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tcha.com.ne.kr/king/goguryo/king6.htm
지도 출처 : http://korea.kr/newsWeb/pages/brief/categoryNews2/view.do?newsDataId=80082962

태조왕(太祖王)


고구려 6대 왕으로서 서기 53년 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 함)이 즉위하니, 이름은 궁(宮)이라 하고, 어릴 때 이름은 어수(於漱)라 하였다. 왕은 유리명제(琉璃帝)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부여사람이다. 재위는 93년 동안 했으며, 119세에 죽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장수한 왕이다. 그리고 나라의 시조인 태조왕이라 하였다.

모본왕이 포악하여 결국 신하 두로(杜魯)에게 피살된 후 그의 아들 태자 익(翊)이 어리고 똑똑하지 못하여 나라를 다스릴수 없겠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궁(宮)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운 것이다.(AD 53년)  왕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줄 알았고, 어려서도 나이보다 숙성하였다. 왕으로 죽위할 때 나이가 7세였으므로 왕의 어머니가 대신하여 나라 일을 맡아 보았다. 연호를 융무(隆武)라 하였다. 

55년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漢)나라 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56년 7월 동옥저(東沃沮)를 쳐서 토지와 성읍을 취하였다. 그 지경(地境)이 동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68년 8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자 그를 우태(于台)에 명하였다. 

72년 2월 관나부 패자(貫那部 沛者) 달가(達加)를 보내어 조나(藻那)를 쳐서 그 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74년 10월 왕은 환나부  패자(桓那部 沛者) 설유(薛儒)를 보내어 주나(朱那)를 쳐서 그 나라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아 고추가(古鄒加)를 삼았다.

98년 왕은 동쪽의 책성(柵城)에 행차하였다.

105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요동(遼東)에 쳐들어 가 6현을 탈취하였으나 요동태수 경기에게 결국 패하였다.

108년 봄에 큰 한재가 들어 여름까지 계속되었으므로 적지(赤地)가 되고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여 왕은 사자를 보내어 이를 구제하였다.

118년 예맥(濊貊)과 같이 한(漢)나라 현도(玄)를 쳐서 화려성 (華麗城)을 공취하였다. 

121년 1월에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아 예맥의 장수를 죽이고 병사와 말과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아우 수성(遂成; 차대왕)에게 군사 2천여명을 이끌고 풍환, 요광 등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수성은 먼저 한(漢)나라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니 그들이 믿었다.  그러자 수성은 험한 곳에 군사를 숨기고 한나라 군사를 막으면서 몰래 군사 3천명을 보내어 현도와 요동을 공격케 하였다. 군사들은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였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동군 소속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태수 채풍(蔡諷)을 살해하였고, 12월 마한(馬韓), 예맥(濊貊)의 1만여명의 기병을 이끌고 현도성(玄城)을 포위하자 부여왕이 아들을 파견하여 한의 군사와 더불어 대항하니 패하였다.

138년 3월에 왕의 동생 수성이 질양에서 사냥을 하며 7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고 놀기만 하였다.  7월에는 또 기구라는 곳에서 사냥을 하며 5일만에 돌아왔다.  

146년 8월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10월에 우보 벼슬에 있던 고복장(高福章)이 왕에게 말하였다.  "왕제 수성이 왕위를 탐내어 반란을 꾀하고 잇습니다. 어서 그를 죽여야 합니다."  그러자 왕은,  "나는 이미 늙었소. 또 수성은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웠으므로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마시오."  하였다.  "수성의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만일 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면 뒷날 대왕의 자손들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게서는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만 알고, 죄 없는 자손들에게 해가 미칠것은 생각지 않으시니 한번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고 복장이 말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12월에 왕은 수성(遂成)을 불러,  "내가 이미 늙어서 나라일에 게을러졌다. 이제 하늘의 운세를 보니 너에게 운이 있구나. 너는 안으로 나라 일을 보살피고 밖으로는 군대를 잘 다스리며 오랫동안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니 신하와 백성들이 원하는 걸 채우게 할 수 있으리라. 내가 물러날 테니 네가 즉위하여 길이 나라를 번성시키거라."    이와 같이 말하고 왕위를 물려 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165년(신대왕 1년) 119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후에 시호를 태조대왕이라 하였다. 태조왕 때부터 중국의 사료에도 명확한 것이 많고, 이후 고구려 왕 세차()의 확실한 연대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춘 것은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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