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dongpo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4023

“중국 요동(遼東)의 인구 30%가 조선인이었다”
김영완  |  dongponews@hanmail.net  승인 2009.04.24  20:49:39

 
▲ 김영완(상해중국유통연구소장, 상해진동거창문화전파유한공사대표).

<표해록(漂海錄)>은 조선 성종때 추쇄경사관(도망한 노비를 잡아들이는 관직)으로 제주에 간 최부(崔溥, 1454~1504) 선생이 부친 상을 당해 배를 타고 육지로 나오다 표류한 기록을 담은 글이다.

최부선생은 보름 남짓 바다위를 떠돌다가 지금의 절강성 태주(台州) 인근에 닿아 소흥과 항주, 소주, 북경, 산해관을 거쳐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귀환했다.

전 행정을 일기체로 적은 이글은 중국 고전에 능한 조선 지식인이 중국 관리들과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당시의 문물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중국에서도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특히 바다를 방어하는 제도와 표류자 신문 절차와 방식, 왜구에 대한 인식, 당시 중국의 역마제도와 운하제도, 이방인의 눈에 비친 중국 남북방의 생활상과 문화의 차이, 남방에 있는 중국 관리들의 조선에 대한 지식과 관심 등이 적혀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좋은 창문의 역할을 한다.

이 책은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한데, 후기에 해당하는 견문잡록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해주(海州)ㆍ요동(遼東) 등지에는 중국 사람, 우리나라 사람, 여진 사람이 고루 섞여 있다. 석문령(石門嶺)에서 남쪽으로 압록강까지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관과 의복, 말씨와 여자의 수식이 거의 우리와 같다”

해주는 지금의 랴오닝(遼寧)성 해성(海城)시로 영구(營口)와 안산(鞍山) 사이에 있고, 요동은 현재의 요양(遼陽)을 얘기한다. 석문령은 심양(沈陽) 인근의 무순(撫順)에 있다.

즉 압록강에서 심양 인근까지는 조선 사람들이 이주해 살고 있고, 심양을 지나 서쪽으로도 중국, 조선, 여진 사람이 섞여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1487년의 기록이다. 지금부터 500년 전 조선 지식인이 눈으로 보고 적은 글이다.

이 책에는 최부선생이 요양에서 계면(戒勉)이란 현지 승려를 만나 그와 나눈 얘기도 기록하고 있으며, 그는 우리말이 능했다고 적고 있다.

“소승은 본디 조선사람인데, 소승의 조부가 도망해 이곳에 온 지 벌써 3대째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위치가 본국(本國 조선)의 경계에 가까운 까닭으로 본국 사람이 와서 거주하는 자가 매우 많습니다. 중국 사람은 겁이 많고 용맹이 없으므로, 도적을 만나도 모두 창을 던지고 도망해 숨어 버립니다. 또 활을 잘 쏘는 사람도 없으므로, 반드시 본국 사람 가운데 귀화한 사람을 뽑아서 정예병으로 선봉을 삼으니, 우리 본국의 한 사람이 중국 사람 10명, 100명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현지의 조선인들은 중국에 귀화해서 일당백의 병사가 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당시 요동지역에 ‘이민’ 온 조선인들의 모습을 승려는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 고구려의 끼친 풍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아서, 고려사당(高麗祠)을 세워 근본으로 삼고, 공경하여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는 날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여우는 죽을 때 살던 굴로 머리를 돌린다(鳥飛返故鄕 狐死必首丘)’는 옛말처럼 우리도 본국으로 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본국에서 도리어 우리들을 중국 사람으로 인정해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우리들은 외국으로 도망한 죄를 받아서 몸뚱이와 머리가 따로 있게 될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가고 싶지만, 발은 머뭇거릴 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명나라때 이미 요동지역으로 수많은 이민이 이뤄졌으며, 이들은 조선으로 건너가고 싶어도 본국에서 다시 요동으로 환송될 것을 두려워해 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인다. 세조 14년(1468년)에는 “건주위(여진) 땅에 포로 또는 도망한 한족과 조선인들이 조선과 명나라의 국경 사이에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고 있다”며, “동녕위(東寧衛, 현재의 요양시 태자하)의 고려인은 명나라 홍무제(1368~1398) 때는 3만명, 영락제(1403~1424년) 때는 4만여 명이었다. 요동인구 중 고려인이 30%를 차지하며 서쪽은 요양, 동쪽은 개주, 남은 해주에 집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조실록의 “요동인구 30%가 고려인이었다”는 기록은 최부선생의 관찰과 아귀가 맞는다. 

이후에도 조선에서 요동으로의 ‘이주’는 끊이지 않았다. 나중에 청나라가 된 후금과 명나라가 싸울 때 명의 요청으로 출병한 강홍립이 이끄는 1만3천명의 조선군은 청에 항복한 후 귀환되지 못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청은 두차례에 걸쳐 조선을 공격해 척화파 대신과 그 가속들 및 수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갔으며, 조선에서 1만 2천500여 명을 청군으로 징병하기도 했다.

‘심양장계(沈陽狀啓)’라는 중국 문헌에는 “만주 8기 중 고려백성 42개 성씨가 있었는데 선조는 모두 조선의 역주, 평양 등지의 사람으로 청나라초기에 포로가 된 이들”이라고 했다.

요동에 있던 이들 ‘본국인’(조선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날이 새고 해가 지면서 본국의 옷을 벗고 본국의 말을 잊으면서 요녕성의 중국인으로 바뀐 것은 아닐까.

우리 말과 우리 옷의 중요성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