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511.22016194855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16> 가야의 부뚜막 귀신-중
절기 따라 음식 바치고 특별의례 후 폐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5-10 19:59:44/ 본지 16면

진주 평거동 유적 부뚜막(왼쪽)과 김해 부원동 출토 복골.

김해 부원동 유적

김해시청과 그 주변은 가야의 부뚜막집자리가 여러 채 발견되었던 부원동 유적입니다. 1980년 동아대박물관의 발굴로 집자리, 조개더미, 무덤 등이 조사되었고, 각종 토기, 제사용 미니 토기, 석기, 골각기, 곡물, 옥장신구, 철기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아래에서는 토광묘와 돌널무덤의 청동기시대 문화층이, 위에서는 집자리, 조개더미, 돌덧널무덤의 철기시대 문화층이 확인되었습니다. 탄화된 쌀 보리 밀 조 팥의 곡물류, 복숭아 머루의 과실류, 소 멧돼지 사슴의 동물 뼈, 그리고 30여 종의 조개는 현대와 비슷했던 가야인의 식생활을 보여줍니다. 토기 중에는 바닥에 원형이나 장방형 구멍이 뚫린 시루도 있었습니다. 시루는 증기로 곡물을 찌던 토기입니다만, 출토 토기에서 시루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밥 같은 주식보다는 떡처럼 특별한 음식을 만드는데 가끔씩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설이나 추석 때 부뚜막에 솥을 걸고 물을 끓여 시루에 떡을 찌던 가야인의 모습을 그려보면 좋을 것입니다. 다만 부원동 유적은 개발이란 이름으로 소멸되었고, 김해시청과 주변의 건물들은 더 이상 가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가야의 부뚜막

부원동 유적의 집자리와 부뚜막은 아주 특별했던 가야인의 정신세계를 보여줍니다. 움집 안쪽 벽에 부뚜막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여러 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뚜막들은 한결 같이 서쪽 벽체에 붙어 있었습니다. 전통가옥에서는 출입구를 남쪽에 두고, 부뚜막을 북서쪽에 두어 남동풍으로 연기를 집밖으로 내보냈습니다만, 같은 배치의 부뚜막이 가야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삼국지' 변진전은 '가야의 귀신 섬김에 차이가 있었고, 부뚜막은 반드시 집의 서쪽에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부원동 유적의 집자리는 1~2세기경의 것이고, '삼국지'는 3세기 후반까지의 기록입니다. 부원동 유적 100~200년 후까지 사용되던 가야의 부뚜막을 중국인이 기록하였던 겁니다. 지금 진주 남강댐 아래에서 발굴조사되고 있는 평거동 유적에서도 부뚜막이 딸린 여러 채의 집자리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발굴조사자에 따르면 4세기경 가야의 것이라 합니다. '삼국지' 이후에도 가야에서는 부뚜막이 달린 집자리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부뚜막 귀신

가야인에게 부뚜막은 요리를 위한 공간만은 아니었습니다. 일정한 곳에 정해진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절기에 따라 음식이 바쳐졌으며, 특별한 의례를 통해 폐기되었던 것을 보면, 부뚜막에 대한 특별한 신앙이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지'의 부뚜막은 가야인의 신앙이 백제나 신라와 달랐다는 내용 뒤에 기록되었고, 부원동 유적에서는 부뚜막 가까운 데에서 사슴 뼈를 불로 지져 길흉을 점치던 복골(卜骨)도 출토되었습니다. 복골은 가야인의 신앙생활을 짐작케 하는 자료입니다. 가야의 문헌기록과 집자리란 삶터에서 전통시대의 부뚜막 신앙과 같은 내용이 확인되고 있는 겁니다. 부뚜막의 수명이 다 했을 때는 폐기를 위한 특별의례가 행해졌습니다. 고대 일본에서는 토기나 토제거울 또는 토제의 곡옥을 묻거나, 부뚜막 받침의 돌이나 토기를 뽑아 버리기도 하고, 아예 부뚜막을 부숴 버리는 경우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진주 평거동 유적에서도 받침 토기를 뽑아버린 것이 발견되었고, 한강 가의 미사리 유적에서도 부뚜막 화구부에서 청동제와 철제의 비녀가 출토된 적도 있습니다. 부뚜막을 다루던 여인네들이 자신의 귀중품을 바쳐, 부뚜막 귀신의 노고를 치하하고, 부뚜막의 수명이 다함을 위로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불에 대한 두려움에서 불의 성냄을 달래 보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고, 연말에 그 집 가족의 잘잘못을 하늘에 보고하러 가는 부뚜막 귀신을 달래 보려는 생각도 있었을 겁니다. 4세기 동진(東晉)의 도사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는 한 해의 끝 날이 되면 부뚜막 귀신이 천제(天帝)에게 가족의 선악을 보고하러 간다고 하였는데, 김해 부원동 유적의 고정식 부뚜막과 봉황대 유적의 이동식 부뚜막, 그리고 진주 평거동 유적의 고정식 부뚜막은 가야에도 이러한 신앙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