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0889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1902 
오기가 된 듯한데 내용상 "당나라 고종 -> 당나라 장군 이적"으로 바꿨습니다. 
   따로 올라기가 애매해서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 ①②를 합쳐 올렸습니다.

고구려 건국의 비밀을 찾아서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 ]
07.02.07 11:14 l 최종 업데이트 07.02.07 11:14 l 김기동(kimkidong)

▲ 고구려 수도의 현재 지명과 위치 ⓒ 김기동

고구려는 처음 환인을 수도로 정하였으며 이곳에서 40년을 지낸 후, 제2대 유리왕 때 집안으로 옮겨 430년 동안 생활하게 된다. 그 후 제20대 장수왕 때 천도 한 평양에서 240년 동안을 지냈다.

▲ 방학봉,장월영의 [고구려,발해 유적지 소개] ⓒ 방학봉, 장월영 

제10대 산상왕과 제11대 동천왕 시기에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긴 사실과 고구려 수도의 위치에 관한 많은 의견들은 논외로 한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환인과 집안은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과 환인을 고속도로로 연결한다면 승용차로 3~4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

중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 하면 맨 먼저 광개토대왕비를 생각하지만, 환인은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집안보다도 더 오래된 고구려의 도읍지다.

고구려의 첫번 째 수도였던 환인은 청나라를 세웠던 만주족 자치지역으로, 조선족 인구는 현재 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환인지역에는 과거 비류수로 불렸던 혼강이 흐르고 있다.

고구려의 유적으로 산성이었던 오녀산성과 초기 적석총무덤군이 있는 상고성자, 평지성터로 추정되는 하고성자, 동명성왕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미창구장군묘가 있다.


▲ 오녀산성의 모습 ⓒ 김기동
 

▲ 오녀산성의 모습 ⓒ 김기동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의 산성으로 해발 820m 산 꼭대기에 위치한다. 남쪽은 낭떠러지이며, 사진의 뒤쪽인 북·동·남쪽 3면에 약 300m의 성벽이 있다. 오녀산성은 남북 1km 동서 300m로 축구장 약 300개 정도 크기의 산성이다.

▲ 오녀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 ⓒ 김기동
 
고구려를 세운 추모왕이 처음에는 오녀산 산성에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나라가 안정된 후에는 인근에 있는 하고성자 평지성으로 옮겨 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오녀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너무 심하여 평상시에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 광개토대왕비(좌측) 삼국사기(우측) ⓒ 김기동
 
고구려를 처음 세운 해모수와 하백의 아들 이름은 기록에 따라 다르다. 414년 장수왕이 만든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왕으로 기록되어 있고,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주몽과 동명성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인하여 광개토왕비는 1880년 전후의 시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므로 1880년까지는 주몽으로 불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까지도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고구려시대에 만든 광개토대왕비문에 새겨진 추모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야 한다.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왕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를 가르키는 말이다. 동명왕은 현재의 길림시 지역에 있었던 부여의 시조 였고, 추모왕은 고구려의 시조이다.

▲ 광개토대왕비(좌측) 삼국사기(우측) ⓒ 김기동
 
추모왕은 어디에서 왔을까?

414년 장수왕이 만든 광개토대왕비에는 북부여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1145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부여왕 해부루와 금와가 도읍을 동부여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인의 북쪽에 위치한 길림시에 있는 동단산 평지성터에서 발굴된 부여 귀고리와 환인의 무덤군에서 발굴된 귀고리의 유사성이 발견됨에 따라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환인으로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혼강(비류수) ⓒ 김기동
 
북부여의 도읍이었던 길림시에서 환인까지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정도이다. 2000년 전의 교통수단을 생각한다면 추모왕이 이동 중에 겪었을 어려움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환인에 도착한 추모왕도 오녀산성에서 비류수를 바라보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을 것이다. 북부여 금와왕과 대소왕자로부터 도망하여 환인에 도착한 추모왕은 처음에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생활하지만 3년 후인 추모왕 4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면서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게 된다.



고구려는 언제 건국되었을까?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
07.02.12 15:47 l 최종 업데이트 07.02.13 07:56 l 김기동(kimkidong) 

▲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환인의 모습 ⓒ 김기동

오녀산성에 오르면 환인의 광활한 분지와 혼강이 내려 보인다. 혼강은 인근에 환인댐이 건설됨에 따라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추모왕이 건넜다는 엄리대수는 어디였을까?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라는 물가에 다다라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이 어머니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말하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 떼가 물위로 떠올라,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좌측으로 보이는 현재의 혼강을 엄리대수로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추모왕이 강가에 이르러 물을 건너가려 할 때 뒤따라오는 군사에게 붙들릴까 염려되는 상황에서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쓰여 있다.

