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5484

눈알과 성기 사라진 변사체... 범인을 왜 봐줬나
[게릴라 칼럼] 세조의 수사권·기소권 봉쇄가 몰고온 파장
14.09.22 12:15 l 최종 업데이트 14.09.22 12:15 l 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모화관 터. 지금은 독립관이 있다. ⓒ 김종성

때는 수양대군(세조)이 왕이 된 지 6개월 뒤였다. 음력으로는 세조 1년 12월 16일, 양력으로는 1456년 1월 23일이다. 장소는 한성 서대문 밖 모화관 근처에 있는 반송정이라는 정자였다. 모화관은 중국 사신들의 숙소였다. 

위 날짜의 <세조실록>에 따르면, 이 날 반송정 밑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변사체가 발견됐다. 시신 여기저기가 무언가에 의해 깊이 찔려 있었다. 시신에는 눈알도 없었다. 남성의 주요 부위마저 없었다. 그리고 발에는 털신이 한 짝밖에 없었다. 

변사체의 상태로 볼 때, 원한에 의한 살인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변사자의 신원을 보여줄 단서가 전혀 없었다. 호패라도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1456년에는 호패 제도도 시행되지 않았다.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의금부는 실종자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의금부는 4일 전에 실종된 이석산이 변사자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아마도 실종 신고 당시에 확보한 인상착의가 변사자의 얼굴 모습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눈알과 성기가 사라진 남자의 변사체

일부 사극에서는 시골 사또가 사형 판결을 내리기도 하지만, 사형 선고는 주상(임금)의 권한이었다. 그래서 사형에 처할 만한 범죄가 발생한 경우에는 주상이 사건 수사에도 개입했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의금부는 수양대군에게 사건을 보고했다. 의금부는 이석산이란 피해자가 칼에 수없이 찔려 사망했다고 보고하면서, 현상금을 걸고 목격자를 찾을 것을 건의했다.  

수양대군은 의금부의 수사가 못마땅했다. 사람이 죽으면 얼굴이 변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이석산이 피해자일 거라고 쉽게 단정할 수 있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대로 수사해보지도 않고 현상금이니 목격자니 운운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수양대군은 승정원(비서실) 승지 이휘를 불렀다. 이휘는 실력파였다. 과거시험 대과(大科)가 아닌 소과만 통과한 그였다. 남들 같으면 진사나 생원으로 그치거나 하급 관원으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중앙부서 국장급인 정3품 승지까지 올랐다. 이것만 봐도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차지하는 데도 가담했다. 그래서 공신의 반열에도 올랐다. 

수양대군은 이휘에게 수사 지휘를 맡겼다. 임금의 비서가 수사기관을 지휘하는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상한 일이지만, 임금이 수사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갖고 있던 당시에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휘는 이석산의 시신을 다시 검시했다. 그는 상처를 유심히 살펴봤다. 상처는 원형이었다. 의금부에서는 칼이 흉기였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칼에 찔린 것이라면 둥그런 상처가 생길 리 없었다. 

이때 이휘가 참고했을 서적이 있다. 당시의 수사관들이 참고한 <신주무원록>이라는 수사 지침서다. <신주무원록> 제3권에서는, 창에 의해 깊게 찔리면 둥그런 상처가 생긴다고 했다. 창의 자루가 둥근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의금부는 이런 상처를 보고 칼에 의해 찔린 상처라고 단정했다. 그만큼 의금부의 초동수사는 부실했다. 수양대군은 이런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의금부의 수사가 틀릴지 모른다고 추측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범인은 누구? 과학적인 이휘의 수사방법


▲  <신주무원록>.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뒤이어 이휘는 이석산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석산은 가족들한테 "신간의 집에 가겠다"고 말한 뒤 집을 나갔다. 신간은 이석산의 친구였다. 그런데 신간의 말에 따르면, 이석산은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신간의 집에 간다고 해놓고 딴 데로 갔던 것이다. 

