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1753

강화도 '돈대'에서 춤이나 춰볼까?
[역사와 함께 걷는 강화나들길 20] 강화도의 54개 돈대
14.10.25 15:55 l 최종 업데이트 14.10.25 15:55 l 이승숙(onlee9)

▲  돈대는 땅의 모양새를 따라 네모형, 둥근형, 일자형, ㄷ자형 등 여러 가지로 만들었다. ⓒ 문희일

"이야! 여기 완전 공연장 같네. 음악 연주회를 하면 참 좋겠다. 여기서 춤을 추면 더 좋겠다. 우리 한번 그래 볼까?" 

사방을 둘러보던 박 선생님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러더니 한 발 더 나아가서 춤추기에 딱 좋은 곳 같다며 당장이라도 춤꾼을 불러올 기세다.  

십여 년 전 이맘 때에 동막해수욕장 옆에 있는 분오리돈대에 놀러갔던 우리는 그만 주변 경치에 반하고 말았다. 물이 빠진 갯벌이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져 있고, 등 뒤로는 민족의 영산(靈山)인 마니산이 조용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취한 박 선생님은 서울의 지인들을 불러 춤 공연을 한 번 하자고 했다. 문화예술계에 아는 분이 많은 박 선생님이신지라 청하면 달려올 사람은 있을 것 같았다. 

공연장 같은 돈대, 원래는 군사시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사방이 온통 붉은 홍시 빛으로 물들었다. 모두 말없이 지는 해를 배웅했다. 서서히 사위가 저물어갔고, 마침내 깊고 푸른 밤이 되었다. 그제야 우리는 돈대를 내려왔다. 

그날의 느낌이 하도 좋아서 그 뒤로도 분오리돈대를 자주 찾았다. 날씨나 계절, 또는 시간에 따라 돈대는 늘 새롭게 다가왔다. 그러나 하늘과 통할 것 같은 느낌은 한결같았다. 

▲  바닷가의 튀어나온 언덕에 돈대를 만들어 사방을 경계했다. ⓒ 문희일

누구라도 돈대에 오르면 그런 기분을 느끼나 보다. 어떤 이는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두 팔을 하늘로 쭉 뻗으면서 환호작약한다. 하늘과 맞통할 듯이 열려있는 돈대의 둥근 마당에 서면 저절로 감흥이 나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이끼가 낀 석축을 따라 돈대를 한 바퀴 둘러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과거로 들어가게 된다. 

원래 돈대는 바다를 지키기 위해 세운 경계초소와 같은 곳이었다. 바닷가로 툭 튀어나온 언덕에 돌로 성을 쌓고 병사들이 상주하면서 지키던 소규모의 방어시설이 바로 돈대다. 그런 돈대가 강화에는 54군데나 있다. 강화도가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 온 사방을 돌아가며 군사시설을 만든 것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큰 전란을 겪은 뒤 조선의 조정에서는 방비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효종 때부터 강화를 특별히 생각하며 군사시설을 만들기 시작한다. 특히 숙종은 강화를 더 주목했다. 숙종은 강화도를 안전한 보장지처로 만들기 위해 동서남북 사방 해안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돈대들을 축조했다. 숙종은 강화에 48개의 돈대를 만들었다.

국책사업이었던 54개 돈대 축조 공사

돈대는 돌로 쌓은 작은 성이다. 비록 규모는 성보다 작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얕볼 공사가 아니었다. 돈대를 쌓자면 돌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물자들이 필요했다. 성을 쌓거나 돌을 나르는 등 인력 또한 많이 투입을 해야 했다. 그런 돈대를 한꺼번에 50개 가까이 쌓았으니 이 어찌 간단한 공사였겠는가. 돈대를 만드는 공사는 국가적인 큰 사업이었다.  

돈대를 쌓으려면 돌이 많이 필요했다. 다행히 강화도에는 돌을 채취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마니산과 별립산 그리고 매음도를 비롯한 딸린 섬들에서 돌을 얻었다. 큰 바위덩이를 알맞은 크기로 잘랐을 것이다. 지금처럼 도구가 좋은 시절에도 돌을 떼어내는 작업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닌데, 그 시절에는 오죽했겠는가.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돌 작업을 했을 테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는가.  

▲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곳에 길다랗게 만든 용머리(용두)돈대. ⓒ 문희일

▲  벼랑 위에 쌓은 용두돈대 ⓒ 문희일

산에서 떼어낸 돌들을 옮기는 것도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을 것 같다. 산에 있는 돌을 수십 리 떨어진 바닷가까지 가져오자면 오죽 많은 공력이 필요했을까. 더구나 질퍽이는 갯벌을 만났을 때는 일이 몇 배나 더 힘들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쌓은 돈대이니 큰 성들보다 규모가 조금 작다고 어찌 가볍게 보고 지나칠 수 있을 것인가.  

