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71177

고구려군은 '호로고루'성에서 어떻게 싸웠을까
[임진강과 한탄강 자락의 연천지역 문화유산 답사] ② 호로고루
08.08.31 12:03 ㅣ최종 업데이트 08.08.31 14:31 이상기 (skrie)

호로고루는 고구려 성이다
 

▲ 호로고루성 ⓒ 이상기

▲ 호로고루성 발굴 현장. ⓒ 이상기

경순왕릉을 보고 나오는 길에 고랑포를 답사하면 좋으련만 시간이 없어 바로 호로고루 성으로 향한다. 호로고루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있어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372번 지방도를 벗어나자 논 가운데로 길이 나 있다. 버스가 가기에는 길이 좁아 상당히 조심스럽다. 몇 번 커브를 도는가 했더니 호로고루 성지(城址) 주차장에 도착한다. 그나마 주차장에서 차를 돌릴 수 있어 다행이다.
 
주차장에서 호로고루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작은 시내을 따라 간 다음 논과 밭을 지나야 한다. 길가에는 한 여름의 망초꽃이 한창이고 성터 안 평지에는 하얀 클로버 꽃들이 지천이다.
 
입구에 호로고루를 설명하는 표지판이 여러 개 있다. 상당히 현대적인 디자인이고 내용도 충실하다. 그 중 하나는 호로고루의 발굴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호로고루의 어원과 성(Fortress)이 가지는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호로고루는 한국토지공사의 토지박물관에 의해 2000년 11월부터 2001년까지 두 차례 발굴 조사되었다고 한다. 호로고루는 임진강을 따라 서쪽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28m의 현무암 단애 위에 쌓여진 천연의 요새이다. 조사 결과 호로고루 성벽 전체의 길이는 401m이며, 남벽이 162m, 북벽이 146m, 동벽이 93m이다. 이 중 동벽의 쌓은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다. 동벽의 높이는 10m 정도 되는데 돌을 토대로 그 위에 흙을 쌓은 형태이다. 호로고루 성의 내부 면적은 606㎡ 정도이다.
 
호로고루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와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붉은 색을 띤 고구려 기와와 회색을 띤 통일신라 기와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처음 고구려의 강역이었다가 고구려가 망하면서 신라 땅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하는 기록들이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호로고루가 있는 호로하(瓠瀘河)에 대한 문헌의 기록
 

▲ 호로고루 동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호로하 ⓒ 이상기

<동사강목>에 보면 문무왕 2년(662년) 김유신은 소정방과 함께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군사가 피로하여 퇴각한다. 김유신 등은 돌아올 적에 밤새 행군하여 이곳 호로하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추격하여 공격을 했으나 호로하(瓠瀘河)에서 만나 크게 격파하였다고 되어 있다. 
 
<동문선> 제57권 서(書) '답당설총관인귀서(答唐薛摠管仁貴書)'에 보면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군과 호로하에서 교전하는 내용이 나온다. 663년(龍朔 2) 정월 설인귀와 김유신은 평양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다 여의치 않자 각자 대군을 이끌고 퇴각한다. 그리고 그 퇴각 결과를 설인귀에게 다음과 같이 알린다.
 

▲ 호로하(임진강)의 깍아지른 단애 ⓒ 이상기

▲ 임진강 지도: 왼쪽 아래에 호로고루가 보인다. ⓒ 연천군

"대군은 또 돌아가고자 하였고, 신라의 병마(兵馬)도 식량이 다 떨어져 돌아오는데, 군사는 주림과 추위에 손발이 얼어 터져서 길가에서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호로하(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의 병마가 뒤쫓아와서 언덕 위에 진을 벌이거늘, 신라 군사는 피곤한 지 오래였고 적이 멀리 쫓아올까 두려워하여, 적이 강물을 건너기 전에 먼저 건너 접전하니 선봉이 잠시 교전하자, 적군이 와해(瓦解)되었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668년에는 고구려가 망하는데 고구려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는 곳이 호로하로 나온다. <미수기언> 동사(東事) '신라세가 하'에 보면 "고구려가 망하고 당 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호로하(瓠瀘河)에서 격파시키니 여러 패잔병들이 모두 신라에 항복해 왔다"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호로고루는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분쟁 시기의 전투지였다기보다는 고구려가 망하는 시점에 저항의 거점이었던 셈이다.
 