신간은 이석산이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었다. 세조 1년 12월 12일자(양력 1456년 1월 19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실종 신고가 있은 직후에 신간은 형조(법무부) 관원들에게 이석산의 이성관계를 진술했다. 요즘 사귀는 사람은 막비라는 여성이고 새로 점찍어 놓은 사람은 금자라는 기생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진술을 통해 신간은 이석산이 막비나 금자를 만나러 갔을지 모른다고 암시했다.  

조선시대 수사기관은 포도청이었다는데 의금부도 나오고 형조도 나오는 이유가 뭘까 하고 궁금해 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관청이 수사권을 행사했다. 포도청 외에도 형조·의금부·승정원·사헌부·병조·한성부·관찰사·지방수령 등등이 수사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사건에 여러 기관이 개입한 것이다. 

신간의 진술을 전해들은 이휘는 막비에 대한 조사에 먼저 착수했다. 금자의 집에는 그 뒤에 갈 예정이었다. 막비는 민발이라는 공신의 첩이었다. 민발은 수양대군이 김종서 정권을 전복할 때에 가담한 인물이다. 수양대군의 쿠데타 동지였던 것이다. 이석산은 대담하게도 그런 인물의 첩과 친했던 것이다. 

이휘는 막비의 집을 수색했다. 그 집 마당에는 사랑방이 있었다. 사랑방에는 마루가 딸려 있었다. 이휘는 마루와 연결된 사랑방의 벽면을 유심히 살펴봤다. 벽지가 발린 벽면이었다. 그런데 벽지 중 한 부분이 좀 이상했다. 다른 부분과 색깔이 달랐던 것이다. 최근에 바른 벽지 같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벽지를 뜯어냈다. 그랬더니 핏자국이 보였다. 

피가 벽에 튀었다면 바닥으로도 흘렀을 것이다. 이휘는 몸을 구부리고 마루의 밑을 들여다봤다. 모래가 덮여 있었다. 모래를 들어냈다. 그랬더니 핏자국이 묻은 흙바닥이 나왔다. 

이것으로써 이휘는 '사랑방 마루에서 살인이 벌어졌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창으로 사람을 수없이 찌르자 그 피가 벽면에 튀고 마루 아래로도 흘러 내려갔을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이석산이 여기서 죽었는지는 확단할 수 없지만, 이 집에서 살인 사건이 난 것만은 분명했다. 

이휘는 또 다른 단서들도 발견했다. 방안에 놓인 방석을 들어봤더니 그 밑에서 털신 한 짝이 나왔다. 이석산의 시신에서도 털신이 한 짝밖에 없었다. 그는 창과 함께 털신을 챙겼다. 금자네 집에는 가볼 필요도 없었다.  

수색을 마친 이휘는 이석산의 시신을 재차 검시했다. 그는 그 창을 이석산의 상처에 맞춰보았다. 딱 막았다. 털신도 그렇게 해보았다. 이번에도 딱 막았다. 이로써 이휘는 이석산이 막비의 집에서 창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막비의 집 사랑방 마루에서 이석산을 죽인 범인이 털신 한 짝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서대문 밖 반송정까지 시신을 운반했던 것이다. 

범인이 누굴까? 이휘는 추리했다. 막비가 그랬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예나 지금에나 여성이 남성을 살해할 때는 독살을 선택하기기 쉽다. 연약한 여성이 창을 휘두르며 남성을 살해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래서 막비는 아니었다. 

이휘는 막비와 이석산의 관계를 질투할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 하고 판단했다. 막비는 공신 민발의 첩이었다. 이휘는 민발을 의심했다. 민발은 공신이 되기 전에 유사한 일을 범한 적이 있었다. 형의 첩과 몰래 만나는 관원을 두들겨 팬 일이 있었던 것이다. 

