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4137.html

삼국시대 러브스토리 ‘서동요 설화’는 허구였다?
등록 : 2009.01.19 18:51수정 : 2009.01.28 23:28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백제 무왕대의 금제 사리 봉안기.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에 글자를 음각하고 붉은 안료로 칠해 절의 창건 목적과 건립 연대 등을 밝혔다. 익산/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미륵사터 서탑 출토품 공개
금판 사리 봉안기록 판독 결과 “639년 백제왕후가 건립 발원” 신라 선화공주 창건설 뒤집어
 
향가 ‘서동요’ 설화에 얽힌 ‘판도라의 상자’가 마침내 열렸다.

최근 해체 수리 중인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서탑 안에서 금판 모양으로 발견된 사리 봉안 기록을 판독한 결과, 서동요를 지어 퍼뜨려 신라 선화 공주와 결혼했다는 백제 서동 왕자(무왕)의 일화는 허구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드러났다.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가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선화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됐다’고 기록해 놓은 것과 달리, 백제의 좌평(고위급 관직) 사택적덕의 딸 출신인 백제인 왕비가 건립을 발원했다는 내용이 판독된 것이다. 무왕 때 왕비의 발원으로 절이 지어진 것은 맞으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이번 발견을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결혼이 사실상 후대에 꾸며진 허구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해석하는 분위기다. 이미 학계 일각에서는 오래전부터 무왕과 선화 공주의 결혼 시점으로 설정된 6세기 후반에 백제와 신라가 군사적 대치를 거듭했던 점을 들어 윤색된 설화일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금판의 명문을 처음 전문 번역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좌평의 이름 등을 놓고 이견이 나올 수 있지만, 명문의 왕후가 백제 관리의 딸이라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결혼 설화는 여러 정치적 이유에서 나중에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계 일부에서는 명문을 ‘사택적덕의 딸과 왕비가 함께 발원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거나, 선화 공주가 무왕의 다른 왕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사리 기록 발견은 구체적인 창건연대(639년)는 물론, 백제시대 왕비에 대한 유일한 명문 기록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삼국유사> 기록의 설화성 때문에 미륵사지의 구체적인 창건 연대에 대해 그동안 6세기의 무령왕대설, 동성왕대설, 그리고 7세기의 무왕대설 등이 엇갈려 왔으나, 이번 발견으로 논란이 일단락됐다. 백제사 권위자인 이기동 동국대 교수는 “그동안 백제 왕비에 대한 명문 기록은 일본 사서에 의자왕의 왕비에 대한 기록만 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며 “사리 봉안 기록을 통해 왕비의 출신 배경뿐 아니라 당시 ‘사택’이란 성씨가 백제 유력 가문이었음이 확인된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사리 봉안 기록과 더불어 발견된 사리 항아리도 전문가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연꽃, 당초, 인동초 무늬가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 있는 이 사리 항아리는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 수준을 보여준다. 주경미 부경대 연구교수는 “항아리나 무늬 양식 등에서 6세기 중엽의 부여 왕흥사터 사리병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중국 수나라에서 유행했던 사리함 문양 제작 기술까지 독창적으로 응용했다”며 “백제 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이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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