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427.22016195017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14> 가야의 성형수술-하
여자·아이 등 사회적 약자 이마 눌러 두개골 변형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4-26 19:55:21/ 본지 16면

 

 

정상두개골                                                               가야인의 두개골 (성형 두개골)

낙동강 가의 김해 예안리고분군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보기 드물게 많은 인골(人骨)이 발견되었다는 점 입니다. 원래 우리 토양의 성질 상 고분의 인골은 그리 오래 남지 않습니다만, 어쩌다 예안리고분군은 습기가 아주 많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180여 기의 무덤에서 190여 구나 되는 인골이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190여구의 인골 중에는 아주 별나게 생긴 10구의 두개골도 확인되었습니다. 비교 사진과 같이 왼쪽의 정상 두개골에 비해 앞 이마가 심하게 후퇴한 오른쪽과 같은 두개골이 보입니다. 대부분의 인골은 그렇지 않은데 유독 이들 10구의 두개골들만 그렇게 생겼습니다. 치우칠 편(偏), 머리 두(頭), 앞이마가 한 쪽으로 치우친 편두(偏頭)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함께 출토된 190명은 같은 시대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체질은 비슷했었을 것이니까, 그렇게 태어났다기 보다는 10구의 두개골만이 후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두개골 성형이 행해졌던 결과입니다.

한 물 간 유행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두개골 성형의 인골들은 모두 4세기경의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에서만 출토된다는 점입니다. 예안리고분군은 이후 5~7세기에도 만들어졌지만, 5세기 이후의 고분들에서 이러한 두개골 성형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삼국지' 변진전에서 보이는 두개골 성형에 관한 사실은 3세기 후반 경까지의 사실로 기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국지'는 3세기 후반까지 가야 사회에 있었던 두개골 성형의 풍습을 기록했던 것이고, 예안리고분군의 인골 자료는 가야 사회에서 두개골 성형의 유행이 이미 한 물 갔던 시기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형은 부잣집 딸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두개골 성형을 했던 것일까요? 두개골 성형의 인골 10구 중 7구는 숙년 여성이었고, 2구가 장년 남성이었으며, 1구는 5~6세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예안리고분군에서는 출토된 190여구 인골의 평균연령은 40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두개골 성형의 인골은 어린이 1구를 제외하고, 모두 장년과 숙년으로 50~60세 정도의 연령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안리 마을의 평균수명보다 더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았다고 반드시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러한 두개골 성형의 인골이 출토된 무덤들의 부장품은 하나 같이 매우 빈약했습니다. 이러한 부장품의 내용으로 볼 때, 신분적으로 고위층이나 재력가 또는 높은 종교적 지위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또 여자와 어린이라는 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가난했던 예안리 마을에서도 또 약한 자의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흔한 철기 한 점조차 출토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출신이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삼국지'가 '지금 진한인(辰韓人)은 모두 편두'라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안리 마을은 신라의 전신인 진한이 아니라, 전기가야의 변한(弁韓)입니다. 두개골 성형의 풍습을 가진 진한인, 곧 신라 계통 사람들이 변한인, 곧 가야 사람들의 마을에 살면서 차별받던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형수술의 비극?

5~6세 어린아이의 두개골은 후두부가 열려 있었습니다. 아직 숨구멍이 채 막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앞이마를 누른 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정수리에서 뒤통수에 이르는 이음새가 열려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형수술의 실패였을 겁니다.

4세기대의 인골에서 이러한 두개골 성형 인골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30% 정도 됩니다. 이들은 피지배층 중에서도 또 하층 사람들이었고 약자들이었습니다. 노예였을까요? 아니면 두개골 성형의 특수한 풍습을 가진 다른 계통의 사람들이었을까요? 의문이 꼬리를 뭅니다.

다만, 지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러한 가야인의 편두는 보존 처리를 거쳐 현재 부산대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누구나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한번 찾아보시고 이리 저리 궁리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내나 애인들의 성형수술에 대한 열망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기 위해서라도….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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