, 困而服屬, 困於宰割. 當靈旗破敵之際, 是隣邦雪憤之日, 所宜盡出旗帳, 佐予兵鋒, 俟其?滅, 沛然封賞, 幽?土宇, 復歸中原, 朔漠之外, 悉以相與, ?乃協力, 朕不食言.

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올야세력은 제법 컸던 것으로 간주된다. 송사(宋史)에서도 발해국전에 이 이야기를 실었고, 續資治通鑑長編(속자치통감장편)에서도 981年(太平興國 6年) 7月 丙申日(병신일)에 장차 대거 거란정벌을 앞두고 사자를 보내어 발해왕에게 하조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올야도 곧 후발해의 계통을 이은 것이라 간주된다.

그렇듯 출정조원을 약속했으나 그러나 宋遼開戰之日(송요개전지일)에는 遼軍(요군)이 두려워서 감히 발사하지 못하고 자기보호에 급급할 뿐이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올야정벌에 나선 전술한 和朔奴軍(화삭노군)은 鐵驪(철려)에 留陣(류진)하며 수개월 동안 휴식을 취하고 군위를 보이자 올야가 스스로 항복을 청해 왔다. 그러나 교만해진 거란군은 청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虜(부노)를 얻을 생각으로 급작이 올야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궁지에 몰린 올야왕 烏昭度(오소도)는 계책을 내어 戰棚(전붕)을 虛構(허구)하고 ??(비예)사이에 적군을 유도하여 적군이 비에 오르면 지주가 부러지면서 위에 오른 자는 모두 죽게 되는 전략을 썼다. 이런 전법에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도부서 和朔奴(화삭노)가 회군하려고 하자 부부서인 동경유수 소항덕이 극구 반대하고 나왔다. 그는 회군반대이유로,

吾奉詔來討, 無功而還, 諸部謂我何若, 深入多獲, 猶勝徒返從.

이라고까지 하면서 전리품으로 生口를 얻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행군도감 耶律斡臘(야율알랍)은 蕭恒德(소항덕)의 심입공략론을 못마땅하게 여겨 "深入恐所得不償所損"("심입공소득불상소손")이라 우려를 표시하였으나 끝내 항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그의 주장을 따라서 올야성동남지를 순략하고 고려북비를 돌아서서 회군하였다. 그러나 길이 生疎(생소)하고 지형이 험조하여 인마사상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의 정황을 요사 해화삭노전에서 보면,

副部署蕭恒德, 讓掠地東南, 循高麗北界而還, 以地遠糧絶, 士馬死傷甚衆

이라 기술하고 있다. 이 정벌은 遼廷(요정)으로써는 득보다 손이 훨씬 큰 전역이었다. 어줍지않게 생각하고 호기를 부리던 당시 북아의 대국이 일개 보잘 것 없는 부중에 패하고 게다가 회군중 스스로 궤멸하는 꼴이 되었으니 승리만 거듭하던 聖宗으로서는 노기를 억누르지 못하였던 것이다. 996年(統和 14年) 4月 패전의 죄를 물어 왕야정벌에 참여하였던 奚王和朔奴(해왕화삭노)와 東京留守 蕭恒德(동경유수 소항덕)등 5人將帥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그 다음해인 997년(統和 15年) 올야왕 烏昭度(오소도)가 거란군의 재침을 염려하여 스스로 降附(항부)해 왔다. 그러자 요는 再征(재정)의 구실을 잃고 요와 올야의 불화는 끝나고 말았다. 그 뒤 요는 올야, 蒲盧毛朶部(포로모타부), 曷懶女眞(갈라여진)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노력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성공치 못하고 말았다.

비록 만기에 가서 요의 군세에 항부하여 공을 바치기는 하였다 하더라도 스스로 行한 자구행위였으며 요의 세력이 직접 미치지는 못하였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부흥국을 이룩하지는 않았으나 東北 깊숙히 요의 세력이 침투치 못하도록 제지하는 몫을 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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