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bobaedream.co.kr/board/bulletin/view.php?code=army&No=70528 
* 내용이 좀 많이 길어서 내용상 전반부만 정리해서 가져오고 후반부는 정리해서 따로 올립니다. 


잊혀진 영웅 이억기
avm 2011.05.09 (월) 23:36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원균의 정치적 대립구도속에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수군 최고의명장으로 생각되는 이억기 장군에 대한 미흡한 개인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기술하였다는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학계나 군사분야에서 이억기 장군에대한 연구는 한번쯤 해봐야할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이분야에서 계시는 분이시라면 이억기 장군에대한 연구는 충분한 역사적 논점이 존재할 부분이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반말체 문장으로 기술한 부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이제 시작합니다. 만약 이순신 이 칠전량에서 원균과이억기와 같이 사망하였다면  역사는 어느 장수를 역사에 명장으로 기록할까??
 


0. 이억기 

이억기(李億祺, 1561년~1597년)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경수(景受)이다. 아버지는 심주군(沁洲君) 연손(連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하여 17세에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이 되고 그 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21세 때 경흥부사(慶興府使)를 역임하였는데 이는 당시에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북방의 여진족이 두만강을 건너 남하하자 전투가 벌어졌고 이들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26세 때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임명되었다. 1587년 여진족이 경흥 부근으로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게되자 당시 경흥부사였던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이 체포되자 이억기는 이들을 변호하였으며 이때 이순신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1591년(선조 24) 32세 때 순천부사를 거쳐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과 협력하여 당항포·옥포해전에 출정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참소로 하옥(下獄)되자 이항복(李恒福)·김명원(金明元) 등과 함께 무죄를 변론하였다.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원균 휘하의 좌익군(左翼軍)을 지휘하여 용전하다가 칠천량(漆川梁) 싸움에서 원균과 함께 전사하였다. 전투에 패하게 되자 패전한 장수로서 바다에 투신 자결을 선택하였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완흥군(完興君)으로 추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여수 충민사(忠愍祠)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상기 내용들은 각종 포털사이트의 나온 이억기 장군의 연력 이다. 그런데 연역을 들여다 보면 임진왜란 직전까지의 이억기 장군의 행적은 출중한 무관으로써의 공로로 인해 젊은 나이에 승진한 것을 알수 있다.)
 

1. 이억기의 무예는?

이는 그가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왕족 종친의 계보이기 때문에 낙하산 인사를 단행해서 직책을 가졌다는 뉘앙스와는 거리가 있다. 이억기는 실록에도 나타나지만 어린 나이였을때부터 무예에 출중함이 있음을 알수 있다.
 
그는 낙하산으로 직책을 획득한게 아니라 출중한 그의 무예 실력으로 인해 임진왜란 이전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어린 나이 임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획득한 것이다.
 
 
2. 수군 수사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마치 그가 이순신, 원균을 따랐을까? 

또한 늘 이억기 장군을 이야기할 때 가장큰 역사적 오류를 범하는 것 중에 하나가 왜란 당시 수군 수사중 가장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마치 그가 이순신을 따랐느니 아님 늘 이순신이나 원균의 리드를 당하며 뒤에서 지원이나 기동타격 역할을 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사회의 신분이 나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은 당 시대적상황을 펼쳐보면 누구도 알수 있다.
 
원균이 세명(이순신과 이억기)의 수사중 연배가 높다고 해서 이래라저래라 할수도 없는 입장이거니와 이순신이 이억기보다 연배가 높다고 해서 형님동생 사이로 비춰지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이다.이것은 

정말로 역사적 인식자체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이억기,이순신,원균 모두 서로가서로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수 없는 입장이였다. 그렇게 따진다면 탄금대 전투당시 신립(46세)과 이일(54세)의 관계또한 다시 조명되야 할 것이다.
 
왜란전까지의 세 수사의 무신 공로를 보면 이억기 장군이 결코 이순신이나 원균의 경력보다 절대 뒤지지 않는다.오히려 당시 최연소 나이로 공로를 인정받아 용장으로써의 명성을 얻고 있다. (이는 왜란 발발직전 전쟁징후를 파악한 조정에서 급히 세수사를 남해안에 배치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3. 선조의 종친이기 때문에 선조가 견제하여 삼도수군 통제사에 오르지 못했다? 

또 하나의 이억기 장군에 대한 편견된 시각을 보자면 선조의 종친이기 때문에 선조가 견제하여 삼도수군 통제사에 오르지 못했다? (종친:임금의 맏아들자손은 4대손까지..나머지 아들의 자손은 3대손 까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억기는 과연 선조의 종친일까? 

굳이 따지자면 이억기는 왕족 계보를 두고는 있지만 선조의 종친은 아니다. 이억기 장군의 족보를 보자면 정종대왕의 10남인(덕천군)-->덕천군의 슬하에 4남을 두었다.그중 장남 (신종군)-->신종군은 슬하에 9남을 두었다. 그중 차남 (신곡수)--->신곡수는 슬하에 5남을 두었다.그중 신곡수의 차남(심주군)-->심주군의 3째 아들이 이억기 장군이다.
 
이 요약한 족보만 보아도 선조가 굳이 이억기 장군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거나 견제할만한 왕의 가문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정종대왕의 계보라면 더더욱이 의미가 없어진다.

만약 선조가 이억기장군을 왕족 출신이라 의식적으로 배제하였다면 이억기장군보다 당시 위협할만한 종친의 왕실계보들이 줄을 잇고 있었을 것이다. 굳이 따진다면 벌써 자기 아들인 광해군이나 권율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이억기보다 왕권 패위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것이다.)
 
 
4. 이억기는 과연 원균과 이순신의 조연이였나?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순신을 도와, 이순신과 협동하여, 원균 수하에 있으면서, 기동타격의 역할을 한 이억기에 대한 후대에 평가는 왜 원균과 이순신의 조연 역할로만 비춰져야 하는지, 그리고 이는 당시 당파싸움이 만연했던 조선 조정에서 원균과 이순신의 대립구도 속에 실질적으로 이억기를 지지했던 조정의 정치 세력들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가 이억기를 의식적으로 배제를 한 것이 아니라 조정의 당파싸움의 주세력들이 이억기를 총알 받이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후략...이어짐) 
http://www.bobaedream.co.kr/board/bulletin/view.php?code=army&No=70528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