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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산성 [黃龍山城]
집필자 차용걸

 

황룡산성                                                                     남문 옹성 
 
평안남도 남포시 용강군 옥도리의 오석산(烏石山)에 있는 석축산성.

둘레 약 6.62㎞. 오석산(565m)은 남포와 용강 일대에서 가장 높고 험한 산이며, 이곳에서는 황해와 온천평야 및 증산평야가 서북쪽으로 한눈에 보이고, 동쪽으로는 산지가 이어져서 황해에서 평양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를 제어하는 위치에 있다. 용강 일대는 본래 황룡국(黃龍國)이었다가 고구려가 합병했다고 하며, 황룡산성의 이름도 본래 황룡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 성을 안시성(安市城)이라 하였고, 둘레 12,580척(尺)이며 성안에 10개의 샘이 있고 군창(軍倉)도 있다고 하였다. 고구려의 평양성을 방어하는 서쪽 방어망의 주요한 거점으로 축성되어서 고려와 조선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수축되고 경영되었다.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오석봉처럼 험한 봉우리나 절벽이 많은 곳에서는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삼았다. 옥도벌판에 잇닿은 남쪽 계곡과 북쪽의 완만한 기슭은 내외협축(內外夾築 :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 등을 쌓는 것)하였는데, 고구려 성벽축조의 특징대로 굽도리기단을 두고 성돌을 조금씩 물려서 계단식으로 쌓거나 전반적으로 경사를 이루게 쌓았는데, 성벽의 높이 10∼11m, 아랫너비 6∼8m, 윗너비 3.5∼4.5m이다.

성문은 사방에 하나씩 마련하고, 남문 부근에는 성안의 계곡물이 배수되는 수구문이 있다. 사방의 봉우리마다 장대(將臺 : 城·堡·屯·戍 등의 동서에 쌓아올린 장수의 지휘대) 터가 있으며, 북장대인 오석봉에는 봉화대터도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여장(女墻 : 성가퀴, 성위에 활 또는 조총을 쏘는 구멍이나 사이를 띄워 쌓은 작은 성벽) 2,887타(垛)와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 3곳, 곡성(曲城) 4곳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연못 3곳과 대창(大倉)·함종창(咸從倉)·삼화창(三和倉) 등의 창고가 있었다.

성안에는 안국사(安國寺)와 내원암(內院菴)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주장대(主將臺)에 황룡사가 있었고, 기자(箕子)의 초상을 봉안한 기성영전(箕聖影殿)이 새로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곳을 지키는 군비(軍備)는 별장을 비롯한 장교급 35인과 군인 2,000명 이상이 항시 근무하였다.

주변에는 고구려시기의 무덤 수백기가 분포되어 있고, 성안에서도 고구려의 기와와 그릇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중요한 지역 근거지로 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초기인 919년(태조 2)에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고, 조선시대도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던 대표적인 산성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우리나라 역사유적』(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3)
『고구려의 고고문물』(이형구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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