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hankuksa/vod/1489585_23041.html (KBS 한국사전)
         http://v.youku.com/v_show/id_XMzA5NjUxMTg4.html , http://blog.daum.net/santaclausly/11604801 

백제! 다시 강국이 되다 - 중흥군주 무령왕
KBS 한국사전 21회  2007.11.17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됐다. 적의 칼에 왕은 목숨을 잃었다(백제 개로왕 전사). 한성은 사라지고 백제는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웅진시대의 왕들은 암살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1) 무령은 그 위태로운 시간을 딛고 일어서 백제를 강한 나라로 만들어 갔다(백제 중흥의 초석). 무령왕 그는 백제를 다시 반석에 올린 중흥군주였다.
 
[백제! 다시 강국이 되다 - 중흥군주 무령왕]

“한 나라의 지도자가 품고 준비한 꿈은 벼랑 끝에 놓인 국가의 위기도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무령왕의 등장은 백제 역사의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무령왕은 백제가 수도인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는 참패를 당하고 지금의 공주로 내려와서 재기를 준비했던 웅진시대 네 번째 왕이었습니다. 피로 얼룩진 선왕들의 죽음으로 시작된 웅진시대 그 출발은 결코 화려하거나 영광스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이런 난국을 어떻게 극복하고 백제를 다시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일까요. 오늘 한국사전에서는 무령왕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 꿈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령왕의 즉위를 둘러싼 미스터리
■ 무령왕은 동성왕 피살사건의 연루자?
 


무령(백제 제25대왕 재위 501~523년)이 웅진의 왕성에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501년 12월. 그의 정치는 출발부터 시험대에 오른다. 이듬해 정월(502년) 급보를 알리는 파발이 날아들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였다. 왕이 된지 불과 한 달 만에 무령의 왕권에 반기를 든 자가 생긴 것이다. 반란군 우두머리는 백제 가림성의 성주인 백가.2) 三國史記에 따르면 백가는 무령왕의 성왕인 동성왕을 죽인 시해범이다. 무령왕은 직접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진압작전은 성공했다. 반란군 우두머리 백가가 항복을 하고 끌려 온 것이다. 무령왕은 단호하게 백가의 처형을 지시한다.3) 실패한 반란군의 최후는 바로 죽음. 그런데 백가는 왜 항복한 것일까. 처형된 백가의 행적은 의문투성이다. 금강하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백가의 반란 거점이었던 가림성이 나온다.



 


부여군 임천면에 자리한 성흥산성. 이곳이 백제 동성왕 때 쌓은 가림성이다. 7C 백제 부흥 군이 신라와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했을 정도로 요새 중에 요새다. 그런데 이 가림성에서 백가는 끝까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것이다. 항복하면 무령왕이 그에 사정을 헤아려 줄 거라고 믿은 것은 아닐까. 

정재윤 교수 공주대학교 사학과
“왕을 죽인 시해범이 반란까지 일으켰다면 의당 사형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벌군이 이르자 항복을 하였다는 것은 백가는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뭔가 억울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소연 하고 싶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이런 정황을 볼 때 백가의 시해 사건 뒤에는 거대한 배후 세력이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동성왕 시해 사건에 숨겨진 배후 세력, 그들은 누구고 또 무령왕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백제 제24대 임금인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은 활을 쏘면 백발 백 중 명중할 만큼 무예실력까지 갖춘 강력한 군주였다. 그런데 집권 20년을 넘긴 후반기 백제 왕성에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신하들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자고 청하지만 동성왕은 귀찮아하며 외면해 버린 것이다.4) 표면상으로는 구휼문제로 불거진 왕과 신하들의 정책적 갈등으로 보이지만 그 배경에는 동성왕과 귀족들 간에 오랜 알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중국 교수 계명대 사학과
“웅진으로 내려오면서 백제사에는 큰 변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죠. 윗선은 정치의 중심 또는 경제 또는 모든 문화의 중심지 수도가 한강 유역권에서 금강유역권으로 바꿔지게 됩니다.   중심지가 옮겨지게 되고 또 거기에 따라 가지고 지배세력에도 큰 변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종전까지는 한강 구역에 주로 기반을 둔 세력들이었는데 이제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면 이른바 금강 유역권에 기반을 갖고 있는 세력들, 이들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고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죠.”
 


