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6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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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대탐험] 5.역사왜곡의 현장 - 경기신문" 중 국동대혈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고구려대탐험] 6.훼손되는 고구려 유적지"에 잘못 올려 있어 이리로 옮겼음.

◇국동대혈

[고구려대탐험] 5.역사왜곡의 현장
우리 민족 정체성 흔들 역사관 정립 시급
고구려문화유적탐사단  |  webmaster@kgnews.co.kr 승인 2008.01.11 
 
지우고 지우고 또 지워도 역사는 알고있다 700년전 비밀을…

고구려는 삼국시대의 가장 큰 한 축으로서 지금은 잃어버린 영토인 저 넓은 만주 벌판과 간도지방을 호령했던 나라다. 고구려는 주변의 강대국들과 싸우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강인한 모습을 표출했다.

본지 탐사단이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700여년전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무참히 짓밟히다 못해 우리의 미래까지 도난당하고 있음을 생생히 목격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유적지에는 고구려를 ‘중국 북동부의 지방정권’,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 등으로 표기한 안내판이 붙어 있고, 박물관에는 만리장성을 북한의 평양성까지 연장해 놓은 지도가 버젓이 전시되고 있다.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이곳을 찾는 중국인과 외국인 등에게 동아시아 대제국이었던 고구려의 역사가 누구의 역사로 기억할까?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고구려에 대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고구려 역사가 없다면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웅혼한 고구려인들의 혼백이 묻힌 땅, 그러나 찬란했던 그 역사가 무참히 짓밟히는 땅.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되찾으리라 기원해본다. 
 
◇국동대혈

집안 국내성(國內城)에서 동쪽으로 17㎞ 떨어진 높은 산중턱에 위치한 ‘국동대혈’(國東大穴)은 해마다 10월이면 고구려왕이 군신들을 거느리고 ‘동맹’을 지내던 곳이다. 수혈과 통천혈 사이에 애혈(愛穴)이 있는데 얼핏 지나치면 잘알아볼 수도 없을 작은 바위굴 앞에 ‘장상애’(長相愛)라는 붉은 글씨가 씌여진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유리왕이 한인 부인을 쫓아 이곳까지 왔다가 잡지 못하자 그 마음을 달랠길 없어 이곳에 올라 ‘황조가’(黃鳥歌)라는 노래를 지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유리왕이 떠나는 한족 부인을 잡지 못해 황조가(黃鳥歌)를 불렸다는 애혈(愛穴) 안내판
 
안내판에는 유리왕 3년에 한인 여자를 강제로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또한 국동대혈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리왕 연대가 맞지 않는다. 유리왕 3년은 고구려 도성이 환인의 홀승골성이었다. 유리왕이 집안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유리왕 22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황조가를 지은 연대가 유리왕 3년이면 당시 도성이 환인이었을 텐데, 안내판에는 집안을 도성으로 적고 있다. 

또 한인부인이 도망을 갈 때 이곳(집안)으로 왔을 가능성이다. 도망을 간다면 자기 고향쪽으로 갈일이지 왜 북쪽 산골로 도망을 쳤을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처럼 중국은 연대를 보더라도 유리왕 3년에 생긴 일을 동왕 22년에 붙이면서 날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 10월 고구려 왕들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국동대혈(國東大穴) 장상애(長想愛).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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