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9854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일 수 없는 이유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구암 허준>, 첫 번째 이야기
13.05.02 11:44 l 최종 업데이트 13.05.02 14:35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구암 허준>. ⓒ MBC

조선이 낳은 최고의 명의일 뿐만 아니라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을 다룬 MBC 일일드라마 <구암 허준>이 현재 초반부를 달리고 있다. 지금까지의 방영분에서, 허준(김주혁 분)은 오늘날의 경남 산청에 해당하는 산음현에서 스승 유의태의 가르침을 받으며 물 긷기, 약초 캐기, 약재 관리를 하다가 최근에는 독자적인 환자 치료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유의태란 존재는 허준에게 단순히 의술뿐만 아니라 인생철학까지 가르쳐준 스승이다. 그래서 드라마 속의 유의태는 허준에게 엄청난 의미를 갖는 존재다. 참고로, 유(柳)의태는 류의태로 읽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허준의 스승을 유의태로 알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유의태로 쓰기로 한다. 

그런데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라는 이야기는 드라마나 소설 속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물론 드라마나 소설의 작가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1965년에 나온 한의학자 노정우의 글 때문이다. 

그 해에 박우사가 펴낸 <인물한국사>에 실린 허준에 관한 글에서, 노정우는 다음과 같은 논리적 단계에 근거하여 '허준의 스승은 유의태'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1) 허준의 할아버지는 경상도에서 관직을 지냈고, 할머니는 경상도 진주 출신의 유(柳)씨다. 
(2) 따라서 허준은 진주와 같은 지역인 경상도 산청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3) 그런데 산청에는 유의태라는 명의가 있었다. 
(4) 그 유의태가 허준의 스승이었을 것이다. 

노정우는 경상도에서 직접 수집한 설화를 근거로 이런 결론을 도출했다. 오늘날의 드라마나 소설에서 유의태를 허준의 스승으로 설정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 허준이 산청에서 의학을 배웠다고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허준이 조부모 연고지에서 자랐다?

그러나 위의 주장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점은 누구라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어머니나 아버지의 연고지가 아닌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연고지에서 허준이 성장했을 것이라는 부분부터가 매끄럽지 않다. 

역사학자 김호가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허준의 어머니는 전라도 담양과 연고가 있었고 아버지는 경기도 양천(현재의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이나 파주와 연고가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허준을 경상도 산청과 연관시킨 것은, 산청의 유의태와 허준을 연관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  유의태(백윤식 분). ⓒ MBC

더군다나 노정우의 주장에는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유의태란 인물이 어느 시대 사람인가를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의태를 허준으로 스승으로 단정했다는 점이다.  

유의태(柳義泰)와 이름이 비슷한 유이태(柳以泰)란 명의가 경상도 산청에서 활동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이태가 허준과 다른 시대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숙종 39년 12월 16일자(1714년 1월 31일) <숙종실록>에는 '경상도 의원 유이태가 조정의 부름에 빨리 응하지 않으므로 처벌해야 한다'는 사헌부(검찰청)의 탄핵이 소개되어 있다. 숙종의 질병이 심해진 음력 12월 6일로부터 열흘 뒤에 이런 일이 있은 걸로 보아, 조정에서 유이태를 부른 것은 숙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것은 유이태가 숙종시대에 전국적 명성을 가진 명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호가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에서 인용한 거창 유씨의 족보에 따르면, 유이태는 숙종 때인 을미년 2월 27일(1715년 4월 1일)에 사망했고 그의 무덤은 경상도 산청에 조성됐다. 이 정도면, 족보 속의 유이태가 <숙종실록>의 유이태와 동일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경상도 산청에 유이태란 명의가 있었던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이태와 허준은 동시대에 살지 않았다

한편, 숙종시대보다 나중인 정조시대에도 유이태(劉爾泰)란 의원이 활약한 적이 있다. 홍역 치료에 관한 전문서인 <마진편>을 저술한 인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명의 유이태 모두 허준과 다른 시대 사람이라는 점이다. 숙종시대의 유이태는 1715년에 사망했다. 그런데 허준은 광해군 시대인 1615년에 사망했다. 숙종시대의 유이태가 백세를 넘어 장수하지 않은 이상, 유이태는 허준이 죽은 뒤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조시대(1776~1800년)의 유이태가 허준과 동시대 사람일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점은, 숙종시대 유이태든 정조시대 유이태든, 유이태와 허준이 사제관계였을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설령 그런 관계가 있었다 해도, 유이태가 스승이 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관계가 있었다면, 차라리 허준이 스승이었다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처럼 '유의태(유이태)란 명의가 허준의 할머니·할아버지의 연고지인 산청에 살았으므로 허준은 유의태(유이태)의 제자일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실제의 허준은 자기가 죽은 뒤에나 태어난 유이태를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유이태는 허준의 명성을 들으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자기를 허준의 스승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을 알면 유이태의 기분이 과연 어떨까? 

노정우의 글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  양예수(최종환 분). ⓒ MBC

그럼, 허준보다 앞선 시대에 조선 최고의 명의는 누구였을까? 허준이 의학 분야의 선배 혹은 스승으로 생각할 만한 명의는 누구였을까?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는 허준이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되기 전에 유의태와 양예수가 의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는 설정을 제시했다. 유의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진정한 의술을 추구하는 데 반해, 양예수는 부귀와 명성을 좇는 세속적인 의술을 추구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유의태는 허준이 죽은 뒤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양예수는 허준과 동시대 인물로서 허준보다 십 몇 년 정도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다. 따라서 유의태와 양예수가 경쟁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지만, 양예수란 인물이 허준 시대에 활동했다는 이야기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럼, 실제의 양예수는 어떤 의원과 경쟁을 했을까? 조선시대의 대학자이자 광해군의 측근인 어우당 유몽인이 집필한 <어우야담>에서는 선조 임금 때의 명의로서 양예수와 안덕수를 나란히 소개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양예수와 안덕수는 특히 투약 방식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양예수는 강한 약을 써서 빨리 효과를 내는 스타일인 데 비해, 안덕수는 부드러운 약을 써서 서서히 효과를 내는 스타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안덕수를 더 선호했다. 왜냐하면, 안덕수의 처방은 효과를 빨리 내지는 못했지만 환자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양예수는 효과를 빨리 내면서도 환자를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안덕수의 명성이 더 높았다. 

이처럼 실제의 양예수는 안덕수와 경쟁했는데도, 드라마에서는 그가 유의태와 경쟁했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만약 노정우의 글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드라마나 소설의 작가들은 양예수나 안덕수 중 하나를 허준의 스승으로 설정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허준에 관한 소설과 드라마가 지금과는 판이한 양상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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