중국 역사서인 통전에 따르면 백제에는 여덟 개 성씨의 큰 귀족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백제의 지배세력이다.5) 그중 구휼을 주장한 쪽은 해씨, 진씨 등 한강시대를 주도한 북방세력이었다. 웅진의 사씨, 백씨, 연씨 등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동성왕이 키운 새로운 정치세력이다. 그중 백가는 15년 간 경호 실장격인 위사좌평을 지낸 핵심 친위세력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긴 것은 501년 동성왕이 백가를 가림성 성주로 전출시킨 것이다.6) 중앙정계를 떠나기 싫었던 백가는 병을 핑계로 가진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가림성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면 백가는 언제든지 중앙정계로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해 11월, 백가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가림성 일대에 사냥을 하다 머물던 동성왕의 숙소에 자객을 보냈다. 그날 밤, 동성왕은 자객의 칼에 치명상을 입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7) 그런데 日本書紀는 동성왕 시해를 주도한 세력이 무령왕을 추대한 백제의 지배층이라고 밝히고 있다.8)

이도학 교수
“백가가 살해한 것으로 돼있지만, 그러나 나라 사람들이 제거했다라는 이런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성왕에 대한 어떤 불만을 가진 귀족층들이 광범위하게 깔려 있었고 그런 가운데서 백가가 요즘 쉽게 말하면 ‘방아쇠를 당겼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백가와 귀족들의 결탁은 동성왕이 집권 후반기 향락생활에 빠져 들면서 그 징후를 들어냈다.9) 동성왕은 밤새도록 잔치를 벌이기 일쑤였다. 백성들의 고통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민심도 동성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돌아선 민심은 무령에게로 향했다.

 
귀족들과 백가는 그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정재윤 교수 공주대학교 사학과
“조선시대 때 반정이 일어났을 때 이미 누구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나서 반정을 일으킵니다. 그런 것처럼 동성왕을 시해한 주도세력도 틀림없이 대안을 내세우고 동성왕을 시해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여기에 무령왕이 직접 관여하였는지 아니면 소극적으로 관여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정변 세력과의 교감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무령왕은 백가와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긴 했지만, 동성왕 시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백가의 처형을 단호하게 처리한 것이다. 반란군 진압과 백가의 처형은 무령왕이 넘어선 첫 번째 정치적 시험대였다.

“三國史記는 무령왕이 키가 컸으며 용모가 수려했고 인자한 국왕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신망 또한 두터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령왕의 즉위 과정에는 선왕인 동성왕의 암살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령왕은 동성왕의 암살 이후에 백제왕으로 추대된 풍운의 사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령왕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어떤 신분이었으며, 언제 태어나서 몇 살에 왕위에 올랐던 것일까요. 신비에 쌓였던 무령왕 일생의 이력서가 바로 여기 송산리 고분 안에 있었습니다.”

 
백제 무령왕의 출생 비밀
■ 백제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공주의 송산리 고분. 웅진 시대에 백제 왕족 무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1971년 장마에 대비해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된 벽돌 그 벽돌을 여는 순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도굴군의 손을 타지 않았던 유일한 백제 왕릉. 그것은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던 무령왕릉이었다. 놀라움과 흥분 속에 유물들이 수습됐다. 무덤방에는 역사에 저편으로만 살아진 줄 알았던 무령왕 시대의 엄청난 정보가 들어있었다. 무령왕의 시신이 안치된 금송관은 무덤방의 오른 쪽에 있었고, 서쪽에는 왕비가 잠들어 있었다. 주변에는 화려했던 부장품들이 세월에 녹이 쓴 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불과 10시간 만에 이루어진 성급한 발굴. 그런데도 출토된 유물은 무려 삼천 여점에 이르렀다.
 