드러난 범인...그러나, 수사권·기소권 봉쇄한 수양대군

하지만 민발을 함부로 수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공신이었다. 그래서 이휘는 수양대군에게 민발에 대한 수사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민발을 감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민발을 곧바로 석방했다. 의심만으로 공신을 구속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수양대군은 일반적인 임금과 달리 쿠데타로 왕권을 차지했다. 공신들의 힘을 빌려 조카를 몰아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신에 대한 정치적 의존도가 높았다. 그래서 그는 공신들의 충성심을 떨어뜨릴 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민발을 수사하고 기소해서 사형에 처한다면, 자기를 쳐다보는 공신들의 시선에 의심의 기운이 서릴지 모른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사건을 덮기로 결심했다. 정권을 든든히 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실, 수양대군은 민발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조 2년 4월 20일자(1456년 5월 24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이석산 사건이 발생한 지 4개월 뒤에 민발이 술에 취해 왕족들에게 실수를 범하고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자 수양대군은 "네가 이석산을 죽인 일 때문에 온 나라가 너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을 때도 나는 허락하지 않았거늘"이라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렇게, 민발이 범인인 걸 알면서도 사건을 덮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의 태도와 관계없이 이휘는 강력하게 수사를 촉구했다. 장관급 신하들도 이휘의 주장에 동조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귀를 막았다. 이휘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요지부동이었다. 급기야 수양대군은 이휘에게 짜증을 냈다. 경고도 했다. 

그래도 이휘가 단념하지 않자, 수양대군은 이휘를 감옥에 가두고 파면했다. 사건 발생 한 달째인 음력 1월 14일(양력 2월 19일)의 일이었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이휘의 수사권을 빼앗고, 사건과 관련된 수사 및 기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수양대군은 공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민발도 공신이지만, 이휘도 공신이었다. 죄 없는 공신을 가두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수양대군은 이휘를 석방하고 관직에 복귀시켰다. 이휘를 감옥에 가둔 지 1개월이 약간 지난 음력 2월 19일(양력 3월 24일)의 일이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이휘를 승정원으로 복귀시키지는 않았다. 이휘가 간 곳은 지금의 국토교통부인 공조였다. 이휘는 국장급인 공조참의에 임명됐다. 수사권이나 기소권과 관련이 없는 자리로 보내진 것이다. 

진상규명 요구한 이휘와 사건 덮은 수양대군의 최후

그로부터 약 3개월 보름 뒤였다.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미수로 끝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사육신 사건이 터진 것이다. 참모인 한명회가 신속히 대응하지 않았다면 수양대군은 칼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이 사건의 가담자 중에는, 주동자는 아니지만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이휘였다. 얼마 전까지 수양대군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이석산 사건을 계기로 사이가 틀어진 이휘가 수양대군 암살 모의에 가담한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이휘는 거열형을 받았다. 수레를 이용해 죄수의 몸을 분해하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쿠데타 동지 관계였던 이휘와 수양대군의 관계는 이석산 사건 얼마 뒤에 이렇게 참혹하게 끝나고 말았다. 


▲  사육신묘의 일부.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 김종성

사육신 사건은 단종에 대한 충성심 혹은 수양대군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지만, 이휘의 경우에는 이런 동기 못지않게 이석산 사건에 대한 불만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임금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막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 대한 분노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은 두 가지 방법으로 진실을 은폐할 수 있었다. 아예 수사를 종결시키는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고, 자기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따를 사람이나 기관에게 수사권을 주는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수양대군은 첫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가 둘째 방법을 선택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사권·기소권을 아예 안 주는 것이나, 수사권·기소권을 불공정한 사람이나 기관에게 주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어떤 방법으로 수사권·기소권을 막든 간에, 진실을 은폐하는 통치자는 외부의 불만세력 못지않게 내부의 불만세력도 조심해야 한다. 통치자의 불공정한 처사를 보고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라며 불만을 품는 신하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신하들은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묘를 지날 때마다 '나도 양심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생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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