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80307.22016210520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55> 경남 고성의 가야국 (상)
강력한 철기로 해상왕국 꿈꿨던 '철의 가야'
동외동유적에서 청동유물 많이 출토
소가야는 쇠가야의 잘못된 기록인듯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8-03-06 21:06:47/ 본지 16면

쇠가야(소가야) 고성 고자국의 위세를 말해주는, 동외동패총유적에서 발굴된 새무늬 청동 장식(4세기).

작은 가야라고요?

오늘은 이야기 가야사 여행의 종착역이 될 경남 고성을 찾아 갑니다. 마산에서 진동을 지나 고성터널을 빠져 나오면 공룡(?)들이 반기는 고성의 들판이 펼쳐집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족암의 공룡발자국으로 공룡잔치에 열중인 오늘의 고성입니다만, 동물 아닌 사람의 역사로서 가야국의 하나가 우리 고대사의 중요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고성에 자리했던 가야국의 이름은 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삼국지), 구(고)차국(久(古)嵯國, 일본서기), 고사포국(古史浦國, 삼국사기), 고자국(古自國, 삼국유사) 그리고 소가야(小伽耶) 등이 전해지는데, 대가야와의 대비 때문인지,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 때문인지, 아마도 소가야라는 이름이 가장 친숙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소가야 혼자 특별하고, 나머지는 고자·고차·고사처럼 모두 통하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도 다수의 고자국보다 한 가지뿐인 소가야가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겁니다. 고려의 삼국유사와 그를 답습했던 조선시대 지리지들 때문입니다. 더구나 고성의 가야인들 스스로가 자기네 국명으로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자기를 '작은' 가야로 불렀을 리는 만무합니다. 대한민국의 대와 한은 크다는 한자(大)와 한글(한)이 겹쳐 쓰인 것입니다. 작은 나라일수록 크다고 주장하는 것이 인지상정일겁니다.

소가야=쇠가야의 흔적

소가야는 쇠가야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럴만한 근거도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경덕왕은 고자군(古自郡)을 고성군(固城郡)으로 바꾸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한 때의 지명이 철성(鐵城)이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성(固城)과 철성(鐵城)은 '쇠처럼 단단한 성'입니다. 지금도 소고기와 쇠고기는 서로 통합니다. 따라서 소가야는 '작은 가야'가 아니라, '철의 가야'였습니다. 이러한 문헌적 추론은 전·후기의 가야사에서 보여주는 고자국의 위세와 고성읍 중심에서 발굴되었던 동외동패총유적에서 증명됩니다. 

1974년 동아대박물관은 패총유적의 아랫단에서 넓이 3×1.5m 두께 2~5㎜의 야철지(冶鐵址)를 발견하였고, 1995년 국립진주박물관은 윗단 중앙부의 제사유적에서 두 마리의 새가 마주보는 청동장식을 발굴하였습니다. 전자가 1~3세기 쇠가야의 제철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것을 다스리던 4세기 지도자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쇠가야의 고자국은 사천(사물국) 함안(아야국) 칠원(칠포국) 마산(골포국) 등과 함께, 김해의 가락국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3세기 전반의 일로 전하는 이른바 포상팔국(浦上八國)의 전쟁이 그것입니다. 이전까지 고성지역에 분포하던 고인돌의 청동기문화를 통합하고, 철기문화 단계로서 가야국의 출발을 보여주는 것이 동외동유적이고, 그 나라는 고자국(古自國)이었습니다.

해상왕국의 흔적

동외동유적에서는 중국제 청동거울의 파편이나 토기와 함께, 왜 계통의 청동창과 토기들도 출토되었습니다. 이른 시기부터 대외교역에 활발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고자국의 이름에도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찍이 고자·고차·고사 등의 어원을 곶·곶·곳으로 보아, 고자국을 '곶(곳)의 나라'로 보았던 해석이 있었습니다. 곶은 장산곶이나 장기곶 처럼 바다로 튀어 나간 고성반도의 형상과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바닷가에 인접해 곳곳에 만곡이 심한 고성의 자연지리적 특징에서 비롯된 국명으로 짐작됩니다. 통영까지 튀어나간 고성반도의 지형은 해상왕국의 면모를 가지고 있던 고자국의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였고, 드디어는 국명으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3세기 전반에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해상교역권 쟁탈전의 양상으로 진행되었던 포상팔국 전쟁에서 고자국, '곶 나라'가 고사포국 즉, '곳과 포구의 나라'로 표기되었던 것은 이러한 지형과 해상왕국의 면모를 아울러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학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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