국립공주박물관. 세월의 녹을 벗겨낸 유물은 너무도 눈부셨다. 무령왕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왕의 모자 장식, 순금으로 만든 화려하고 정교한 금제관식이다. 기록 속에만 존재하던 백제 왕관의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두께 1㎜ 정도의 금판을 오려내어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갖춘 금제관식 문양은 역동적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자아냈다. 금판을 오려 붙여 만든 왕의 귀걸이도 화려함으로 눈부셨다. 왕비의 왼쪽 팔목 부분에서 발견된 은제 팔찌. 혀를 내민 체 머리를 뒤로 돌린 두 마리의 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연결되어 있다. 비늘과 발톱까지 곧 날아 오를 것 같은 모습이다. 비취로 만든 굽은 옥에는 금모자를 씌웠다. 좁쌀 알갱이만한 금가루를 당시의 최첨단 기술로 붙여서 만든 금모자다. 무령왕릉의 이 화려한 유물들은 백제 문화에 대한 인식을 단번에 바꾸어 놓았다.

권오영교수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모든 백제의 무덤 풍속은 부장품을 적게 내는 밭자풍습입니다. 게다가 무덤 구조가 도굴에 취약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 무덤의 부장품에 대해서는 별로 새로울 게 없다고 한다든지 초라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6C 전반에 백제의 고급 기술이라든지 금속공예 기술을 고스란히 우리가 알게 되었고 이러한 점에서 만약에 우리에게 무령왕릉이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백제 문화에 대해서 갖고 있는 지식과 정보는 지극히 낮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이 1400여년 만에 우리 앞에 들어낸 백제 문화의 진수 그것은 세련된 백제 문화의 부활로 이어졌다. 백제 문화에 대한 20C 인식의 대전환이었다. 오랜 세월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무령왕의 일생도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났다. 무령왕과 왕비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석이 나온 것이다. 귀여운 모습은 한 진묘수. 무덤방을 지키는 바로 이 진묘수 앞에 무령왕 부부의 묘지석이 놓여 있었다.
 

 
 

무령왕의 살아생전 이름과 사망년도 나이 등이 새겨진 묘지석이었다. 묘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의 생전 이름은 사마. 523년에 6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462년에 태어나 마흔 살에 왕이 된 것이다. 무령왕은 불혹에 접어든 마흔이 되어서야 국왕이 된 늦깎이 왕이었다.

“마흔이 되어서야 왕위에 올라 23년간 웅진시대를 이끌었던 백제의 무령왕, 그는 살아생전에는 사마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무령은 죽은 뒤에 붙여진 시효입니다. 바로 이 묘지석이 발견되면서 그동안 신비한 왕으로만 알려졌던 무령왕의 이력이 밝혀진 셈이죠. 그런데 여전히 뭔가 허전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무령왕이 마흔이 될 때까지의 행적이 빠져 있습니다. 묘지석에 기록되지 않은 무령왕의 40년 세월. 거기에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남아 있는 무령왕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규슈 북부의 요부코 항.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의 교역창고로 번창했던 곳이다. 놀랍게도 이 일대의 작은 섬마을에서 무령왕 탄생설화가 전해져왔다. 요부코 항에서 배로 달려 십분 쯤 이면 도착하는 가카라시마라는 섬마을. 100여 가구 남짓한 가카라시마(가당도)에는 지금도 무령왕의 탄생지로 전해지는 곳이 있다. 절벽으로 이루어진 가카라시마 동쪽 끝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면 오비야라는 곳이 나온다. 절벽이 파도로 침식되어서 생긴 해변 동굴이다. 가카라시마 마을 주민들은 바로 이동굴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동굴에는 작은 제단까지 갖추어 놓았다. 오랜 세월 마을에서 전해 내려온 무령왕 탄생 설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사쿠모토 이와오 가카라시마 주민
“한국에서 건너왔는데 이곳을 지나가다가 산기가 있어서 여기에 배를 세우고 동굴 속에서 출산했다고 들었습니다.”

