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hn_019_0070&fileName=hn_019_0070.pdf
* "발해 城址의 조사와 연구 - 송기호" 중 "Ⅲ.도성 - 1. 敖東城"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오동성(敖東城)
1989년  송기호 
 
이 성은 아타리성(俄朶里城), 鄂多里(哩)城, 어둬리성,악다리성), 阿克敦城(아커둔성,아극돈성)5) 등으로도 불리고 있으며, 중국 길림성 敦化鎭(돈화진,현 돈화시)의 남쪽 교외에 위치한다. 이곳은 랴오예링(老爺嶺,노야령)산맥과 장광차이(張廣才,장광재) 산맥이 갈라지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는 돈화 분지의 가운데에 해당하며, 성의 남쪽에는 무단장(牡丹江,목단강)이 흐르고 주위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또 멀리에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남쪽에는 장백산맥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1938년 야마모토 마모루(山本守)가 답사하여 보고한 바 있고,6) 1958년 단경린(單慶麟)이 그간의 조사 내용을 정리하여 학계에 보고한 바도 있다.7) 이 성은 1961년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었다.8) 이상의 조사 보고를 토대로 성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2) 오동성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림 2). 외성은 평면이 장방형으로 동서로 길쭉하다. 성벽의 윗부분은 이미 심하게 파괴되고 기초부분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은 서벽뿐이고, 남, 북벽은 일부만 남아 있으며, 동벽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서벽의 길이가 190m 이므로 성의 남북 길이는 이 길이에 해당한다. 남벽은 252m가 남아 있어 189m가 잔존하고 있는 북벽보다 길다.9) 현재 성벽의 기초부분의 너비가 대체로 8∼1m 정도로 나타나고 있어 당시의 너비는 10m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성벽의 높이는 2∼3m 정도 남아 있어 원래 높이가 3.1m 정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은 흙을 판축하여 쌓았다.

외성의 남벽에는 1개의 門址와 그 주위를 둘러싼 甕城이 남아 있다. 문지는 남벽의 중앙에 있는데, 너비가 6m 이다. 이곳으로부터 밖으로 수m 떨어진 곳에 옹성자리가 있는데 심하게 파괴되었다. 또 성벽 위에는 불규칙하게 雉가 있었는데, 남벽에 3개, 북벽에 2개, 서벽에 2개가 있었고, 동벽은 불명이었다.10) 외성 안에 있는 내성은 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89m이다. 성벽의 밑부분은 외성에 비하여 좁아서 너비가 8∼9m 정도이다. 이곳은 외성 서벽으로부터 60m, 남, 북벽으로부터 각각 4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다소 치우쳐 있다. 성벽은 이미 거의 파괴되어 있어 드문드문 평지보다 높게 드러나 있다. 성벽 둘레에는 해자를 팠는데 너비가 약 9m가 되며, 깊은 곳은 현재의 지표에서 1m 정도가 된다. 내성의 성문은 확인할 수 없지만 외성의 경우로 보아 남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집들이 있던 기단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구들을 놓았던 집터들이 발견되었다.1) 그러나 이 성을 아직 본격적으로 발굴하지 않아 단지 지표 채집된 유물만이 보고되어 있다. 성안에는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널려 있었는데, 채집된 것으로는 백자 조각, 청자 조각, 도기 조각이 있으며, 그외에 石臼 1점이 있지만 이들이 발해 시기의 것인지는 불명이다. 

일찌기 이 성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청나라 말기의 조정걸(曹廷杰)로서 그는 이 성이 바로 대조영이 첫 도읍지로 삼은 곳이라고 하였다.12) 그 후에도 구국(舊國)의 위치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1949년 이곳으로부터 가까운 육정산(六頂山)에서 발해 제3대 무왕 대흠무(文王 大欽茂)의 둘째 딸인 정효(貞惠)공주의 묘비와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오동성이 바로 그곳이라는 견해가 김육불(金毓黻)에 의해 다시 제기된 이후13) 대체로 그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류샤오둥(劉曉東,유효동)은 보통 구국의 소재지로 오동성에 한정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에 반대하여 구국의 범위를 오동성과 성산자(城山子)산성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범위로 잡을 것을 제기하였다.14) 또 주영헌은 정약용(丁若鏞)의 고증을 이어받아 이곳이 발해의 구국이면서 중경현덕부 자리라고 주장하였다.15) 오동성의 주위에는 이 성을 호위하는 성들이 포진하고 있다(그림 3). 가까이에 오동성과 한 조를 이루고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16)을 위시하여 석호(石湖)고성, 흑석(黑石)고성, 마권자(馬圈子)고성, 통구령(通溝嶺)산성이 있고, 최근에는 횡도하자(横道河子)고성17)도 보고 되고 있다. 한편 강을 방어하는 요새로서 남태자고성보(南台子古城堡), 대전자(大甸子)고성보, 손가선구(孫家船口)고성보 등이 있으며, 용도 불명의 건축지인 24개석도 성교(城郊),
해청방(海靑房), 관지(官地), 요전자(腰甸子)에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2차대전 이후 발해사 연구에 획기적인 출발을 가져오게 하였던 육정산(六頂山)고분군도 가까이에 있다.18)


(그림 3) 오동성 주위의 발해유적


주석

5) 曹廷杰, 《東三省輿地圖說》 渤海建國地方考, 187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p. 85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집필소조, 《중국의 우리민족》한울, 198 p.36. 및 p.27
 
6)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pp.85∼89
7) 單慶麟, 〈渤海舊京城址調査〉《文物》1960―6,
8)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집필소조, 《중국의 우리민족》한울, 198, p.273
 
9) 山本守는 외성의 크기를 동서 약 400m, 남북 약 20m로, 내성의 크기를 각각 80m로 추정하였고, 주영헌도 이 기록을 토대로 서술하였다.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pp. 86∼87
주영헌,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p. 14
그러나 單慶麟은 외성의 크기를 동서 약 270m, 남북 190m, 내성의 크기를 각각 89m로 추정하였다.
單慶麟, 〈渤海舊京城址調査〉《文物》1960―6, pp.69∼70
 
10)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p. 87
11) 주영헌, 《발해문화》사회과학출판사, 1971, p. 14
12) 曹廷杰, 《東三省輿地圖說》 渤海建國地方考, 187 참조
13) 金毓黻, 〈關于渤海貞惠公主墓碑研究的補充〉《考古學報》1956―2, p. 7
14) 劉曉東, 〈渤海舊國諏議〉《學習與探索); 1985—2
15) 주영헌, 〈발해 중경 현덕부에 대하여〉《고고민속》196―2
16) 대조영이 첫도읍지로 삼았던 동모산이 이곳이라는 설도 있다.
劉忠義, 〈東牟山在哪裏〉《學習與探索》1982―4
 
17) 이 성에 대해서는 명칭만 나와 있어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嚴長錄·楊再林, 延邊地區高句麗渤海時期的紋飾板瓦初探 《博物館研究》 198―2, p. 61
 
18) 이상의 유적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齋藤甚兵衛·山本守, 《琿春·敦化》滿洲事淸案內所, 1943, pp. 7∼91
歷史系敦化文物普査隊第二小組, 〈敦化縣二十四塊石遺址調査記〉 《吉林大學
人文科學學報》1953―3
王承禮·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考古》1961―6
王承禮, 〈吉林敦化牡丹江上游渤海遺址調査記〉《考古》1962―1, 앞논문
王承禮, 〈敦化六頂山渤海草清理發掘記〉《社會科學戰線》19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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