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223.22017202231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5> 해상왕국의 항구
지금의 김해평야는 금관가야 항구 중 하나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2-22 20:35:20/ 본지 17면

지난 주에는 김해 회현동패총에서 발견된 한 닢의 동전을 통해 해상왕국의 가야에 대해 얘기했습니다만, 바로 그 해상왕국의 항구가 회현동패총 서편의 봉황대유적과 장유면 율하리의 관동리유적에서 각각 발견되었습니다.

봉황대유적

가야시대 선착장으로 되살아난 김해 봉황대 유적.
 
김해 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과 봉황대 사이의 습지에 위치한 봉황대유적은 가야민속촌의 조성에 앞선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습니다. 2002년과 2003년의 2차례에 걸친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의 발굴조사에서 항구 관련의 흔적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사면에 자갈을 깔아 배를 끌어 올릴 수 있게 했던 시설, 해반천 쪽의 바닷물이 봉황대 쪽으로 범람치 못하도록 목재와 석재를 점토에 섞어 다지고 군데군데 나무못까지 박아가며 쌓아올린 기다란 둑 모양의 호안시설, 그 안쪽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높은 마루의 창고형 건물자리들이 드러났지요. 건물의 기초로는 돌이 아닌 나무가 사용되었습니다. 습지에 가라앉지 않도록 궁리했던 가야인의 건축학적 지혜가 빛나는 대목입니다. 결국 최초로 확인된 해상왕국의 항구 때문에 민속촌 조성 계획은 철회되었고, 물을 채우고 작은 배까지 띄운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되었습니다. 발굴조사 탓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도 들었지만, 근거도 없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급조된 민속촌보다 확실한 역사고고학적 사실에 기초한 복원과 정비는 그만큼 당당하고 생명도 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관동리유적


김해 관동리 유적 복원도.
 
김해시 장유면 율하신도시 조성 사업지 동북단에 남해고속도로와 율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관동리유적은 봉황대유적 보다 더 확실한 가야항구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05년 경남고고학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항구의 호안시설, 호안시설 앞에 다리처럼 돌출되어 배를 댈 수 있게 했던 선착장 같은 잔교, 여러 채의 창고형 건물지, 우물이 있는 마을과 고분군에 배후도로까지 발견되었습니다. 폭 6m 규모의 배후도로는 돌을 깔고 진흙을 다져 노면을 만들고, 도로 양측에 배수를 위한 도랑이 설치되었습니다. 마침 근처에서 공사가 한창인 부산신항의 배후도로를 연상케 합니다. 지금은 김해평야로 변했지만 고김해만(古金海灣)의 포구에 실재했던 가야항구의 하나가 발견되었던 겁니다.

김해평야는 바다

제가 공부할 때는 넓은 김해평야의 농업 생산력으로 가야왕국이 발전했다고 쓰면 백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학생들이 그렇게 쓰면 빵점입니다. 가야시대의 김해평야는 바다였기 때문입니다.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던 내해로, 봉황대와 관동리 일대는 가락국(금관가야)의 항구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산처럼 수심이 깊고 밀물 썰물의 차가 적은 곳이 좋은 항구입니다만, 이것은 스크루를 돌려 추진력을 얻는 배가 고안된 산업혁명 이후의 일입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전의 수 만년 동안 인류가 사용해 왔던 최적의 항구는 정반대라야 했습니다. 갯벌이 발달하고, 밀물 썰물의 차가 커야 했습니다. 밀물 때 내륙 깊이 들어와 배를 얹혀 두고, 짐을 내리고 물과 식량을 보충하고, 다시 밀물이 되면 배를 띄워 먼 바다로 나가 항해하는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고대 일본의 가요를 담고 있는 8세기의 '만엽집(萬葉集)'은 지금 메트로폴리스로 변한 오사카에서 '밀물이 들어 왔으니, 배 띄워 먼 바다로 나가자'는 노래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항구가 김해시내와 장유면에 있었던 겁니다. 봉황대유적 바로 옆의 해반천(海畔川)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내였고, 고려 말에 왜구가 김해읍성 바로 앞 갈대 숲 속에서 튀어나와 미처 방비할 틈이 없었다는 기술도 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는 남해안의 해운에서 얻어지는 이익의 전부를 김해가 차지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김해는 남해안은 물론 전국 최대 항구의 하나였습니다. 김해의 바다 해(海)는 그런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김해평야에서 가야의 무역선이 인양될 날을 기대합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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