무령왕이 일본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다는 가카라시마의 전설. 왜 이 마을에 무령왕 탄생 설화가 전해오는 것일까. 뜻밖에 일본서기에 그 내막이 실려 있었다.10) 무령왕은 각라도에서 태어나 이름을 사마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윤용혁 교수 공주대 역사교육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출생연대 여기에 나오는 기록이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 거기서 지석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지석이 나오면서 무령왕의 출생년도가 확인이 되었는데 양쪽의 출생년도가 사실상 일치하는 연대가 나왔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자료의 신빙성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출생년도가 거의 일치해서 신빙성을 얻게 된 일본서기의 무령왕 탄생설화, 여기엔 무령왕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무령왕의 어머니는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여인이다. 일본서기에서 무령왕의 아버지라고 밝힌 개로왕은 한성시대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다. 개로왕이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진 것은 고구려의 위협에 시달리던 462년이다.11) 개로왕은 아우인 곤지를 일본으로 파견하려고 했다. 이때 곤지가 형수를 데려가게 해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둔 개로왕과 그의 아우 곤지 사이에 보이지 않은 신경전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일본으로 향하던 곤지 일행은 462년 6월 가카라시마에서 정박한다. 출산이 임박해진 개로왕의 아내가 산통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가카라시마의 이 동굴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것이 탄생설화의 핵심이다. 여기엔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이도학 교수
“대외적으로 사회적으로 곤지가 그러지만 알고 보면 한성말기 대왕이었던 ‘개로왕의 아드님이시다’라는 메시지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무령왕의 혈통적인 어떤 열쇠  이것을 이제 불식시키고 무령왕의 정당성 또 왕에 오르게 된 정통성 이런 것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무령왕의 성장과정 역시 베일에 싸여 있다. 어린 무령이 한성으로 돌아왔다면 무령은 한성과 운명을 함께 했을 것이다. 백제의 수도 한성은 고구려의 공격으로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 것은 475년. 무령의 나이 14살 때이다.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 군은 성 안에 있는 개로왕과 왕자들을 모두 죽였다(狛大軍來 國王及大后 王子等 皆沒敵手). 그렇다면 곤지가 무령을 일본 본토로 데려가 키웠을 가능성은 없을까.
 


개로왕의 동생 곤지(昆支, ?~477)는 일본에서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오사카 남부 하비키노시 아스카베마을. 이곳의 곤지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열리는 마쓰리는 아스케베 신사에서 시작된다. 먼저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이 든 아스케베 마을의 연장자들. 제사는 조상의 위패를 모신 아스카베 신사의 사당 앞에서 진행된다. 
 
“지금부터 2007년 아스카베 신사 가을 마쓰리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제사 의식을 통해 아스카베의 조상신은 마을 주민들과 하나로 이어진다. 150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아스카베마을 주민들이 공경하며 모셔온 조상신은 누구일까. 아스카베 신사 입구에 신사의 역사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있다. 이 안내문에 조상신의 이름이 나온다. 아스카베의 조상신은 백제에서 건너온 곤지, 놀라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우에다 마사이키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
“아스카베 신사의 제신은 현재 소사노오노 미코토이지만 일본 고서에는 무령왕의 아버지라고 되어있습니다. 곤지왕이 원래 제신으로 모셔져 있었습니다.”

무령왕이 곤지의 손에서 자란 것은 아닐까. 무령의 성장과정을 짐작케 하는 신사의 옛 정문. 마을 입구에 정문이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원래의 아스카베 신사는 크고 웅장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곤지가 아스카베 지역에 미친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뜻이다. 곤지가 일본에 머문 기간은 약 15년. 아스카베는 대체 어떤 곳이었을까.
 


마을 뒤쪽에 포도재배단지로 올라가면 백제의 영향을 보여주는 무덤군이 밀집해 있다. 최근 발굴된 간논즈카 고분. 무덤이 전형적인 백제 양식인 橫穴式(횡혈식) 석실 형태를 띠고 있다.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 역시 일본 고분에선 출토되지 않는 백제식 토기로 밝혀졌다. 아스카베의 수많은 백제식 무덤은 포도재배단지를 조성하면서 허물어졌다. 다행스럽게도 다섯 기의 백제식 고분이 남아 있어 아스카베 지역이 백제인의 거주지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스카베 마쓰리가 열리는 10월 16일은 곤지의 제삿날이다. 죽어서 아스카베 조상신의 자리에 오른 곤지는 일본에 머문 15년 동안 아스카베 일대를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신도 요시오 아스카베 주민 대표
“한반도 백제에서 건너온 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아스카베 마쓰리는 1500백여 년 전 이 지역을 개척한 곤지를 기리는 축제인 샘이다. 만약 곤지가 무령왕을 이곳에 데려와 키웠다면 무령은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랐을 것이다. 출생부터가 예사롭지가 않은 무령왕의 40년. 어쩌면 무령이 상당기간을 아스카베에서 보낸 탓에 베일에 가려졌던 것은 아닐까.

