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 문화콘텐츠

백제/왕 2014. 10. 25. 09:59
출처 : http://bit.ly/1txV3OI

무왕

백제의 제30대 왕
생몰년 : ?-641
재위기간 : 600-641

무왕(武王)은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로 600년에 즉위하여 재위 42년(641)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또한 익산에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워 그곳에 궁궐을 세웠고 당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아들은 제31대 의자왕(義慈王)이다.
            
전문정보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무강(武康),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며,『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5 무왕 즉위년조에는 장(璋)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삼국유사』왕력편의 기록과 다르게『삼국유사』권2 기이편 무왕조에는 “무왕은 옛 책에 무강(武康)이라 하였으나 틀린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武康)이 없다”고 하여 무왕이 무강으로 불린 것이 잘못이라 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 소개된『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지모밀지(枳慕密地)로 천도하여 정사(精舍)를 새로 경영하였다. 정관 13년(639) 세차 기해 겨울 11월에 하늘에서 큰 뇌우가 쳤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정관 13년은 무왕 40년이므로 무광왕(武廣王)은 무왕이며 비슷한 음의 무강(武康)으로도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김주성, 2001) 

무왕은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5 무왕조, 『삼국유사』 권2 기이2 법왕금살조,『수서』권81 열전46 백제전 등에는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북사』권94 열전82 백제전에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기록하였다. 또한 설화적이기는 하지만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조에는 “과부인 어머니가 연못의 용(龍)과 교통(交通) 하여 무왕을 낳았는데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했다.”(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무왕을 법왕이 아들이 아닌 계보를 달리하는 왕족출신으로 이해하기도 한다.(노중국, 1984) 그리고 무왕의 출생에 대해 다양한 기록이 전하는 것은 600년에 왕위에 오르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왕은 즉위하면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과 외교를 이용하였다. 왕은 신라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여 전라북도 무주 방면과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서 수십년 동안 전장을 형성시켜 신라를 일방적으로 공격하였다. 또한 수나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려 하였는데, 재위 8년(607) 3월에는 신하를 파견하여 고구려 공격에 합의하기도 하였다. 무왕은 고구려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여 공격할 것처럼 하였으나 공격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수를 이어 당이 건국되자 무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에 대한 포위전략을 지속하였다.(이도학, 2003) 무왕의 재위기간 동안 백제는 국력이 회복되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왕권이 강화되었다.

한편, 무왕은 익산 지역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무왕과 익산과의 관계는 서동이 마를 캐던 시절과 익산에서의 활동, 즉위 후 미륵사의 창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 편찬된『관세음응험기』가 알려지면서 무왕이 수도를 사비에서 익산으로 옮기려고 시도하였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무광왕(武廣王)을 무왕으로 천도지인 지모밀지(枳慕密地)를 익산으로 풀이한 것이다. 그리고 익산에 남아 있는 거대한 건물터와 미륵사지 등은 익산을 특별한 지역으로 이해하게 한 근거가 되었다.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를 시도한 이유로 보통 왕권강화 조치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사비지역에 대대로 거주하고 있는 귀족들의 권력기반과 경제기반을 축소시키면서 무왕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대시킬 필요성에서 천도계획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노중국, 1988) 여기에 가야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던 신라에 대적하기 위해 군사적인 요새지인 익산을 경영하려 했다는 견해가 추가되기도 하였다.(유원재, 1996)

『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5 무왕 35년조에 따르면 봄 2월에 왕흥사(王興寺)를 완공하였다고 한다. 절은 강가에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고 왕이 몸소 불공을 드렸다. 이처럼 수도인 사비에 왕이나 왕실의 원찰로서 왕흥사가 역할을 하였다면, 천도를 계획했던 익산에는 미륵사(彌勒寺)가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미륵사는 당시 최대의 사찰이다.『삼국유사』권2 기이2 무왕조에 따르면 미륵사의 창건설화가 나온다. “어느 날 무왕이 선화왕비와 함께 지명법사가 거주하는 사자사(師子寺)로 가는 중이었다. 용화산(龍華山)의 아래 큰 못 가에 이르렀는데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기에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고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 허락하였다(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고 전한다. 미륵사(彌勒寺)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절로 위의 미륵사 창건기사는 설화적이기는 하지만 왕이 하생(下生)한 미륵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의 모습이다. 이것은 무왕이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륜성왕의 위엄을 갖추고 통치에 임하겠다는 것이며, 익산은 미륵이 하생한 이상적인 지역이라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노중국, 1988) 