북부여의 군사가 추모왕을 뒤쫓아 왔다면 북부여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렇다면 엄리대수는 북부여 인근을 흐르는 북류 송화강 부근이거나, 아니면 환인 서북쪽에 위치한 통화를 흐르는 혼강 상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 환인 비류수에 도착한 추모왕 일행 ⓒ 강맹산 [고구려의 발자취]

추모왕은 북부여를 출발할 때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함께 하였으며, 남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재사, 무골, 묵거를 만나는 등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력을 갖추었으나 그 세력은 미약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모왕이 도착한 졸본 비류수(현재의 환인 혼강)부근에는 이미 부여에서 먼저 내려온 다른 세력들이 많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추모왕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졸본부여왕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 삼형제가 있었다면서, 부여왕은 추모왕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돼 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졸본부여왕이 죽고 추모왕이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가 처음 우태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우태가 죽은 뒤 북부여에서 도망온 추모왕과 결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모왕이 환인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기까지 환인 토착세력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오녀산성에서 바라본 비류수의 모습 ⓒ 김기동

추모왕은 고구려를 건국한 후 비류수에 채소 잎이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 상류지방에 사람이 사는 줄 알고 찾아 올라가 송양이 왕으로 있는 비류국에 도착하게 된다.
 
비류국에 도착한 추모왕은 비류국의 송양을 제압한 후 그 지방을 '다물도'로 칭하고 송양에게 비류지역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송양 세력을 고구려에 편입시킨다.

▲ 추모왕에게 항복하는 비류국의 송양 ⓒ 강맹산 [고구려의 발자취]

'다물'이라는 말은 과거의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추모왕이 환인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이 송양의 비류국이었다. 추모왕이 비류국의 지명을 '다물도'로 칭한 것은 과거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 과정은 유방이 세운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옛 만주 땅에 세웠던 한사군을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중국의 <후한서 고구려조>는 고구려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 오녀산성 안에 있는 주거지의 모습이다. 이곳에서 추모왕이 고구려의 개국을 선포하지 않았을까? ⓒ 김기동

고구려는 언제 건국되었을까?

추모왕은 기원전 37년 나이 22세에 나라를 세운 후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확정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기원후 668년에 당나라에 멸망하였으므로 705년간 지속된 것이 된다.

▲ 위만조선이 망한 기원전 108년 이전에 고구려가 존재하였다는 기록 ⓒ 「한서 지리지」

하지만 고구려의 건국 시기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다른 사실들도 많다.

<한서 지리지>에는 기원전 37년 이전에 이미 압록강 유역에 고구려라는 이름을 가진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을 설치할 때 현도군 내에 세 곳의 현(행정기구)을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고구려였다고 한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시기가 기원전 108년이므로 적어도 기원전 108년 무렵 고구려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 고구려가 900년이 되었다는 기록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

또한 <삼국사기> 비기에는 고구려가 900년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중인 668년에 당나라 사신이었던 가언충이 '고구려의 비기에 900년이 안되어 80세 된 대장이 이 나라를 멸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가 있었고 지금 900년이 되었는데, 당나라 장군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원전 37년보다 거의 200년이나 앞선 시기에 고구려가 건국하게 된다.

중국의 일부 학자와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의 건국 시기를 기원전 277년으로 주장한다.

▲ 고구려 국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된 오녀산성 안에 있는 천지 ⓒ 김기동

아쉽게도 고구려인들이 동 시대에 직접 만든 광개토대왕비(중국 집안)와 중원고구려비(한국 충주)에는 고구려의 건국 시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다.

추모왕이 환인에 도착하여 나라를 건국하면서 이미 환인 비류수 부근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연타발, 소서노의 졸본부여나 비류지역 송양의 나라 이름이었던 고구려를 계속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

중국 연변대학 역사학부 발해사 연구소 제1대 소장 역임 후 현재 저술활동 중인 방학봉 교수님과 함께 2007년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 7박8일 동안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지 연변, 이도백하, 안도, 통화, 환인, 집안를 여행 하게 되었다. 

78세의 연세와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저와 동행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은 방학봉, 장월영의 <고구려,발해 유적지 소개 1995년>와 강맹산 편저 <고구려의 발자취 1982년>에 기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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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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