돌을 다듬고 또 나르며 성을 쌓는 등의 공사에는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약 400명의 석수와 그 외 대장장이 등 1500여 명이 투입이 되었으며 어영군의 군사도 4300명이나 와서 성을 쌓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각 도의 승군(僧軍) 8000명이 합류하여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총동원 인원이 대강 어림잡아도 1만5000명에 육박한다. 이렇게 국가적으로 물자와 사람을 투입해서 마침내 숙종 5년인 1679년에 48돈대가 완성되었다.  

당시 돈대 축조의 총책임자였던 병조판서 김석주는 숙종 임금에게 아래와 같은 보고를 한다. 

"신이 강화유수 윤이제를 만나 돈대 역사의 진행 상황을 자세히 물어보니 승군이 취역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으나 말썽을 부린 일이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또 중군인 윤천뢰도 말하기를 '어영군은 모두 익히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어서 어제와 오늘 행군할 때에도 꽤 질서를 지켰으니 앞으로 힘써 일을 할 것이고, 게으름을 피우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뒤로는 돈대 역사에 관계된 모든 일은 반드시 유수와 상의하여 시행하라고 윤천뢰에게 당부하였습니다. - <비변사등록>. 숙종 5년(1679) 4월 8일 

이처럼 강화에 돈대를 쌓는 일은 병조판서가 총책임을 맡을 정도로 중요한 국책사업이었다. 

▲  강화 서쪽 해안을 지키던 돈대 중의 하나인 '미루지돈대'. ⓒ 이승숙


▲  무너지고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돈대. ⓒ 이승숙

이후 숙종은 4곳의 돈대를 더 설치하였고 영조와 고종 때에도 돈대를 쌓았다. 1999년에 육군박물관이 조사를 한 바에 의하면 현재 강화에 남아 있는 돈대는 모두 54곳으로 나타난다.

'비변사등록' 숙종 4년 11월 4일에 의하면 돈대를 쌓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는 그 높이를 약 3장(6m)으로 했으며 산에 돈대를 쌓을 경우에는 산을 따라 돈대의 성첩을 만들었다. 그리고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인 성가퀴를 6척(약 120cm) 높이로 덧쌓았으며, 포를 쏠 수 있도록 전면 2곳과 좌우로 각 1곳씩 전체 4곳에 포혈을 만들었다. 

돈대는 지형에 따라 각각 다르게 만들었는데, 네모 반듯한 방형(方形)과 둥근 형태, 또는 ㄷ자형으로 쌓기도 했다.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는 용두돈대는 길이가 약 100m에 달할 정도로 긴 돈대인데, 바다로 튀어나온 땅의 모양새를 따라 일자형태로 길게 쌓았다. 돈대의 둘레는 대개 동서 약 30~40m, 남북 약 40여m에 달하며 벽체의 두께는 약 3~4m 내외에 달할 정도로 두껍게 쌓았다.

강화해협에는 특별히 20개의 돈대를...

강화의 동쪽 바닷가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라서 다른 곳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대대 규모의 군사시설인 진과 보를 비롯해서 소대급인 돈대가 이곳에 집중적으로 축조되었다. 강화에 있는 12개의 진과 보 가운데 절반인 6개가 동쪽 해안인 강화해협을 지키는 데 있었고, 54개에 달하는 돈대 중 20개가 역시 강화해협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돈대의 상급기관인 진과 보에는 100명에서 170명쯤의 병사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진과 보마다 서너 개의 돈대들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말하자면 각 돈대마다 30명 내외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해안을 경비했던 셈이다. 그러니 54곳의 돈대를 지키자면 1500명의 병사들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  분오리돈대. ⓒ 문희일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은 강화의 동쪽 해안에 있는 돈대들을 보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월곶진과 갑곶진, 그리고 용진진,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이렇게 여섯 개의 진과 보가 있었다. 월곶진은 강화 동북쪽에 있었는데, 서해에서 한강으로 접어드는 곳이라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월곶진 소속의 돈대로는 적북돈, 휴암돈, 월곶돈, 옥창돈이 있었다.  

강화로 들어오는 나루터인 갑곶나루 인근에는 제물진이 있었다. 망해돈, 제승돈, 염주돈, 갑곶돈은 제물진에 소속되어 강화 앞 바다를 지켰다. 또 용진진에는 가리산돈, 좌강돈, 용당돈이 있었고 광성보는 화도돈, 오두돈, 광성돈, 용두돈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덕진진과 초지진에도 손항돈과 덕진돈 그리고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 등이 있었다.  