그런데 『삼국유사』 무왕조의 세주에 의하면, “미륵사를 왕흥사라고도 한다고 하였다(額曰彌勒寺[國史云 王興寺])”는 기사가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5 법왕 2년(600)조에 “왕흥사를 세우고 승려 30여명을 두었다(創王興寺 度僧三十人)”라고 함으로써 법왕대에 왕흥사가 완공되어 승려가 주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권3 흥법3 법왕금살조(法王禁殺條)에는 “(법왕 2년에) 수도인 사비성[부여]에 왕흥사를 세웠다. 처음 왕이 절을 짓기 시작하여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무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법왕이 시작한 일을 이어서 몇 년을 지나 완성하니 그 사찰의 이름을 또한 미륵사라고 하였다.(創王興寺於時都泗泚城 [今扶餘] 始立栽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 라고 하여 왕흥사가 무왕대에 완성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부여의 왕흥사는 무왕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의 미륵사와 동일한 이름으로 나타나 혼란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 법왕 2년(600)조의 “창왕흥사(創王興寺)” 기사를 부여의 왕흥사 창건 사실로 보고, 『삼국사기』 무왕 35년(634)조의 “성왕흥사(成王興寺)” 기사를 익산의 미륵사 창건사실로 받아들인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또는 왕흥사와 미륵사는 서로 다른 사찰이지만 왕권의 상징인 왕흥사가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입김으로 미륵사라고도 불렸을 가능성(김주성, 1992), 미륵과 관련된 절이 왕권의 상징인 듯한 왕흥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김두진, 1992), 사비와 익산에 존재하던 두 개의 왕성(王城)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김선숙, 2007) 등이 제시되었다. 

무왕은 재위 42년(641)에 죽었으며, 익산에 있는 쌍릉에 피장된 것으로 보인다. 아들은 제31대 의자왕(義慈王)이다.


참고문헌

노중국, 1988,『百濟 政治史硏究』, 일조각.
유원재, 1996, 「百濟 武王의 益山經營」『百濟文化』25.
이도학, 2003,『살아있는 백제사』, 휴머니스트.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 武王 [或云武康 獻丙 或小名一耆篩德 (庚)申立 治四十一年]
제30대 무왕[혹은 무강․헌병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렸을 때의 이름이 일기사덕이라고도 한다. 경신년에 즉위하여 41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무왕)
武王[古本作武康 非也 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群童 群童親附之 乃作謠 誘群童而唱之云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 童謠滿京 達於宮禁 百官極諫 竄流公主於遠方 將行 王后以純金一斗贈行 公主將至竄所 薯童出拜途中 將欲侍衛而行 公主雖不識其從來 偶爾信悅 因此隨行 潛通焉 然後知薯童名 乃信童謠之驗 同至百濟 出母后所贈金 將謀計活 薯童大笑曰 此何物也 主曰 此是黃金 可致百年之富 薯童曰 吾自小掘薯之地 委積如泥土 主聞大驚曰 此是天下至寶 君今知金之所在 則此寶輸送父母宮殿 何如 薯童曰 可 於是聚金 積如丘陵 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 問輸金之計 師曰 吾以神力可輸 將金來矣 主作書 幷金置於師子前 師以神力 一夜輸置新羅宮中 眞平王異其神變 尊敬尤甚 常馳書問安否 薯童由此得人心 卽王位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會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國史云 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此傳之獨女之子 未詳]

무왕[고본은 무강이라고 썼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서울 남쪽 연못가(남지)에 집을 짓고 과부로 살다가 그 못의 용과 관계하여 낳았다. 어렸을 때 이름을 서동이라고 하였고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늘 마를 캐다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이 그로 인해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혹은 선화(善化)]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왔다. 마로써 마을의 뭇아이들을 먹이니 아이들이 그를 가까이 따랐다. 이에 노래를 지어 뭇아이들을 꼬여 부르게 하니,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두루 퍼져 대궐에까지 달하니 백관이 임금께 극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되었다. 떠나려고 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고 가게 하였다. 공주가 귀양살 곳으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고 장차 시위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였고 이로 인해 따라가다가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영험함을 믿었다. 함께 백제에 이르러 모후가 준 금을 내어 장차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게 도대체 무엇이오”라고 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이것은 황금이니 백년의 부를 이룰 것입니다"고 하였다. 서동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게 진흙처럼 마구 쌓여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는 천하의 진귀한 보물입니다. 그대가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이 보물을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서동이 좋다고 하였다. 이에 금을 모아 언덕과 같이 쌓아두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금을 수송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력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주는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두었다. 법사는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날라다 두었다. 진평왕은 그 신통한 조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여 늘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배하였다. 부인이 왕께 이르기를, “이 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진실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지명법사가 있는 곳에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하니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 삼회를 법상으로 삼아 전․탑․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은 여러 장인을 보내 이를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남아있다.[『삼국사』에는 이를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홀어미의 아들이라고 전하니 알 수 없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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