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wpQ5C8

동성왕

백제의 제24대 왕
생몰년 : ?-501
재위기간 : 479-501

동성왕(東城王)은 백제의 제24대 왕이다. 제21대왕인 개로왕의 손자이며 그 둘째 아들인 곤지(昆支)가 아버지이다. 479년에 즉위하였다. 동성왕은 23년의 재위기간 동안에 구귀족과 신진귀족의 대립사이에서 왕권강화를 추진하여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려 하였다. 하지만 점차 강해지는 신진귀족을 견제하려다 501년에 피살되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둘째 아들이 제24대 무령왕이라고 하였으나 확실하지 않다.

전문정보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의 이름은 다양하게 기록되고 있다. 국내자료만 보더라도 『삼국유사』 왕력편에 모대(牟大), 마제(麻帝), 여대(餘大)로 나와있으며, 『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즉위년조의 세주에는 마모(摩牟)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위 사료 23년조에는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자 시호를 동성왕(東城王)이라 하였다(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 고 한다. 이를 통해 “동성왕(東城王)”은 왕이 죽은 뒤에 올린 시호(諡號)이며, 모대(牟大), 마제(麻帝)등은 왕이 살아 있었을 때 사용한 휘(諱)임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백제에서 시호제(諡號制)가 실시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초의 자료이다.

『삼국유사』왕력편에는 동성왕이 삼근왕(三斤王)의 당제(堂弟) 즉 사촌동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즉위년조에는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昆支)의 아들로 되어 있고,『일본서기』권14 웅략기 23년조에는 말다왕(末多王) 곧 동성왕은 곤지(昆支)의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이라 했다. 이를 통해 동성왕이 곤지(昆支)의 아들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중국의『남제서』권58 열전39 백제전에 따르면 동성왕인 모대(牟大)가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왕위를 이었다고 하였고,『양서』권54 열전48 백제전에는 모도(牟都)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23년조 세주에서 편찬자는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이고,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의 아들이다(三韓古記 無牟都爲王之事 又按牟大盖鹵王之孫 盖鹵第二子昆支之子)”고 비판하였다. 

동성왕은 479년에 즉위하여 23년 동안 재위하였다. 동성왕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해구의 반란을 제압한 진씨(眞氏) 세력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어린 나이에 왜(倭)에 머물고 있어서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동성왕을 수단으로 진씨세력이 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하려는 의도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에게 주어진 과제는 웅진 천도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의 재위 23년간에 걸치 정국운영의 흐름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백제정치는 동성왕 재위 5년까지는 웅진으로 내려온 구귀족이 장악하였으나 왕이 정치적 혼란을 수습해 가면서 점차 한성 도읍기 시절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성씨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苩氏)의 등장이 주목된다. 동성왕이 정국안정과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신진세력을 등용하고 정치 활동을 확대하게 됨으로써 점차 그 실권이 신진세력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노중국, 1988)

『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즉위년조를 보면 왕은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물평처럼 동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과감히 추진하여 후대에 성왕(聖王)이 백제의 중흥을 이끄는 바탕이 되었다. 동성왕은 금강유역의 신진세력을 정치 전면에 등장시키면서 정국안정과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우두성(牛頭城)․사현성(沙峴城)․이산성(耳山城)과 같은 성곽을 웅진 주변에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하였다. 또한 궁실을 중수하고 웅진교(熊津橋)를 가설하였으며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이러한 대토목공사를 통해 왕도로서 웅진의 위상을 강화하였다.(남형종, 1993) 

외교적으로는 중국의 남제로부터 책봉을 받고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으며, 신라의 소지왕(479~499)과 결혼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침입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지증왕이 즉위(500)하면서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하자, 동성왕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탄현(炭峴)에 성책을 설치하여 신라를 견제하였다.(양기석, 1994) 

동성왕은 왕도를 웅진에서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고 왕권 중심의 정치를 운영하려 하였다. 여기에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의 세력이 날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백가(苩加)를 중심으로 한 백씨(苩氏) 세력은 고이왕대부터 보이며 웅진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으로 보인다. 동성왕대에 이르러 백가(苩加)가 활약하면서 백씨는 두드러진 정치세력이 되었다. 백가는 동성왕 8년(486)에 위사좌평(衛士佐平)이 되었는데, 위사좌평은 왕궁을 지키는 임무를 책임지는 것으로 제1품의 관직이었다. 동성왕은 재위 23년(501)에 백가(苩加)에게 부여와 익산 사이에 있는 가림성(加林城)을 지키게 했는데, 이 조치는 왕이 백가를 추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백가는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고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백가는 동성왕 23년(501)에 자객을 보내 사비(泗沘)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왕을 피살하였다. 그리고 무령왕이 즉위한 이듬해 봄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토벌되어 사망하였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이 죽은 후 둘째 아들이 제24대왕인 무령왕이 즉위하였다고 하였으나 혈연관계가 확실하지 않다.

참고문헌

노중국, 1988,『百濟 政治史硏究』, 일조각.
남형종, 1993, 「百濟 東城王代 支配勢力의 動向과 王權의 安定」『北岳史論』3. 
양기석, 1994, 「5∼6세기 전반 新羅와 百濟의 關係」『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5.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四 東城王 [名<牟>大 一云麻帝 又餘大 三斤王之堂弟 己未立 理二十六年]
제24대 동성왕[이름은 모대인데 마제 또는 여대라고도 한다. 삼근왕의 당제로 기미년에 즉위하여 26년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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