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zoglo.net/blog/read/liguangren/77957/0/0

팔도땅의 옛 고구려 장성
내 고향 여행 (21)
2006년 01월 28일 00시 00분  리함

해당 연구자료를 통해 화룡, 룡정, 연길을 가로 지난 1000여년전 옛 고구려장성이 룡정시 구간에서 원 팔도진 서북쪽을 에돌았고 구수하를 건너 쌍봉촌으로 해서 평봉산으로 넘었다는것을 알았지만 고구려장성이 잘 보존되였다는 성벽구간이 어딘지는 알수가 없었다. 이 일을 두고 고심하다가 일전에 연길에서 팔도출신의 룡정 황상박선생과 얘기를 나누었더니 팔도땅엔 옛 장성흔적이 수두룩하다는것이였다. 그래서 필자는 체면불구하고 70고개를 눈앞에 둔 황상박선생한테 길안내를 부탁드렸다. 

1월 24일 오전 9시, 필자는 약속대로 연길시 서시장 뻐스역에서 황상박선생을 다시 만났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반시간만에 연길서 서쪽으로 23킬로메터 떨어진 팔도진에 이르렀다. 현재는 룡정시 조양천진에 귀속된 팔도촌이였다. 헌데 황상박선생은 팔도~삼도만 갈림길에서 북으로 2킬로메터쯤 떨어진 쌍봉촌으로 택시를 안내하였다. 

《옛 성벽이 잘 보존되였다는 구간이 길성저수지 부근이 아닙니까?》
《글쎄 가보면 안다니까!》

황상박선생은 사람좋게 시물시물 웃을 뿐이였다. 잠간새에 우린 큰길가 비둘기바위 동쪽가 쌍봉촌에 이르렀고 황선생의 소시적친구 한재운씨가 반가이 맞아주었다. 알고보니 사전에 전화련계가 되여있었던것이다. 그러는 황선생의 소행이 고맙기만 하였다. 

한재운씨는 1937년 생으로서 황상박선생보다 한해 우였다. 황선생과 더불어 팔도소학교와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는 한재운씨는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쌍봉촌 회계,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회계에 촌장, 1984년부터 팔도진 경영관리소 회계, 1994년부터 2004년까지 쌍봉촌 촌지서로 몸을 잠가 온 경력자였다. 한씨는 황선생을 통해 답사사연을 알았다면서 옛장성흔적이 이곳엔 여전하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곤 군소리없이 필자와 황선생을 북쪽 산너머로 통하는 부암골 길가로 안내하였다. 

날씨가 무척 수그러들었다지만 부암골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여전히 맵짰다. 방한모도 쓰지 않고 엷은 옷차림인 한씨는 가끔 두손을 귀가로 가져갔다. 그러는 모습이 안스러워 필자가 옛 장성구간만 가리켜 달라고 했더니 한재운씨는 마을뒤 동북쪽 산기슭을 가리키며 저기 밭지경에 보이는 도드라진 부분이 옛 말무덤자리라고 했다. 시야에는 봉긋하게 솟은 흙무덤이 안겨들었다. 보매 2~3리(1리가 500메터)가량 되여 보이였다. 마침 황상박선생도 신병에 시달리는 몸이라 필자는 두 분을 만류하고는 단신으로 답사행에 나섰다. 

말무덤으로 이어진 개울가 오른쪽은 시골의 밭이였다. 금방 밭머리에 들어섰는데 밭가운데 길이가 200~300메터 되여보이는 도드라진 흙무지가 동쪽으로 곧추 말무덤까지 뻗어있었다. 필자는 대번에 옛장성흔적이라는것을 알아보았다. 밑변의 길이 3메터쯤 되고 높이가 한두자쯤 되여도 옛흔적은 지워버릴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필자는 흥분에 들떴다. 

말무덤에 이르니 길이가 10여메터, 너비가 10메터 안짝인 흙무덤이 덩실하게 솟아있었다. 높이는 불과 몇메터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쪽 구간 단면으로 보아 생땅이 아닌 인위적축조라는것이 알리였다. 타원형으로 남아있는 말무덤에는 누군가 드릅나무를 심어놓아 드릅나무가 말무덤을 온통 덮고 있었다. 전혀 관리와 중시가 따르지 않은데서 말무덤의 현실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말무덤에는 돌들이 가끔 섞이였는데 서쪽면은 파헤친 흔적이 력연하여 보는 이들의 가슴을 허비였다. 

