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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답사기 4 : 집안 (국내성, 장군총) - 백유선" 중 국내성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고구려답사기 4 : 집안 (장군총
2005.09.14 13:35:15 백유선 

          고구려답사기 4 : 집안 (국내성) - 백유선  http://tadream.tistory.com/1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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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총
 
국내성을 느긋하게 한 바퀴 돌다 보니 아침 식사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성벽이 끝나는 곳에서 좁은 골목길의 민가로 접어들어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다 시간을 허비했던 거지요. 시간에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성급히 삼륜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런데 50m 쯤 가다가 우회전해서 또 50 m 정도 가다 보니 호텔 앞이었습니다. 지리를 몰라 바로 근처에서 택시를 탄 셈입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생긴 현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기사도 미안한지 재차 그곳이 목적지가 맞는지 묻더군요. 한번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전 일정으로는 장군총. 광개토대왕릉비, 태왕릉, 오회분, 집안 박물관이 잡혀 있고, 오후에는 국내성과 환도산성, 산성하 무덤떼, 그리고 압록강을 구경하는 일정으로 되어 있어 가장 기대가 컸던 날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고구려의 기상이 담긴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야간열차를 타고 백두산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장군총으로 향했습니다. 차안에서 서교수의 해설이 있었습니다. 먼저 장군총이 누구의 무덤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장군총이라는 이름은 100여 년 전 이곳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모르는 이곳 사람들이 중국의 어느 장수의 무덤일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장군총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로 보아 왕릉으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중국학계에서는 장군총은 장수왕의 능으로 보는 견해가 거의 정설이라고 했습니다. 서교수 역시 이 설에 동의하여 이후로는 장군총이라는 표현 대신에 장수왕릉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더군요. 그러나 그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는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여 평양에서 죽었는데 어떻게 그의 무덤이 여기에 있겠느냐?'며 반론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장수왕릉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당시에는 왕이 되면서부터 무덤을 만든다, 장수왕도 그렇게 준비한 것이다. 따라서 전혀 이상할 게 없다.'라고 반박한다고 합니다.
 
무덤의 규모로 보나, 최근 발굴된 무덤 앞의 제단으로 보나 장수왕릉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는 하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는 이상 확신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확신이 없어서인지 안내문에도 '장군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실제로 본 장군총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높이만 13.1m, 한 변의 길이가 31.58m나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중국어 외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안내판이 별도로 있어서 상당히 반가웠습니다. 장군총의 모습은, 본적은 없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동방의 금자탑'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장군총을 바라보고서야 비로소 '이제 내가 고구려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촬영과 자세한 관찰을 위해 일행과 떨어져 혼자서 살펴보았습니다. 뒤쪽 계단을 통해 널방(돌방, 석실, 무덤방)이 있는 5층까지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큰 널방에는 널받침 두 개가 놓여있어 왕과 왕비의 합장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안치한 후, 나중에 다른 한 사람이 죽으면 다시 널방의 문을 열고 시신을 합장할 수 있게 된 것이, 돌방이 있는 고구려 무덤의 특징입니다. 고구려 무덤은 대부분 합장릉인 셈이지요. 따라서 고구려 무덤의 돌방에는 보통 두 개의 널받침(관대)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 만큼 출입구만 찾으면 쉽게 무덤 안에 들어갈 수 있어서 고구려 무덤의 대부분은 도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고구려의 왕릉급 고분 중에 확실하게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이 없는 이유입니다. 장군총 역시 발견 당시에 이미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주인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잖아요?
 
서교수가 제기한 것 중에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장군총의 앞면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은 널방이 보이는 쪽을 앞으로 생각하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뒤쪽인 동쪽(북동쪽)에서 제단터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제단이란 제사를 지내는 곳이니, 제단이 있는 곳이 앞쪽이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태왕릉도 널방의 뒤쪽 동쪽 면에 제단이 있는 구조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산이 있는 쪽이 앞쪽이고 국내성을 바라보는 쪽이 뒤라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공주 송산리나 부여 능산리의 백제고분도 모두 널방 쪽이 평야를 향하고 있어 앞쪽으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또 무덤 위쪽에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와 등 건물의 흔적이 발견되었었거든 요. 그 동안 그 건물에서 제사를 지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럼 이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무덤 위 건물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계속되고요. 기회가 없어 질문하지 못했는데 이 의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널방이 있는 쪽이 뒤쪽이었을까?
 
