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62256

조선시대 장마 대책이 숭례문 개방?
[사극이 못다 한 역사 이야기 14] 농업의 풍흉과 직결된 숭례문
13.05.06 15:04 l 최종 업데이트 13.05.06 15:04 l 김종성(qqqkim2000)

▲  복원된 남대문의 모습. 5월 4일 오전에 찍은 사진. ⓒ 김종성

숭례문(남대문)이 5년 만에 복원됐다. 오늘날 우리의 일상은 숭례문과 별로 관계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숭례문의 소실과 복원을 보며 울고 웃었다. 그런데 숭례문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애착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숭례문의 상태가 농업의 풍흉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농업이 최대 산업이었던 시대에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 것(가뭄)과 하늘에서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것(장마)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선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전의 왕조들도 그랬지만, 이런 경우에 대한 조선왕조의 대책 중 하나는 도성의 숭례문과 숙정문(또는 숙청문, 북대문)을 닫거나 여는 것이었다.  

가뭄 때는 숭례문을 폐쇄하고 숙정문을 열었다. 이 점은 왕조실록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세종실록>에 따르면, 음력으로 세종 10년 4월 23일(양력 1428년 5월 7일) 조정에서는 가뭄이 시작됐다는 이유로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 4년 6월 3일(1509년 6월 19일)에도 동일한 조치를 취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 7년 6월 7일(1574년 6월 25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은 조선왕조 내내 계속됐다. 여기에 소개한 것들은 수많은 사례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한편 장마 때는 정반대로 했다. 이번에는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폐쇄했다. 가뭄과 장마 때 이처럼 서로 정반대의 조치가 취해졌음을 한눈에 보여주는 기록이 명종 12년 7월 17일자(1557년 8월 11일) <명종실록>이다. 

명종 12년에는 음력 6월 24일(양력 7월 19일) 이전의 어느 시점부터 가뭄이 시작됐다. 가뭄이 끝나지 않자, 조정에서는 음력 6월 24일 직후의 어느 시점에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이런 상태에서 가뭄이 끝나고 이번에는 장마가 시작됐다. 장마 피해가 커지자, 예조(외교·교육·의례 담당)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책을 건의했다. 

"지금 가뭄 끝에 장마가 개지 않아서, 이익 없이 손해만 늘고 있습니다. 전례에 따라 숙정문을 닫고 숭례문을 여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 건의가 주상(왕의 공식 명칭)의 재가를 얻음에 따라, 약 3주간 폐쇄됐던 숭례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숙정문이 폐쇄됐다. 이처럼 가뭄과 장마에 따라 숭례문과 숙정문이 정반대 상태로 바뀌었다.

가뭄 때는 숙정문, 장마 때는 숭례문을 연 까닭


▲  2008년 2월 10일 불에 탄 직후의 남대문. ⓒ 김종성

그럼, 조선을 포함한 역대 왕조가 가뭄과 장마 때마다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거나 혹은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위 날짜의 <명종실록>에 실린 예조의 건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뭄이 들면 남대문을 닫고 북대문을 열며, 가죽으로 만든 북을 치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양의 기운을 억제하고 음의 기운을 억누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땅이 마르는 가뭄 때는 양의 기운을 억제하고자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연다고 했다. 이것은 장마 때는 양의 기운을 늘리고자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았음을 의미한다. 옛날 사람들은 음양의 기운을 조절하여 가뭄과 흉년에 대처할 목적으로 숭례문과 숙정문을 열거나 닫았던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남쪽의 숭례문에서 양의 기운이 들어오고 북쪽의 숙정문에서 음의 기운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양의 기운이 넘치는 가뭄 때는, 양의 기운을 줄이고 음의 기운을 늘리고자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던 것이다. 반대로 음의 기운이 넘치는 장마 때는, 양의 기운을 늘리고 음의 기운을 줄이고자 숭례문을 열고 숙정문을 닫았던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미신을 믿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배층이 신봉한 유교는 당시로서는 꽤 합리적인 사상 체계였다. 유교처럼 현실과 실질을 중시한 사상 체계는 드물다.  

<논어> '술이' 편에서는 공자의 사상적 특징을 두고 "선생님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설문에서 주자는 괴력난신을 괴이, 용력(勇力), 패란(悖亂), 귀신으로 풀이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괴력난신은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을 총칭한다. 이런 것들을 입에조차 담지 않은 공자의 사상을 좇아 조선시대 지배층은 합리성을 추구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숭례문·숙정문 위의 커다란 창공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숭례문·숙정문을 닫는다 해도 음양의 기운이 두 대문 위의 창공을 통해 한양 도성에 들어온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우리는 이미 고대로부터 국가적 규모의 관개 사업이 시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뭄에 대처할 목적으로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여는 미신적 행위를 하면서도, 고대 국가는 관개 사업이라는 현실적 행위에 국가적 자원을 투입했다. 이는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여는 행위가 실질적인 가뭄대책이 될 수 없음을 그들도 인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미신을 숭상했다? 천만의 말씀!


▲  불에 타기 이전의 남대문. 불 탄 남대문을 둘러싼 휘장에 그려져 있었던 그림. ⓒ 김종성

그렇다면 굳이 숭례문과 숙정문을 여닫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학부모가 수험생 자녀를 위해 절이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행위를 눈여겨보면 얻을 수 있다. 

수험생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학부모는 단지 기도만 하는 게 아니다. 수험생의 건강을 위해 보양식을 준비하기도 하고, 수험생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물질적·정신적 환경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에 기도는 학부모의 정신과 육체가 수험생에게 집중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기도 자체가 수험생에게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기도에 뒤이은 학부모의 노력이 수험생에게 도움이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부모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한다는 사실은 수험생에게 심적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수험생이 더 열심히 공부하도록 만드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 

숭례문과 숙정문을 여닫는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가뭄이나 장마 대책으로 단순히 대문만 여닫은 게 아니었다. 천재지변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 대책을 강구하고 이재민 대책을 세웠음은 물론이다. 

대문을 여닫은 것은, 천재지변을 극복하기 위해 소소한 일에서까지 국가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정신의 표현이었다. 사소한 일에서까지 조심성과 신중성을 기한다면 실질적인 대책 사업에서 실수가 나오지 않음은 물론이고, 국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도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민심이 이반되기 쉬운 가뭄과 장마 때에 국가가 이처럼 작은 일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면, 국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숭례문과 숙정문을 여닫은 것은 조선왕조가 미신을 숭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서 천재지변 해결에 바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이해하는 게 훨씬 더 현실적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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