어찌하든 말무덤의 발견은 충격적이였다. 길성저수지 부근이 아닌 쌍봉촌 구간에서도 옛장성흔적이 발견되고 말무덤이 발견되였다는것은 경이로운 사건이 아닐수 없었다. 필자를 보다 흥분시킨것은 말무덤아래 밭가운데를 가로지른 옛장성흔적이 말무덤을 지나 동쪽 이깔나무 숲사이로 계속 뻗어갔다는 점이다. 한 500메터쯤은 되여 보이였다. 오늘은 전면답사가 아닌 사전의 고찰이고 마을에서 황상박선생이 기다리는데서 돌아서야함이 유감이라 할가. 

아쉬운대로 후일답사로 미루고 떠나려는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때 말무덤 웃쪽 수림쪽에서 웬 사람 하나가 내려오더니 생소한 필자를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당지 농민같아 필자는 다가가 말을 건네였다. 

《이곳 분이십니까?》
《그런데요.》
낯선 사람의 시선은 의문에 넘쳐있었다. 때아닌 산기슭에 웬 사람이냐는 뜻이였다. 필자는 인차 낯선사람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저는 연길에서 왔는데요. 황상박선생이 동행했고, 저아래 마을에서 기다립니다. 혹 황선생을 아시는지요?》
《오, 알다뿐이겠습니까, 너무도 잘 알지요.》

그제야 낯선 사람의 의문의 눈길은 풀리고 필자를 반가이 대해주었다. 황상박이라는 존재는 이렇듯 우리 사이를 대번에 가까이 만들어주었다. 

황상박선생은 1938년생이고 연길현으로 불리운 룡정시 원 팔도진 팔도촌 수북천 출신으로서 1958~1974년 팔도향(그때는 향이였음) 우편배달부, 1974~1981년 향서점의 도서발행원, 그다음은 1998년에 정년퇴직하기까지 룡정시방송국의 기자로 근무했었다.

한때는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길림성 로동모범, 전국 선진생산자이고 과외로 문학창작활동을 반세기나 꾸준히 펼쳐온 시인으로서 지난 80년대 이전시기를 거치여온 팔도사람들은 황상박이라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낯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뒤미처 필자가 말무덤을 찾은 연유를 이야기하고 옛장성흔적이 말무덤 웃쪽에도 계속 뻗었더라고 소감을 터놓으니 옛장성은 이 구간뿐이 아니라면서 주동적으로 필자를 말무덤 웃 구간에로 안내하였다. 

옛장성은 말무덤 아래쪽과 일직선으로 곧추 동쪽으로 뻗어나갔다. 이깔나무숲을 지나니 장성은 동북방으로 지른 주가골 골짜기로 떨어졌다. 동행한 분은 옛장성은 여기에서 골짜기를 너머 저 맞은켠 산꼭대기를 치달았다면서 건너편을 가리켰다. 

필자는 크게 놀랐다. 건너편 산꼭대기로 치달은 옛 장성흔적이 너무도 환하게 시야에 안겨들었으니 말이다. 황상박선생의 소시적친구한테서는 말무덤만 소개 받은 터에 생각지도 않은 옛장성을 거듭 발견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지금까지의 현존연구자료에 따르면 연변의 옛 고구려장성은 두곳으로 알려진다. 하나는 말그대로 화룡시 토산자 동산으로부터 시작되여 화룡시, 룡정시, 연길시 경내에 이르는 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훈춘벌 북부를 에워싼 장성이다. 필자가 년전에 연길시 서북부의 외곽산인 평봉산에서 고구려장성의 석성구간을 발견한후 화룡, 룡정, 연길 구간의 300리 옛장성에 짙은 흥미를 가지고 등산과 력사유적답사의 하루하루를 이어왔는데 원 팔도향 쌍봉촌구간에서만도 길게길게 뻗은 옛 고구려장성 흔적을 발견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하였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연변박물관의 원 연구일군들인 박룡연, 엄장록 등 몇몇 분들이 연변의 옛 장성에 대해 고찰조사활동을 펼치고 연구론문들까지 발표했으나 장성따라 답사는 거의 전무한 상태여서 팔도 쌍봉촌구간에 옛 장성흔적이 그대로 실재한다는것을 밝혀내지 못하고 성벽이 잘 보존된 곳을 말할 때 팔도일대 길성저수지 부근의 성벽을 떠올렸을 뿐이였다.한데서 말무덤에서 만난 당지 분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60살이고 여기에서 태여나 여기에서 살아왔지만 이곳 옛장성을 답사하고 묻는 분은 처음 봅니다.》

이 말이 필자한테는 좋게만 들리련만 그렇지가 못했다. 낮다란 흔적이나마 눈에 확연히 안겨드는 이곳 고구려장성을 지금까지 전면답사한 분이 없다니 가슴은 일시에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였다. 《룡정시문물지》에도 이것이 고증되고 올라야 하지만 보이지가 않았으니 가슴이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안내자가 이 기분을 다소나마 풀어주었다. 연길시 평봉산으로 뻗어간 산속구간 답사는 후일로 미루고 돌아서는데 안내자는 말무덤에서 쌍봉촌 서남쪽의 두루봉을 가리켰다. 