“결국 무령왕 탄생설화의 핵심은 무령왕이 왕위 계승에 있어서 정통성이 있는 국왕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럴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지요. 무령왕은 백제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본에서 태어나서 백제에 돌아와서는 피비린내 나는 귀족들의 암투를 지켜봤을 겁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왕위에 올랐을 땐 경륜을 갖춘 불혹의 나이, 무령왕은 경륜 있는 지도자답게 그동안에 꿈꿔왔던 백제 중흥 프로젝트를 실천해 옮겼습니다.”
 


무령왕의 백제 재건 프로젝트
■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다! - 고구려 격파와 일본 외교

무령왕의 백제 중흥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502년 11월. 무령왕은 자신의 국정운영 방향을 담은 첫 번째 지시를 신하들에게 발표한다.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선언이었다.12) 첫 공격 목표는 고구려의 수곡성. 무령왕의 수곡성 전투는 더 넓은 영토를 개척했던 백제의 옛 영광을 되찾겠다는 신호탄이었다. 삼국사기에 실린 고구려 수곡성의 위치는 지금의 황해도 신계군13). 이미 백제는 고구려에 한강을 빼앗긴 상황, 그런데 어떻게 황해도 신계군을 공격한 것일까?

정재윤교수 공주대학교 사학과
“황해도 지역과 한강 지역 그리고 차령산맥 이북지역에 걸쳐서 이 지역들은 고구려와 백제에 치열한 접경지역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런 불안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완전하게 한강지역으로 백제가 중심을 옮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충분하게 황해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수많은 고구려와의 전쟁14). 수세적인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러한 전투 기록은 고구려와의 대등한 전투를 벌일 만큼 백제의 국력이 회복됐다는 증거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가는 무령왕의 백제중흥 프로젝트는 경제개혁으로 이어졌다. 무령왕은 농토 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농토를 개간하는 국가적인 대역사를 추진하려면 먼저 해결해야할 급선무가 인력문제였다.
 


무령왕 10년, 백제는 전국에 실업자 조사를 시작했다. 농지가 없어서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실업자를 파악해 농토개간 사업에 투입하라는 무령왕의 지시가 떨어진 것이다. 농업기간 시설도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4C에 완공된 벽골제는 농업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백제의 저수지 시설이다. 무령왕은 벽골제의 규모를 더욱 확장시키고 개간한 농토에는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었다. 가뭄 걱정하지 않고 저수지에 저장된 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8C 후반에 제작된 여지도, 전라도 지역에 큰 저수지 시설이 표시돼 있다. 그때까지 벽골제는 큰 저수지로 표시되어 있었다.

이도학교수 
“농업생산력에 증대를 기하기 위해서는 이 저수지의 규모도 늘린다든지 또 많은 저수지도 축조를 해야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아마도 근초고왕 때에 크게 축조했던 김제의 벽골제라든지 이런 저수지들도 무령왕 대에 와서 보수가 되고 확장돼 나가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수지가 생기는 만큼 농토도 늘어났다. 개간된 농토에는 어김없이 물길이 흘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령왕은 새로운 난관에 부닥친다. 농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실업자만으로는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무령왕이 찾아낸 해결방안은 대가야의 기문과 대사를 공격하는 남진정책으로 나타났다. 기문과 대사는 한성이 함락되면서 그 틈을 노린 대가야에 빼앗긴 백제 영토다. 기문은 남원, 장수, 진안에 해당하고 대사는 섬진강 하구의 하동이다.

노중국교수 계명대학교 사학과
“경제 기반 확대하는 방법으로 한 것이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입니다. 섬진강 유역쪽으로 진출을 합니다. 그래서 기문 남원으로 비정되어 있고, 대사 하동으로 봅니다. 섬진강 하구에  하동, 그 다음에 광양지역, 이 지역을 이제 백제가 차지하게 되고 그럼으로 경제기반을 넓힙니다.” 
 


