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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광개토대왕릉, 역사를 지키지 못한 회한
중국 속 우리 역사 기행 11
승인 2014.09.30  22:54:26  글/사진=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7월 중순 중국 집안(集安)도 더웠다. 압록강 너머의 내륙에도 태양 빛은 따갑게 내리 쬐였다. 광개토대왕비를 관람하고 이제 언덕길을 오른다. 광개토대왕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太王陵’-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375~413, 재위 391~413) 능을 알리는 표지석에는 ‘태왕릉’이라 표기하고 태왕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새겼다. 태왕릉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 왕릉급 고분 가운데 두 번 째로 규모가 크다. 가장 큰 것은 천추총(千秋塚, 광개토대왕의 부왕 고국양왕의 능으로 추정함)이다. 거대한 태왕릉은 광개토태왕의 아들 장수왕이 만들었다. 중국 자료에는 391년 광개토대왕 즉위한 해부터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중화왕조는 황제가 즉위하면 곧바로 황제가 사후에 묻힐 능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고구려도 그러한 중화왕조의 전통을 따랐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고구려는 중화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 중국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비 서남쪽으로 200미터 지점에 있다. 태왕릉을 둘러싸고 나무를 심고 잔디를 가꾸고 길을 내냈다. 왕릉이 없다면 공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5분정도 걸어가니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어느 쪽이나 왕릉으로 통한다. 왕릉으로 가는 길이 왕릉을 한 바퀴 둘러싸고 있다. 오른쪽으로 간다. 가면서 점점 다가오는 광개토대왕릉을 필름에 담는다. 

왕릉을 막아선 울타리 근처에 아주머니들이 광주리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우리가 지나가자 뭔가를 들어보인다. 오이다. 한 묶음에 한국 돈 1,000원이라 한다. “천 원, 천 원” 달고 맛있다. 관광객을 상대로 농산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 농촌 할머니 모습이 어른거린다.
   

▲ 광개토대왕릉은 적석총으로 집안 고구려 왕릉 가운데 두 번째로 크다.

태왕릉은 거석을 쌓아 만든 적석총이다. 거대한 돌을 방형으로 계단을 쌓아 7층을 만들어 중국에서는 ‘대형방단계제석실묘(大型方壇階梯石室墓)’라고도 한다. 분구 정상부를 돌로 덮었다. 분구 한 변이 66미터, 비뚤어진 정방형으로 최고 높이는 14.8미터. 각 변에는 거대한 입석 5개를 배치하였다. 

왕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에 이르자 돌계단이 보인다. 덕분에 능위까지 편하고 안전하게 간다. 능위에서 석실이 우리를 맞이한다. 텅 비어있다. 아마도 태왕을 모셨던 곳이 아닐까. 안에 들어가 유리벽까지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다. 도굴당하여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대대로 내려온 선산을 찾았다가 파헤쳐진 조상의 묘를 보는 듯하다. 오호라! 세월 탓만은 아니다. 역사를 지키지 못한 회한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 능 정상까지 돌계단을 만들어 올라가기 쉽게 하였다.

묘 오른쪽 옆으로 봉묘석(封墓石)이 수십 덩이 놓여있다. 봉묘석은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돌이다. 지금은 잡초에 묻혀 애처롭다. 대륙을 호령한 광개토대왕의 정기를 마음껏 받으리라 하였는데,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게 더 마음에 걸린다. 외국 땅에 있어 내 손으로 잡초 하나 마음대로 뽑지 못한다니….
   

▲ 능 정상부에 설치된 석실은 도굴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청나라 말기 광개토대왕릉에서는 연화문 와당(瓦當)과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라는 글이 새겨진 기명 전(磚)이 나왔다. 1984년 집안시박물관이 광개토대왕릉을 정비할 때에 연화문화당과 기명 전이 출토되었다. 1990년 가을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와 집안시박물관이 광개토대왕릉을 다시 정비하고 조사를 하였다. 2003년에 왕릉 주변을 조사하여 배장묘, 기와를 이용한 배수시설을 확인하였다. 이때 “辛卯年 好太王…□造鈴 九十六”이라는 글이 새겨진 청동 방울(동제 탁령)을 비롯해 마구, 금동제품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이 호태왕릉의 피장자는 광개토대왕으로 추정한다.  일부 고국양왕의 능으로, 현재 장수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이도 있다.
   

▲ 무덤 입구를 막아놓은 봉묘석이 석실 오른쪽에 있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영락대왕으로 당시에는 부르기도 했던 광개토대왕. 재위 22년 나이 39세에 붕어하니 나이 18세의 장수왕은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장수왕은 부왕의 능을 크게 쌓고 2년 후 비석을 세워 부왕을 기렸다. 그러나 왕의 행위가 효성만으로 죄다 설명되지 않는다. 장수왕은 통치행위의 하나로 이 같은 일을 추진했을 터. 광개토대왕릉과 광개토대왕비 건립의 정치, 사상, 외교상의 연구를 깊게 해볼 일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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