《저길 보십시오. 옛 장성은 말무덤 아래서 골안따라 쌍봉촌을 지났고 저렇게 두루봉 북쪽가로 뻗어 산을 넘었습니다.》

필자는 또 한번 놀랐다. 옛장성은 쌍봉촌을 지나 산기슭에 대이였고 두루봉 북쪽가로 산을 넘어간것이 환히 보였으니 그 시각의 흥분점은 절정에 달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할진대 쌍봉촌 구간의 고구려장성은 근 10리나 뻗었고 흙으로 쌓아올린것이였다. 이 옛 장성의 수축년대를 기원 4세기쯤으로 본다고 할때 1000년도 훨씬 뛰여넘는 기나긴 세월속에서도 그 흔적이 용케도 남아있으니 모진것이 세월이라지만 력사속 기난긴 세월도 고구려 장성흔적을 가뭇없이 지워버릴수는 없었다. 

쌍봉촌 귀가길에서 필자는 낯선사람이고 안내자인 분은 1947년생이고 이름이 김동선이라는것을 알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문화대혁명 때인가 여기 마을사람들이 말무덤에 뭔가 있으려니 여기고 일부를 파헤쳤는데 활촉과 말뼈 등이 나오더란다. 그래서 당지에서 말무덤이라고 불리운지는 모르겠으나 필자가 보건대 말무덤은 사실 말무덤이 아니라 고구려시기 봉화대가 아니면 장성을 지켜선 주요한 군사주둔시설이였다. 

마을에 이르니 황상박선생과 한재운씨가 기다리고있었다. 동북쪽 산기슭에서 말무덤 외에도 몇리나 뻗어간 옛장성을 발견했다고 하니 그들은 마을 서남쪽의 두루봉을 가리키며 옛 장성은 두루봉 북쪽으로 산을 치달아올랐다고 설명해주었다. 말무덤에서 이미 보았다고 하니 자기일처럼 기뻐해주는 그네들이였다. 그러는 두분이 돋보이기만 했다. 

한재운씨한테서 필자는 또 쌍봉촌 이곳마을은 개울가를 사이두고 3~4대가 자리잡았고 말짱 조선족 80여세대가 살고있다는것을 알았다. 화룡시 원 토산진 동산에서 시작되여 서성 이도구간을 지나 북으로 뻗혀오던 고구려장성은 팔도촌 북쪽 소팔도구 두루봉에서 방향을 동북쪽으로 접다가 말무덤 웃쪽 구간에서 방향을 다시 동남쪽으로 돌리며 근 10리나 수축되여 있었다. 

반나절의 성과는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때는 오전 11시 반. 귀로에서 필자는 황상박선생을 모시고 팔도촌에 이르러 선생의 고향집터인 팔도촌 12대—수북천과 두번째 살림집을 돌아보고 선생의 숙모댁에서 점심상에 마주 앉았다. 필자기획중의 조선족로작가 자료고 거창한 건설이 황상박선생으로부터 시작되였다는 말이 된다. 황상박선생의 처녀시가 1956년 1월 26일에 연변일보에 발표되여 장장 반세기로 이어졌으니 선생은 자료고에서 취급할수 있는 당당한 로작가였다. 

황상박선생이 고마왔다. 신병속에서 먼길을 떠나기 불편한 몸이면서도 추운 겨울에 필자의 청을 선뜻 들어주었고 고구려장성을 발견할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었으니 후일의 전면답사는 시간문제일 뿐이였다. 

고마운 일은 이뿐이 아니였다. 마침 황선생 숙모댁에 이른 숙모님의 남동생 리중범(64살)씨가 팔도촌~길성저수지 구간 답사안내를 나서기로 했으니 고마움이 한가슴 들먹이였다. 팔도땅의 옛 고구려 장성이 이제 세상에 알려질것도 역시 시간문제일뿐.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