장군총 주변에는 딸린무덤(배총)이 있습니다. 모두 5개였으나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는 딸린무덤은, 생김새는 장군총과 비슷하나 규모는 더 작습니다. 이곳에서는 왕의 후궁의 무덤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고 합니다.
 


<입구에서 본 장군총. 생각보다 규모가 큰 장군총을 바라보고서야 비로소 고구려에 왔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장군총의 사진입니다. 보통 널방이 보이는 이쪽을 앞쪽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뒤쪽에서 바라본 장군총. 널방이 있는 5층까지 오를 수 있는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길수 교수는 이쪽에 제단터가 있으니 여기가 앞쪽이라고 주장합니다.>
 

<장군총 위에서 본 제단터. 이곳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단이라고 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집안에는 이런 제단이 발굴된 왕릉급 무덤이 모두 세 개라고 합니다. 장군총의 경우는 약간 북동쪽이긴 하지만 태왕릉과 우산 2110호 왕릉은 동쪽에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동쪽에서 서쪽에 있는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이지요.
혹시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도 동쪽에서 서쪽 서방 정토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에게 예배하는 형식이거든요. 그래서 불상이 정면이 아닌 좌측 즉 서쪽에 위치하고 있지요.  동쪽에서 서방 극락세계로 간 왕을 향해 제사를 지낸다. 어때요? 그럴 듯한 가설 아닌가요.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아래쪽은 제단터, 장군총 오른쪽 뒤로는 국내성이 있는 집안 시내가 보이고, 왼편 뒤로는 압록강 건너 북한 땅이 보입니다.>
 

<장군총 뒤의 딸린무덤. 흔히 배총이라고 하는 데 그래도 우리말이 쉽지요? 왕의 후궁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모두 5개가 있었다고 하는 데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널방이 마치 고인돌처럼 보입니다. 예전에는 아래 부분이 묻혀 있어서 고인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인돌이 아니라 무덤의 겉이 무너져 널방이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장군총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장군총의 맨 꼭대기에는 이처럼 기둥 구멍과 유사한 것이 있고, 기와 등이 발견되어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전에는 제사용 건물로 생각했지요. 그러나 장군총 뒤쪽에서 제단이 발굴되면서 그 용도가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장군총은 이렇게 돌을 파내서 쌓음으로서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는 공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고구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돌을 파내어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는 방식은 딸린무덤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건축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겠네요.>
 

<한 면에 세 개씩 이렇게 거대한 돌을 세워 놓았습니다. 모두 12개였는데 지금은 11개가 남아 있습니다. 보이는 것처럼 그 규모가 거대합니다. 가장 작은 것도 사람 키의 두 배가 넘고 무게는 15톤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용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유력한 학설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받침돌, 즉 보호석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장군총보다 규모가 큰 태왕릉에는 모두 20개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고구려 무덤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석촌동 고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한편 1층을 구성하는 돌도 무려 5.5미터가 넘는 큰 규모입니다.
 

< 1500여 년 세월의 흔적입니다. 일부 보수가 필요한 것 같은 데 보수가 가능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장군총 위로 올라가는 것을 금지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위로 올라가도 널방을 보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 데, 하루에도 수많은 관광객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모두 7층인 장군총은 각 층마다 약간씩 들여쌓기를 하고 있습니다. 들여쌓기는 고구려 산성의 축성법에서도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또 장군총은 바깥돌은 큰 돌을 다듬어서 들여쌓기 방식으로 쌓았지만, 각층 안쪽에는 흙과 돌로 채우고 다시 돌로 주춧돌을 놓고 큰 돌을 다듬어 새로운 층을 쌓는 방식으로 축조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군총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허리가방 때문에 배가 불룩하네요.>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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