무령왕의 공격은 성공했다. 섬진강 하구의 하동까지 되찾았다. 이로써 무령왕의 농토개간 사업은 웅진의 금강과 영산강 유역에 이어 섬진강 유역으로 확장됐다.

무령왕 12년(512년). 백제 왕성에 또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고구려의 대군이 국경을 넘어 백제 지역을 장악했다는 보고가 도착했던 것이다. 고구려와의 싸움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3천, 무령왕은 직접 출정하겠다고 선언했다.15) 고구려 군은 적은 수의 백제군을 얕잡아 보았다. 무령왕은 고구려 군을 방심하게 만든 다음 그 틈을 타고 급습했다.16) 허를 찌르고 들어간 무령왕의 전략은 적중했다. 고작 3천명에 군사를 거느린 무령왕이 고구려의 대군을 격파한 것이다. 무령왕이 직접 출정해 거둔 이 승리는 백제의 대내외적 위상에 분기점을 제공하는 일대사건이었다.

“무령왕의 시대는 웅진백제의 전성기였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화려한 왕관 장식은 무령왕이 다시 일으켜 세우고 꽃피운 백제문화를 대변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무령왕의 백제재건 프로젝트가 한반도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겁니다. 환갑을 맞이한 서기 521년 무령왕은 집권 20년을 정리하는 국제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백제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온 나라 백성들의 눈길이 백제왕성으로 쏠렸다. 521년은 무령왕의 환갑이었다. 마흔에 왕위에 올라 국정을 이끈 지 20년. 무령왕의 백제중흥 프로젝트는 어느 덧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었다. 환갑의 무령왕은 얼굴 가득 여유가 넘쳤다. 바로 그해 무령왕은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중국의 양나라 수도였던 난징. 이곳에 시립 박물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6세기에 제작된 양직공도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을 그린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 백제의 사신에 모습이 있다. 무령왕이 보낸 국서를 전하러 온 백제 사신이다. 무령왕의 국서 내용은 양나라의 역사서와 삼국사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여러 번 고구려를 깨뜨렸으며 다시 강국이 되었다(累破高句麗 更爲强國)”  傳 : 三國史記(武寧王 21년, 521년)

무령왕이 전하고자 한 국서의 핵심 내용은 아홉 글자에 담겨 있었다. ‘누파고구려 갱위강국’. 그것은 마침내 백제가 고구려를 크게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음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무령왕의 선언이었다.


이도학 교수
“자신감에 회복을 대내외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구절이 되는 것이죠. 더구나 양나라에 보내는 사신, 소위 고구려 수군 때문에 다시 돌아오고 절절매는 이런 상황이었던 것이죠. 이제는 양나라에 사신까지 보내니까 대외적으로 백제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공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고 또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자 하는 그런 자신감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무령왕의 위상은 일본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2001년 12월 무령왕의 일본에서의 지위를 밝히는 놀라운 기자회견이 있었다.

아키히토 일본천황 기자회견
“나 지신 칸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일본천황과의 무령왕에 피가 흐르고 있다는 아키히토 일본천황에 고백. 이 놀라운 고백은 속 일본기라는 역사서에 근거한 것이다.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의 후손이 현 일본 천황과의 시조인 칸무천황의 어머니라는 것이다.17) 순타태자의 일본 파견은 무령왕의 대 일본정책이 강화됐음을 의미한다. 무령왕은 일본을 백제의 정치 문화적 영향력 아래 묶어둔 것이다.


그 증거는 일본의 국보로도 남아 있다.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의 스다하치만 신사. 이곳에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청동거울이 있다. 1951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청동거울 거울 뒷면에 아홉 사람의 인물이 새겨져 있는 인물화상경. 거울 바깥 둘레에는 제작 경위를 밝히는 마흔 여덟 자의 명문이 적혀 있다.


