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ids.hankooki.com/lpage/edu/200707/kd2007070817110577370.htm

[해양강국 백제를 찾아서] 무령왕, 백제 전성기 열다
가야 소국에까지 세력 과시… 강성한 나라 만들어가
입력시간 : 2007-07-08 17:11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 고구려거듭격파… 다시강국으로
 
무령왕의 무덤에서 글자가 새겨진 돌이 발견됨으로써 후세 사람들은 그의 생애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됩니다. 462년 태어난 그는 40 세인 501년 왕위에 올랐으며, 523년 5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는 백제인이 남긴 '백제신찬'이라는 책을 인용, 그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지만 어머니는 개로왕의 부인이라고 기록해 놓았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검토해 보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동성왕의 아버지이기도 한 곤지가 맞습니다. 따라서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무령왕의 아버지 곤지는 임금 바로 아래의 직위인 좌현왕이란 직책을 갖고 일본열도를 개척한 인물입니다. 아버지 곤지는 462년 형인 개로왕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가던 중, 규슈섬 후쿠오카 북쪽의 카카라시마라는 섬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이 때 그 섬에서 태어난 무령왕에게 '사마'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사마'는 일본어로 섬을 뜻하는 '시마'에서 유래된 것이랍니다.

곤지는 일본에서 세력을 키우고, 왜국과의 무역 등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쌓았습니다. 얼마 뒤 형이 죽고 조카 문주가 왕이 되자 곤지는 아들 무령왕과 함께 귀국하여 백제를 안정시키는 데 노력합니다.

문주왕과 삼근왕을 거쳐 임금이 된 동성왕이 501년 신하인 백가에게 죽임을 당하자, 무령왕이 그 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키가 8척(188-201㎝ 정도)이나 되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고 합니다.

무령왕은 먼저 502년 가림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꾀하던 백가를 제거함으로써 혼란했던 정치를 안정시킵니다. 또 기근이 계속되자 나라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했지요.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 등을 정비하거나 크게 늘려 농민들이 보다 편히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했답니다.

무령왕은 방어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백제를 위협하던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을 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하여 주변국으로부터 '백제가 고구려에게 패하여 여러 해 동안 약해 있더니, 고구려를 거듭 격파하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1. 남중국 양나라 책인 '양직공도'에 나타난 백제 사신과 왜국 사신 모습.
  
● 섬진강 일대까지 영토 확장… 가야 연맹 백제 영향권에
 
무령왕은 또 동쪽인 가야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 갔답니다. 경상 북도 내륙 지방인 고령에 자리하고 있던 대가야는 479년 바다 건너 남중국의 남제로부터 '보국장국 본국왕'이란 칭호를 받을 만큼 힘이 강성해져 있었습니다.

근초고왕 이후 가야의 소국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백제는 고구려에게 여러 차례 패한 탓에 대가야가 이렇게 성장하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일본서기'에는 512~513년에 백제의 요청을 받은 왜가 지금의 섬진강 지역인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기문, 대사 등의 땅을 백제에게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제가 남원에서 임실, 하동에 이르는 섬진강 일대로 영토를 넓히고, 가야의 소국들에게 힘의 우위를 과시한 것이 됩니다.

남중국 양나라의 책인 '양직공도'에도 백제의 명령을 받았던 속국으로 반파, 탁, 다라, 사라, 지미, 마련, 상기문, 하침라 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야 지역의 작은 나라들입니다. 결국 신라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에 있는 가야 연맹의 여러 나라들이 백제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간 셈이지요.

이 '양직공도'에는 백제 사신과 왜국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백제 사신은 대단히 세련된 옷을 입은 반면, 왜국 사신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매우 어설픈 모습을 하고 있답니다.

당시 왜국은 '일본서기'의 기록처럼 백제에게 땅을 하사할 만큼 힘이 강한 나라도, 문화가 발전한 나라도 아니었습니다. 백제는 왜국보다 문화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훨씬 강한 나라였던 것이지요.

결국 '일본서기'의 기록은 왜국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며, 실제로는 백제가 스스로 가야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던 것입니다. 무령왕은 이처럼 안팎으로 백제를 강한 나라로 만들어 나간 임금입니다.


2. 무령왕릉에서 나온 왕의 머리관 장식. 3.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글자가 새겨진 돌.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 터를 토지신으로부터 구입했음을 밝혀주는 '매지권'이라고 적혀 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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