또한 <미수기언> 기행(記行) '무술주행기'에 따르면, 호로하 석벽 위에 옛 성이 있다. 그리고 이 하천을 따라 고구려와 신라가 접경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날이 저물어 돛을 올리고 호로탄(瓠蘆灘)으로 올라가니 여기가 호로하(瓠蘆河)이고 그 위는 육계(六溪)이다. 또 옛날 진루(陳壘)가 있는데, 앞의 여울은 아주 험하며 사미천(沙彌川)이 여기로 들어온다. 상류에 옛 성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해 있는데 석벽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다. […] 그 위의 칠중성(七重城)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인데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두 나라의 국경이라고 하였다."
 
호로고루가 가지는 의미
 

▲ 호로고루성 동쪽 출입구 ⓒ 이상기

호로고루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瓠) 또는 조롱박같이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을을 뜻하는 홀(忽: 호로)과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서 호로고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보나 논리적으로 보나 후자의 주장이 훨씬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이곳 호로고루는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연천을 대표하는 3대 평지성이다.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지역이 이처럼 중요한 요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임진강변에서 걷거나 말을 타고 도강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투에 있어서 식량 등 보급품은 주로 말로 운반되었기 때문에 호로고루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옛날 경주에서 평양으로 이어지는 지름길도 바로 이 길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초 경순왕도 개경에서 이 길을 통해 경주로 가려했던 것이다.
 
현장에서 느끼는 호로고루
 

▲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성돌 ⓒ 이상기

호로고루에 대한 접근은 동쪽에서만 가능하다. 동쪽에서 보면 인위적으로 축조한 10m 높이의 93m 성벽이 보인다. 석성 위에 흙이 덮여 있어 언덕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위적으로 축조된 성이다. 그것은 발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석성을 통해 확인된다.
 
남쪽 벽은 임진강에 연해 있으며 80˚의 가파른 절벽이다. 북쪽 벽은 이것보다는 완만하지만 60˚ 기울기를 가진 절벽이다. 그리고 남벽과 북벽이 서쪽에서 만나 뾰족한 돌출부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동쪽 성벽만 잘 지키면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다. 
 
동쪽의 성벽 왼쪽 임진강변으로 성 입구가 있어 우리는 그리로 해서 성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서 보니 임진강 단애 위에 넓은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강 건너편으로는 나자막한 야산이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도 이잔미성이 있었다고 한다. 안에서 동쪽 성벽을 보니 정말 편안한 언덕처럼 느껴진다. 전투가 벌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 발굴 당시 발견된 고구려 기와 ⓒ 이상기

▲ 석성 위에 흙을 덮은 호로고루의 동쪽 성벽 모습 ⓒ 이상기

지금은 풀이 무성해서인지 유물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토지박물관 팀의 조사 당시 고구려 기와편과 토기류가 많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유물은 성 서쪽과 동북쪽에서 주로 발견되었고, 신라 유물은 성 중앙부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구려 기와가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기와가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라 유물로는 단각고배류, 옹기, 그릇 등이 있는데 이들은 7세기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유물을 통해 볼 때 호로고루 성은 4세기 경 토루(土壘)나 목책 등의 초보적인 방어시설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가 남진하는 5세기 경부터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7세기 중반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신라에 수용되어 방어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로고루는 지리적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적을 막는데 적합하기 때문에 통일신라 이후에는 그 활용도가 그리 높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동쪽 성벽 위로 올라가 다시 한 번 호로고루를 조망해본다. 이곳에 오르니 사방 조망이 훨씬 좋다. 임진강도 좀 더 멀리까지 보이고 건너편 이잔미성 지역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성을 내려오면서 나는 이 성도 복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남한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구려 성이기 때문이다. 호로고루를 나오면서 나는 아쉬운 마음에 여러 번 동쪽 성벽을 되돌아본다. 발굴하는 과정에서 성벽에서 분리되어 한쪽에 쌓인 돌들이 마음에 걸려. 저 돌들이 복원과정을 거쳐 다시 성벽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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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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