거울을 받은 사람은 일본에 있는 남제왕 즉 계체 천황이다. 보낸 사람은 사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석에 적힌 무령왕의 생전 이름과 획하나 다르지 않고 정확히 일치한다. 고대의 청동거울은 상황이 그 아래 왕에게 내리는 신임의 표식이다.

권오영 교수 한신대학교 국사학과
“만약에 이 사마가 정말로 백제의 무령왕이라고 한다면 계체, 등극하기 전의 계체와 백제의 무령왕이 이미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한다면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리고 계체천황의 재위기간 동안에 왜 이렇게 두 인물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백제와 왜 왕권의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겠습니다.”

무령왕의 관심은 한반도 밖으로 뻗어 나갔다. 적극적인 세계화 전략으로 동북아시아 정세를 주도했다. 당시 동북아에서 무령왕이 차지한 비중은 묘지석의 명문으로 남아있다. 무령왕의 죽음을 나타내는 崩(황제의 죽음을 나타냄)자,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글자다. 523년 5월 무령왕이 돌아가셨다.18) 애도의 물결 속에 찬란하게 꽃피운 무령왕의 시대는 붕자에 담겨졌다. 무령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이루고 간 세상은 남았다. 무령왕은 백제인 들의 마음속에 온 나라 백성들의 꿈을 이루어 준 위대한 중흥군주로 기억됐다.

‘누파고구려 갱위강국’
“백제가 고구려를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됐다는 뜻입니다. ‘갱위강국’ 이 네 글자는 무령왕이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꿈과 도전이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이 ‘갱위강국’의 꿈, 무령왕은 집권 20년 동안 오직 이 꿈을 향해서 뛰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무너져가던 백제가 다시 강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몸을 낮추고 치열하게 부국강병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실천했던 무령왕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500여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무령왕의 일생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준비한 국가 발전 전략이 미래의 역사를 결정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 저작권은 KBS <한국사 전>에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절대로 상업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시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한국사를 제대로 대접받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주석
 
1)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의 죽음은 웅진시대에 일어났다.
2) “좌평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佐平苩加據加林城叛)”  傳 : 三國史記
3) “백가가 나와 항복하니 왕이 그를 베어 백강에 던졌다.(苩加出降王斬之 投於白江)”  傳 : 三國史記
4) 三國史記 동성왕 21년 499년.
5) “나라 안에는 여덟 개의 큰 성씨들이 살았는데 사씨, 연씨, 협씨, 해씨, 진씨, 국씨, 목씨, 백씨 등이 그들이었다.”  傳 : <通典> 백제조
6) “왕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진수케 하였으나 백가가 가지 않으려 병을 이유로 사퇴했다. 왕이 허락하지 아니했다.”  傳 : 三國史記
7) “백가가 왕을 원망하더니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찌르게 했다.(怨王 至是 使人刺王)”  傳 : 三國史記(동성왕 23년, 501년)
8) “백제의 동성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國人이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  傳 : 日本書紀
9) “왕이 친한 신하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연회를 베풀고 밤새도록 환락을 다하였다.”  傳 : 三國史記
10) “임신한 부인은 개로왕의 말처럼 축자의 각라도에서 출산하였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사마라 하였다.”  傳 : 日本書紀
11) “임금의 부인을 주시고 그런 후에 일본에 보내주십시오.(願賜君婦 而後奉遣).”  傳 : 日本書紀
12) “달솔 우영을 시켜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치게 하였다(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傳 : 三國史記
13) “단계현(현재 황해도 신계)은 원래 고구려의 수곡성현이다.”  傳 : 三國史記
14) 무령왕 2년 11월, 고구려 변경 공격. 무령왕 3년 9월, 고목성을 공격한 말갈 격퇴. 무령왕 4년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를 황악에서 격퇴.
15)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원산성을 깨뜨렸다.”  傳 : 三國史記
16) “왕이 기계(奇計)를 내어 갑자기 습격하여 고구려 군을 크게 깨뜨렸다(王出奇急擊 大破之).”  傳 : 三國史記
17) “황태후의 성은 화씨고 이름은 신립이다.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이다(皇太后姓和氏 諱新笠 后先出自百濟武寧王之子純陀太子).”  傳 : 續日本記 칸무천황
18)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武寧王)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崩).”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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