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09750.html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건 일종의 예술이었다”
[한겨레] 김도형 기자   등록 : 20111212 15:45 | 수정 : 20111212 15:58
   
고문후유증 앓는 김근태 전 장관 수년째 파킨슨병 앓아
이근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일할 것…당시엔 ‘애국’”

≫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1985년 9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년) 의장 시절 당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전기·물고문을 받으며 ‘짐승의 시간’을 보낸 후유증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80년대 고문수사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높아지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지난 10일 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 고문 수사를 일컬을 때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이근안 전 경감(72·현 목사)이다.

1988년 12월 <한겨레>가 김근태 전 장관을 직접 고문한 ‘얼굴없는 고문기술자’의 실체를 얼굴 사진과 함께 처음 보도한 뒤 이씨는 11년간 도피생활 끝에 자수해 7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런데 김 전 장관의 투병생활이 보도되면서 이씨의 행적이 다시 주목되고 있다. 트위터에서는 지난해 2월 시사주간지 <일요서울>에 두차례 걸쳐 보도된 이씨의 인터뷰 기사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이씨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며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며 전기고문 등 고문수사 행위를 전면 부인했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그러면서 그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애국’이라고 표현했다.

강제심문은 있었지만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끔찍한 전기고문은 없었다며 실체가 과장됐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김근태 상임고문에 대해서도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만 주었기 때문에 고문이 아니”라며 자신의 심문은 “일종의 예술”이라고 강변했다.

김근태 전 장관 고문 사건에 대해 법원은 고문 사실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7년형을 선고했지만 이씨는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 건전지 2개를 이용해 겁을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김 전 장관 사건과 관련해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전기고문이었다”면서도 실행한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한 것이다. 한참 후에 눈을 가린 뒤 맨발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나.”

그러나 겁만 주었다는 이씨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를 회고하는 김근태 고문의 진술은 고문의 악몽을 생생히 증언한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며 강한 전류를 또 흘려보내고, 참으면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돌입”(1987년 나온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 거렸습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 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락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뛰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씨는 자신은 전기고문은 물론 일체의 고문기술을 자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과 같은 이씨의 전매특허로 알려진 고문기술에 대해서도 “주먹으로 몇대 쥐어박거나 유도 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 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고 하면 변명하지 않겠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며 전면 부인했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심문이 안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며 자신의 행위를 강압심문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면서 “아마 이런 일화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라고 주장했다.

그는 공안사건 관련 인사들이 고문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은 비밀 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만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 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냐.”

그는 또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납북어부 김성학 사건 등은 자신이 한 일이 아닌데도 “언론은 고문이란 단어만 나오면 이근안을 팔았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기도 했다.

이씨는 <일요서울>과 한 두차례 인터뷰 기사에서 오랜 도피 생활과 수감 생활 중 자신이 겪고 느낀 가족애와 부정(父情)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 앞에서 나는 그저 죄인”이라며 “고문 기술자의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때문에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특히 수감생활 중 세상을 떠난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각별한 부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둘째가 아들 셋중에도 특히 착했다. 매주 면회를 오던 둘째 놈이 어느 날 ‘아부지, 나 오래 못 살게 될 것 같아요.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안좋습니다’라며 침통해 했다. 평소 당뇨가 있긴 했지만 나이가 젊어(당시 39살) 설마했다. ‘아비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마라’고 호통을 쳤는데 꼭 한달만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다.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또 막내아들에게 취직 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하자 “죽어도 아버지 덕은 안본다”며 “노동판에 나가는 막내 녀석이 야속하면서도 가슴 아프다고 털어놓았다”고 이씨는 털어놓았다.

2008년 정식으로 목회자가 된 이씨는 “당연히 이근안 목사가 맞지 않겠느냐. 경감은 30년 전 직함일 뿐”이라며 현재 목사 활동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씨는 1998년 어둡고 눅눅한 천장에서 생활하다 종교에 귀의하게 됐다고 말했다. “어느 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부친이 독실한 크리스찬이셨다. 자연스럽게 아버지 손때가 묻은 성경책에 손이 갔다. 이후 10년 동안 노트에 3400개가 넘는 성경 구절을 손으로 베껴 쓰며 공부했다. 자수를 결심한 것도 성경 공부 한 덕분이다. 요한 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란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을 받아 적으며 나 역시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나 이씨의 회개가 진정한 의미를 갖고 있을까?

그는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일요서울> 기자의 질문에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자신의 과거 행적에 강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지난 4년간 1980년대 고문피해자의 심리상담을 통해 이근안씨를 비롯해 고문기술자의 행태를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정신과 의사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11일 트위터에 “이근안, 당신이 목사라구요? 예수가 통곡합니다”라고 분노를 표시했다.

트위터에서도 “아...교회 다니는 것을 심히 부끄럽게 하는구나”(트위터 아이디 @i***) “이런 인간이 반성이라는 것을 할 리가 없지”(@malss**) 등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김도형 선임기자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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