이처럼 강화 동쪽 해안을 따라 총 20개의 돈대가 있어서 서해에서 한강으로 접어드는 길목을 물 샐틈 없이 방비했다. 그 밖의 서쪽과 남쪽 그리고 북쪽의 해안을 따라서도 34개의 돈대들이 있어서 바다를 통해서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숙종 5년인 1679년에 돈대를 쌓았으니 지금으로부터 30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뒤인 1866년과 1871년 그리고 1875년에 강화해협을 따라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일본군이 쳐들어온다. 조선의 병사들은 돈대를 의지해서 항전했지만 신무기인 대포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만다. 포탄을 맞은 돈대들은 무너지고 파괴됐다. 

무너진 돈대들을 다시 쌓고 보수했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돈대들은 또 무너지고 허물어져 내렸다. 지금은 원형이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는 돈대들이 많은 형편이다. 그 중 일부는 복원해 놓았지만 많은 수의 돈대들은 성축이 무너져 내리고 잡초만 무성한 채 폐허나 매한가지로 버려져 있다. 

▲  마니산을 등 뒤에 두고 있는 분오리돈대 ⓒ 이승숙

강화나들길 2코스는 '호국돈대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름 그대로 나라를 지킨 돈대들을 만나는 길이 바로 호국돈대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총 10개의 돈대를 볼 수 있고 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외국의 군대와 맞서 치열하게 싸운 덕진진과 초지진 그리고 광성보도 만난다.    

돈대를 찾아 떠나는 여행

돈대를 찾아나서는 여행은 어떨까. 돈대마다 각각 다른 특징들이 있으니 그것을 찾아보는 것도 꽤 흥미로울 것 같다. 더욱이 바닷가 언덕에 돈대들이 있으니 경치가 좋을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하루 중에도 썰물과 밀물의 물때에 따라 확연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돈대는 강화의 숨어있는 보물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무너지고 허물어진 채 잡초에 뒤덮여 있거나 혹은 돈대로 가는 길이 없어서 풀숲을 헤매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끼 낀 석축을 만나고, 그래서 돈대 위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300년 전의 옛날이 내 앞에 다가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돈대에서 공연을 하면 참 좋겠다고 했던 우리는 그 후 스스로 무용가가 되었고 또 음악가가 되었다. 전문 연주가가 돈대에서 하는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우리 스스로 춤추고 노래하며 자유롭게 놀았다. 돈대에서는 누구나 다 그렇게 열린 마음이 된다.  

나들이 삼아 떠나는 강화나들길에는 돈대가 있다. 돈대에서는 누구라도 춤꾼이 되고 노래패가 된다. 땅에 등을 대고 누우면 하늘과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바람과 구름 그리고 따사로운 햇살과 한참 놀다보면 세상의 일들은 저만치 물러나 있다. 돈대는 모두 내려놓고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다.

이번 주말에는 돈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해보자. 찾는 이가 없어 쓸쓸한 돈대를 만나면 더 좋을 것 같다. 그곳에 올라서서 물이 빠진 갯벌을 안아보기도 하고 한창 추수중인 들판도 한번 더듬어 보자. 그러노라면 가을 햇살도 한참 동안 돈대에 머물렀다 갈 것 같다. 비록 노루꼬리처럼 짧기로 소문이 난 가을 햇살이지만 돈대에서만은 조금 더 넉넉하게 비춰줄 것 같다.  

강화의 54돈대
 
월곶진 소속 : 적북돈, 휴암돈, 월곶돈, 옥창돈
제물진 소속 : 망해돈, 제승돈, 염주돈, 갑곶돈
용진진 소속 : 가리산돈, 좌강돈, 용당돈
광성보 소속 : 화도돈, 오두돈, 광성돈
덕진진 소속 : 손석항돈, 덕진돈
초지진 소속 : 초지돈, 장자평돈, 섬암돈
선두보 소속 : 택지돈, 동검북돈, 후애돈
영문 소속 : 분오리돈, 송곶돈
장곳보 소속 : 미곶돈, 북일곶돈, 장곶돈, 검암돈
영문 소속 : 송강돈, 굴암돈
정포보 소속 : 건평돈, 망양돈, 삼암돈, 석각돈
영문 소속 : 계룡돈, 망월돈
인화보 소속 : 무태돈, 인화돈, 광암돈, 구등돈, 작성돈
철곶보 소속 : 초루돈, 불장돈, 의두돈, 철북돈, 천진돈
승천보 소속 : 석우돈, 빙현돈, 소우돈, 숙룡돈, 낙성돈
이상의 53돈대 이외에 1867년(고종 4)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용두돈까지 포함하여 돈대는 모두 54개이다.

 
▲ 강화의 돈대들 용당돈대, 오두돈대, 용두돈대, 미루지돈대, 굴암돈대, 월곶돈대의 모습입니다. ⓒ 문희일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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