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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이상설, 북한 쿠데타’… 대북 취재에 무능한 한국 언론
[보도비평] 북한 통치자의 잠적 40일,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나
입력 : 2014-10-14  15:03:02   노출 : 2014.10.14  15:29:12 정철운 기자 | pierce@mediatoday.co.kr    

시작은 9월 29일, 스무 명의 기자가 모여 있는 단체 카카오톡 방이었다. 이슬람 매체발이라는 이 증권가 정보지(일명 찌라시)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대해 “현재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어 병상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뇌어혈로 운신할 수 없는 상태.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흐릿하여 스스로 배설을 못하는 상태”라고 묘사했다. 

언론은 찌라시에 반응했다. 찌라시가 돈 다음날인 9월 30일자 조선일보는 “김정은이 양쪽 발목 뼈에 금이 갔다”며 “비만으로 과체중이 된 상태에서 키높이 구두를 신고 군부대와 산업 현장 시찰을 다니다 발목에 무리가 온 것 같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일각에선 김정은이 활동에 제약을 받으며 체제 안정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같은 날 이영종 중앙일보 외교안보팀장은 “뇌어혈이란 병명까지 붙여 (김정은) 병세가 지속적으로 악화된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런 찌라시성 대북첩보는 북한체제의 폐쇄성에 기인한다”고 지적한 뒤 “북한 지도자가 자취를 감추면 대북 정보 분석가들은 불안해진다. 이 때 누군가 슬슬 발동을 건다. 근거 없는 첩보도 일파만파 번진다”고 적었다. ‘김정은 이상설’ 찌라시는 김정은이 9월 3일 부인 리설주와 함께 모란봉 음악회를 관람하고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지 26일 째 등장했다.  

10월 초, 중국발로 “북한 군부가 김정은 관저를 습격했으며 쿠데타를 이끈 사람이 조명록 전 군 총정치국장”이란 소문이 돌았다. 조명록 지국장은 2010년 숨졌다. 사실관계조차 다른 소문이 제법 그럴싸하게 포장돼 돌고 있었다. 동아일보의 경우 10월 1일자에서 “북한 소식 전문매체 ‘뉴포커스’는 북한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북한이 사흘 전부터 평양 출입 통행을 완전히 제한하고 있다고 동아일보에 전했다”고 보도했다. 쿠데타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대목이었다. 

▲ 동아일보 10월 1일자 기사.
 
 
▲ 경향신문 10월 4일자 기사.
 
조선일보는 10월 3일자에서 “(김정은이) 단순히 통풍으로 다리가 아픈 것이 아니라 심장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10월 7일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김정은이 평양 북방 모처에 있다”고만 말해 의구심은 더욱 증폭됐다. 하지만 여전히, 김정은은 공식석상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자 10월 10일 카톡방에 두 번째 찌라시가 등장했다. 

“… 수술 실패로 김정은은 뇌사상태에 준하는 심각한 상태. 거동은 확실히 불가능하며 정상적 상태로 돌아오기도 불가능. 김여정(김정은 여동생)이 백두혈통으로 명목상 표면에 나올 확률이 매우 높음. 아시안게임 중 방한한 북한실세 3인방이 현재 전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 동요를 막기 위해 평양에 계엄령 선포함. … 김여정 체제로 전환이 불가능할 경우 중국이 최우선 협의대상. 지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통합진보당 최고지도부와 예전 경기동부연합 인사들은 동요상태. 내부붕괴로 인해 북한이 전례 없는 변화를 맞게 될 것은 분명함. 중국이 대리통치할 수도 있다고 함.”

찌라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김정은이 10일 노동당 창건 69주년 행사에 등장하지 않으며 찌라시는 점점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동아일보는 지난 11일자에서 “(김정은의) 잠적 상태가 지속되면 북한 권부의 내부적 동요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 출처가 불분명한 평양 계엄령 선포설 등이 난무하고 있다. 서방 매체는 김정은의 정신병설, 김여정의 대리통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이 때 찌라시를 잠재우는 해외언론보도가 등장한다. 중국 중앙방송(CCTV)은 “김정일도 당 창건 기념일에 불참한 사례가 있다”며 김정은의 건강이상설에 대해 “과도한 해석은 적절치 않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은 10일 “김정은이 지난 8월 군사훈련 참관 과정에서 직접 포복, 구르기, 달리기를 하다 인대가 늘어나는 다리 부상을 당했다”고 전했다. 미국의소리(VOA)는 11일 “평양 분위기는 평소와 다름없고 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보도했다. 

▲ 10월 14일자 SBS뉴스 화면 갈무리.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패트릭 벤트렐 대변인도 11일 “북한 쿠데타와 관련된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해외언론 보도가 있고난 뒤인 13일 중앙일보는 “김정은은 지난달 중순 평양 봉화진료소에서 프랑스 의사로부터 양쪽 발목관절 수술과 함께 발바닥 부분의 부종과 물집에 대한 외과적 치료를 받았다”고 보도하며 “소문으로 나돈 사망 위독설은 모두 근거가 없다”고 전했다. 그리고 10월 14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이 평양에 완공된 위성과학주택지구를 현지지도하고 자연에네르기연구소를 둘러봤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의 공식석상 복귀였다. 

‘김정은 뇌어혈’부터 ‘군부 쿠데타’까지 화려했던 찌라시는 이제 종적을 감췄다. 영국의 유력매체 가디언은 11일자 칼럼에서 “김정은이건 누구건, 독재자의 행방이 묘연해지면 추측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독재는 정보를 통제하고, 정보가 제한적이면 추측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2008년 8월에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퍼지며 사망설까지 등장했지만 그 해 11월 김정일이 축구경기장에 등장해 건재함을 보여주자 한국 언론은 당혹감을 감춰야만 했다. 이번에도 6년 전과 비슷했다. 

김정은을 비롯한 일련의 북한 관련 찌라시는 붕괴된 대북정보라인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13일 한겨레 기고글에서 “김정은 이상설을 실어 나르는 찌라시가 넘쳐난다. 북한 붕괴론을 믿는 사람들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추측한다. 찌라시가 난무할 때마다, 접촉 제로인 남북관계의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평양에 통신사도, 정부 관계자도, 기업인도 없다.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라고 비판했다. 

▲ TV조선 10월 14일 보도화면 갈무리.
 
김정은이 공식석상에 등장하지 않자 누군가가 일부러 찌라시를 만들어 언론에 흘리고, 북측의 대응을 기대했다는 추측도 있다. 전직 대북정보 관계자는 중앙일보를 통해 “과거 김정일의 동정이 파악되지 않을 때 슬쩍 사망설을 띄우면 평양 쪽이 어떤 형태로든 움직였다”고 말했다. 이 경우 이번 ‘김정은 뇌사 찌라시’는 김정은의 동정을 파악하게 만들어 성공적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찌라시에 흔들린 건 대북 취재에 무능한 한국 기자들뿐이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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