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99565

아들을 죽인 고구려 유리명왕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④]
07.03.22 17:08 l 최종 업데이트 07.03.22 17:27 l 김기동(kimkidong)

▲ 유리명왕이 수도를 옮긴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 남문 모습 ⓒ 김기동

유리명왕은 왕으로 즉위한 지 22년 후인 기원후 3년 고구려의 도읍을 환인에서 집안으로 옮긴다. 유리명왕은 처음 환인에서 왕으로 즉위한 후 왕권 강화를 위하여 주위의 귀족세력과 연합하기도 하고, 귀족세력을 제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유리명왕은 개인적으로 수많은 희생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야만 했던 유리명왕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편에 나오는 황조가 ⓒ 삼국사기

유리명왕은 왕으로 즉위한 후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주위 귀족세력과의 결혼을 통하여 왕권안정에 힘쓴다. 유리명왕은 왕으로 즉위한 이듬해 비류나부 다물후 송양의 딸과 결혼하여 귀족세력과 연합을 꾀하게 된다. 하지만 송양의 딸 왕비 송씨는 결혼 이듬해 아들을 낳다가 죽어서, 유리명왕은 다시 두 여자를 후처로 삼게 되는데 이 후처가 화희와 치희로 황조가의 주인공들이다.

유리명왕이 이궁(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집)을 두어야 할 정도로 힘이 강하였던 골천세력의 딸 화희는, 유리명왕이 사랑하는 미미한 한족 집안 출신 후처 치희를 질투하여 모욕을 주게 되고, 결국 차희는 친정으로 도망하게 된다. 자신의 왕권 유지에 기반이 되는 골천 세력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유리명왕으로서는 떠나는 차희를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야만 했던 유리명왕은 하늘을 나는 꾀꼬리를 보면서 황조가를 지으며 자신의 허약한 왕권에 눈물 흘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훨훨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아들을 죽여야만 했던 유리명왕

▲ 집안 환도산성 아래에 있는 산성하고분군 뒤쪽으로 환도산성을 둘러싼 산들이 보인다 ⓒ 김기동

▲ 집안 환도산성아래에 있는 산성하고분군 이곳에 유리명왕의 세 아들 무덤이 있지 않을까? ⓒ 김기동

유리명왕은 왕위에 있으면서 장성한 세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세 아들 중 두 명은 태자로 봉해진 후 죽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 세 명이 자신보다 먼저 죽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첫째 아들 도절이 죽었다는 사실만 있으며 둘째 아들 해명은 유리명왕이 자결을 명령하여 스스로 자살하였으며, 넷째 아들 여진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유리명왕이 수도를 옮긴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 성벽 ⓒ 김기동

유리명왕은 재위 19년부터 고구려의 도읍을 환인에서 집안으로 옮겨 왕권을 강화하고자 본격적으로 수도 이전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재위 19년 8월 나라의 제사에 제물로 쓰여질 돼지가 도망가게 되는데 돼지를 따라간 신하가 돼지 다리 힘줄을 잘라서 돼지를 잡아 온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리명왕은 돼지를 잡아 온 신하를 땅에 묻어 죽이지만, 한 달 후 자신이 죽인 신하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에 맏아들 태자 도절(都切)이 죽었다.

나라의 제사에 제물로 쓰여질 돼지가 도망갔다는 사실은 나라의 도읍을 옮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돼지를 도망가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환인에서 다른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겠다는 유리명왕의 계획은 돼지 다리 힘줄을 잘라 돼지가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한 신하들의 반대에 의해서 좌절되고, 이에 화가 난 유리명왕은 수도 이전에 반대한 신하를 죽이게 된다. 

하지만 도읍 환인에 살고 있는 기득권 세력들의 수도 이전 반대가 계속되자 유리명왕은 결국 한 달 만에 돼지 다리 힘줄을 자른 죄로 죽여버린 신하에게 공식 사과하면서 자신의 수도 이전 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그리고 4개월 후인 유리명왕 재위 20년 1월에 맏아들 태자 도절(都切)이 죽고 재위 22년 10월에 도읍을 환인에서 집안으로 옮기게 된다. 맏아들 도절(都切)의 이름은 한자로 해석하면 '도읍을 끊다'라는 의미이다. 도절(都切)이라는 이름은 수도 이전에 대한 찬반 세력의 다툼 과정에서 유리명왕의 맏아들 태자 도절(都切)이 희생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 유리명왕이 수도를 옮긴 집안에 있는 환도산성 궁궐터 이곳에서 유리명왕은 둘째 아들 해명에게 자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 김기동

유리명왕이 환인에서 집안으로 도읍을 옮길 때 둘째 아들 해명은 옛날 도읍인 환인에 남아 있었다. 이 당시 고구려 조정은 일종의 분조(특별한 상황에서 임금의 역할을 분리하는 것) 형태로 유지된 것으로 생각된다. 분조의 형태로 환인에 있던 태자 해명은 이웃나라 황룡국에서 선물로 보낸 활을 꺾어 황룡국왕을 난처하게 만드는 실수를 하게 된다. 

이에 유리명왕은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이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네게 칼을 내리노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결하도록 하라"며 아들에게 자결하도록 명령하여, 태자 해명은 땅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자살하였다.

아마도 유리명왕은 옛날 도읍 환인에 있는 귀족들이 아들 해명과 연합하여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두려워 아들 해명과 환인의 귀족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해 버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유리명왕이 올바른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렸다라고 쓰여져 있다. ⓒ 김기동

유리명왕은 고구려 제2대 왕으로 개인적으로는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고,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왕권을 강화시켜 고구려가 대국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아들 대무신왕에 이르러 고구려는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부여와의 싸움에서 대소왕을 죽이는 등 영토를 두 배 이상 확장할 수 있었다.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만든 광개토대왕비에는 재위 시절 업적이 훌륭한 4명(추모왕·유리명왕·대무신왕·광개토대왕)의 왕을 비문에 새겼는데 그 중 1명인 유리명왕은 올바른 이치로서 세상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

중국 연변대학 역사학부 발해사 연구소 제1대 소장 역임 후 현재 저술활동 중인 방학봉 교수님과 함께 2007년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 7박8일 동안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지 연변, 이도백하, 안도, 통화, 환인, 집안를 여행 하게 되었다. 

78세의 연세와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저와 동행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은 방학봉, 장월영의 <고구려,발해 유적 소개 1995년>와 강맹산 편저 <고구려의 발자취 1982년>에 기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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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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